#1

“…그래서 말인데, 선생님은 아연이가 소현이의 대화 상대가 돼 줬으면 좋겠어.”

“…네? 제가요?”

귀중한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호출되어 선생님을 찾아가면서 최근에 내가 학교에서 무언가를 저질렀던 적이 있는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생각해 보았지만, 생각나는 일도 짐작되는 부분도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사실 이건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아무것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왜요?”

혹시나 해서 덧붙이자면, 나는 백소현과 단 한 번도 대화해 본 적 없다. 같은 반이 아니었으면 이름도 몰랐을 거다.

“걔랑은 수업 듣는 자리도 멀리 떨어져 있고, 사소한 대화조차도 나눠 본 적 없는데요.”

“…아연아.”

“네.”

“우리 학교에 매점 이용권 있는 거 알지? 현금 대신 사용할 수 있는 거.”

“알아요.”

매점에서 3,000원 이하 물건이랑 교환할 수 있다는 지폐 같은 모양의 종이. 3,000원보다 비싼 물건을 살 때도 차액을 현금으로 지불하면 사용할 수 있다. 디자인이 굉장히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무지개색 바탕에 불규칙적으로 흩뿌려진 다양한 크기의 분홍색 하트 여러 개, 가운데에 고딕체로 커다랗게 쓰여 있는 ‘매점 이용권’이라는 하얀색 글자. 아주 가끔씩 선생님들이 발표를 잘하는 학생들한테 나눠 주시는 종이다.

‘이번 문제 맞히는 사람한테 매점 이용권 준다.’라는 선생님의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발표를 하고 싶은 학생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 저건 어쩌면 사람을 홀리는 마법이 걸려 있는 종이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런데 그거 저한테는 필요 없어요.”

“선생님이 아연이한테 줄 수 있는 것들 중에 제일 좋은 거였는데.”

“더 좋은 거 없어요?”

그 정도로는 백소현의 대화 상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

“다른 학생을 상담해 주는 활동을 했다고 생활 기록부에 남겨 줄까?”

“저 대학교 안 갈 건데요?”

애초에 지금도 유급 안 당할 정도로만 출석하고 있는데.

“음, 그러면… 선생님이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일들 중에 아연이가 원하는 걸 말해 보는 건 어떨까?”

“술 마셔 보고 싶으니까 신분증 빌려주세요. 그냥 지갑에서 신분증 꺼내서 저한테 주시면 되는 간단한 일이니까 이것도 선생님이 해주실 수 있는 일에 포함되는 거 맞죠?”

사실 술에는 관심이 없지만, 물리적으로는 가능하고 법적으로는 불가능한 일들 중에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일이 신분증을 빌리는 거였다.

“그건 들키면 선생님이 많이 곤란해질 것 같은데.”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이거 선생님이 못 들어줄 것 같아서 말한 거 맞지?”

“아닌데요. 진짜 술맛 궁금해서 말했어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물인 줄 알고 소주를 마셨다가 맛없어서 바로 뱉었던 적이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어른들은 대체 이런 걸 무슨 맛으로 먹는 건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고, 그 의문은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저 이제 교실 가서 5교시 수업 준비해야 해요.”

“…그래. 6교시에 보자.”

“오늘 6교시 도덕 수업이었어요?”

“일주일에 두 번밖에 없는 수업이니까 기억해 줬으면 좋겠는데.”

“다른 과목 시간표도 기억 못 하는 건 똑같아요.”

6교시가 도덕 수업이면… 오늘은 목요일이네.

***

“여러분들은 ‘아비투스’라는 단어를 들어 본 적 있나요?”

살아온 환경에 의해서 형성된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상 같은 것들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봤던 기억이 있다.

“아무도 없나 보네요. 뭐,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아니니까 들어 본 적 없어도 이상할 건 없죠. ‘아비투스’는 성장 환경에 의해서 뇌 속에 구조화된 성향 체계를 뜻하는 단어예요. 이렇게 말하면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냥 살아온 환경에 따라서 생각과 행동이 달라진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나는 상당히 어린 나이었을 때부터 개인의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상이 성장 환경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책에서 아비투스에 관련된 내용을 처음으로 읽었을 때 ‘저런 당연한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단어까지 만들어 내야 할 필요가 있었나?’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부터 3주 동안, 제비뽑기로 숫자를 뽑아서 자신과 같은 숫자를 뽑은 친구들과 서로에 대해서 알아 가는 시간을 가져 보려고 합니다.”

