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네놈이 도둑고양이처럼 서둘러서 내 손녀와 혼인신고를 해 내 뒤통수를 때린 것 말고 또 내게 확인받을 것이 있더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할아버님의 말 한 마디로 6년을 두 사람이 잘못된 생각을 품고 살았으니 하루라도 빨리 매듭을 지어야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절차도 없이 혼인신고부터 하는 것이 제대로 된 매듭이란 게야? 정신 나간 놈들…….”

전 영감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전 영감의 노기 띤 얼굴과는 달리 태수는 표정 없는 얼굴로 여유롭게 말했다.

“제대로 된 절차를 밟는 동안 할아버님께서 또 무슨 일을 계획하실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해하십시오.”

“버릇없는 놈…….”

“망나니라 당연히 버릇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태수의 느릿한 어조 속에 숨겨진 조롱을 감지한 전 영감이 오른손에 힘을 주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무슨 장난을 치는 게야?”

태수가 시선을 전 영감의 두 눈에 주며 조용히 또박또박 말했다.

“장난이라니요? 6년 전, 할아버님의 손녀가 제 자식을 낳고 입양시킬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고 계시는지 묻고 싶을 뿐입니다.”

“!”

전 영감과 태수가 음모를 꾸며 지훈을 그녀의 품에서 빼앗아 갔다고 한 달 전 혜린이 분명히 말했다. 손녀가 아이를 원치 않는다고 했던 전 영감의 말과는 달리 혜린은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죽을 것처럼 두렵고 무서웠지만 아이를 기다리는 열 달 동안 설렘도 함께였다고 말했었다. 단지 아빠 없이 자랄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을 뿐 그녀는 누구보다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겠다 생각했었다고 했다. 끝내 그를 아빠로 인정할 수 없었다는 말을 그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혜린이었지만 태수는 그 순간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전 영감은 그때 거짓을 말한 것이었다. 교묘하게 혜린이 아이를 입양시키려 한다는 말로 태수를 분노하게 했다. 제대로 알아야 했다. 한 사람의 말 한마디가 사람들을 어떤 오해 속에 가둬 두고 있었는지 알아야 했다.

많은 세월 혜린을 향해 분노하고 증오했다. 그녀를 향한 자신의 억눌린 마음이 그런 식으로 탈출