결론이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이 상자 안에는 1부터 6까지의 숫자들 중 하나의 숫자가 쓰여 있는 종이가 각각 네 장씩, 7과 8이 쓰여 있는 종이가 각각 세 장씩 들어 있습니다. 번호 순서대로 나와서….”

“저 안 할래요. 그냥 기본 점수 주세요.”

나는 예전부터 이런 식의 과제를 싫어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억지로 학생들 사이에 접점을 만들려는 의도가 너무 선명하게 보여서 역겹다고 하면 될까? 아무튼 그런 느낌이라서 굉장히 기분이 나쁘다.

“…그러면, 아연이는 이번 수업 끝날 때까지 교무실에 가 있자.”

“선생님, 저도 이 과제는 못 할 것 같아요.”

어? 아니… 여기서 백소현도 같이 이렇게 나온다고?

“그래. 소현이도 같이 교무실에 가 있어.”

“네.”

…이게 맞는 건가.

***

“일단 아연이한테 먼저 물어볼게. 왜 이번 과제를 안 하고 싶어?”

“친하지도 않은 다른 학생들이랑 협력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게 너무 기분 나쁘고 싫어서요.”

“그게 그렇게까지 기분 나쁠 일인가?”

“네, 억지로 접점 만들어서 붙여 두려고 하는 게 너무 눈에 잘 보여서 역겨워요.”

이딴 건 도대체 왜 물어보는 거야? 이유가 뭐든 결론은 그냥 과제 참여를 안 하겠다는 건데. 억지로 시켜도 비협조적으로 행동하겠다는 의사도 충분한 걸 넘어서 넘치도록 표현했고.

“…그러면, 소현이는?”

“하면 부모님한테 혼나니까요.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학교 과제에 성실히 참여한다는 이유로 자식을 혼낸다는 건가?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혹시 내가 문장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건가?

“…누나가 못 하는 일은 저도 하면 안 되니까요.”

“누나가… 학교 과제를 못 해?”

이어지는 말이 너무 상상도 못 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무심코 떠오른 것을 입 밖으로 내뱉어 버렸다.

“일곱 살 때 누나가 갑자기 쓰러져서 구급차에 실려 간 이후로 지금까지 병원 밖으로 못 나오고 있어. 그래서 누나는 학교에 못 다녀.”

“…이제 소현이는 교실로 돌아가 볼까? 아연이는 선생님이랑 해야 하는 이야기가 남았으니까 조금 더 교무실에 있고.”

“네? 아, 네. 그러면 저는 이제 교실로 갈게요.”

그 말을 끝으로 백소현은 교무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방금 전에 엄청난 사실을 털어놓은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고 가벼운 걸음으로.

“선생님이랑 해야 하는 이야기 이제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요.”

“…아연아.”

“네.”

“너는 지금까지 소현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냥 뭐… 저랑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런데 아니었네요.”

다른 학생들이랑 협력해야 하는 과제에는 절대로 참여하지 않으려는 모습도 그렇고, 급식 시간에 밥을 다 먹고 나면 항상 바로 교실로 가서 특별한 일이 없으면 5교시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그대로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도 그렇고.

“소현이에 대해서 조금 호기심이 생기지 않았어?”

“솔직히 말하자면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귀찮은 일에는 엮이기 싫다는 마음이 훨씬 더 커요. 그리고 그런 건 궁금해도 물어보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소현이가 자신의 가정사를 숨기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겠지만… 선생님 눈에는 딱히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원래 세상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니까요.”

“그리고… 걔네 부모님이 알게 되면 저를 가만히 둘 것 같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어요.”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네 안전은 선생님이 보장해 줄 수 있어.”

“제가 무슨 근거로 그 말을 믿으면 되죠?”

“소현이 조부모님이랑 고모님이 지켜 주시기로 약속했거든.”

나는 아직 동의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

“그럴 거면 차라리 조부모님 쪽에서 데려가서 책임지는 게 좋지 않아요?”

선생님이 말한 것들을 토대로 종합해서 생각해 보면 백소현의 부모는 비정상적인 인간들이지만 조부모랑 고모는 멀쩡한 사람들인 것 같은데.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소현이 친부모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까. 법이 그래.”

자식을 이딴 식으로 키울 거면 차라리 친척 집에 맡기는 게 낫지 않나?

“그래서, 아연이 네가 소현이 대화 상대가 되어 줄 생각은 아직도 없는 거야?”

“일단 내일까지는 생각해 볼게요.”

내일도 내 생각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을 거라고 확신하지만.

***

그 나이가 될 때까지 결혼을 할 수 없었던 이유가 너무나도 명확한 노처녀 꼰대 수학 선생을 열받게 하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4교시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나는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내 행동이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있는 성실한 학생들한테 방해가 된다면 내가 불리한 상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어폰 정도는 사용하기로 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같은 반 애새끼들 전부 마음에 안 들기 때문에 오히려 의도적으로 소음을 내서 공부를 방해해 주고 싶지만, 그 정도로는 이 망할 학교에서 정학이나 퇴학을 받아낼 수 없다. 옆 반 문제아 새끼들은 정학 처분 잘만 받아내던데.

사회봉사 명령? 뭐 그런 건 나도 몇 번 받아 봤지만, 교무실에 불려 가서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할 생각 전혀 없으니까 정학으로 바꿔 주세요. 퇴학이면 더 좋아요.’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선생님들은 한숨을 쉬면서 나한테 일단 교실로 돌아가라고 한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건 전부 엄마 탓이다. 자퇴 확인서 써 달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데도 계속 내 말을 무시하고 나를 학교에 보내려고 하니까. 그런 주제에 학교에서 내 태도가 불량하다는 연락을 받으면 나한테 화를 낸다.

그래서 나는 그럴 때마다 선생들한테서 그런 연락을 받는 게 싫으면 자퇴 확인서를 써 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엄마가 억지로 나를 학교에 보내고 있는 이상 나는 계속 이렇게 행동할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한테서 그 말이 나오면 엄마는 그대로 입을 닫아 버린다.

항상 ‘너도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거다.’라는 말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 제대로 된 설명을 거부하고, ‘대답할 가치가 없으니까 무시하고 있을 뿐이다.’라면서 내 주장에 대한 반론을 회피하는 엄마를 보면 내가 이딴 인간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사실에 토할 것같이 기분이 나빠진다.

반론할 수 있다면 해보라고, 지금 당장 반론하지 않는다면 엄마는 내 말에 반론할 수 없는 걸로 간주하겠다고 해도 땅이 꺼져라 한숨만 내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차라리 수백만 년 전에 멸종된 원시인들이 우리 엄마보다 훨씬 더 머리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아연.”

“…….”

“이아연!”

“네. 왜요?”

“왜요? 너 진짜 몰라서 물어?”

“제가 알아야 하는 게 있어요?”

“…너 자꾸 이렇게 행동할 거면 교실 밖으로 나가.”

“네, 안녕히 계세요.”

학교 밖도 교실 밖에 해당되기 때문에, 나는 곧바로 가방을 챙겨서 교실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붙잡지도 않았을 것 같지만, 붙잡을 틈도 없이 빠르게.

***

“그래, 아연아. 왜 가방을 들고 학교 밖으로 나가려고 했던 거니?”

“수학 선생님이 교실 밖으로 나가도 된다고 했으니까요.”

“그렇구나. 그런데 왜 교실 밖이 아니라 학교 밖으로 나가려고 했어?”

“학교 밖도 교실 밖이잖아요.”

“그렇지. 그렇기는 한데….”

“그러면 문제없는 거 아니에요? 교실 밖으로만 나가고 학교 밖으로는 나가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를 떠나고 있던 도중, 우연히 계단 근처를 지나가던 담임 선생님과 마주치게 된 나는 어째서인지 교무실로 끌려오게 되었다.

“그건 말 안 해도 당연한 거잖아.”

“저한테는 전혀 당연하지 않은데요?”

“…조금 있으면 쉬는 시간이니까 교실로 돌아가자.”

“싫어요.”

“그래. 그러면 조금만 더 교무실에 있다가 집에 가는 걸로 하자.”

“그것도 싫어요. 지금 바로 갈래요.”

“어제 선생님이랑 하던 이야기 있잖아. 기억나지?”

아, 그거. 어제 집에 가서 애니메이션 보느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집에 가서 열다섯 번 정도 다시 생각해 봤는데 역시 안 하고 싶어요.”

“아연이가 가지고 싶어 할 만한 물건을 선생님이 하나 찾아냈거든.”

“뭔데요?”

조금 흥미가 생겼다. 대체 어떤 대단한 물건이기에 저렇게까지 자신 있게 말을 꺼낼 수 있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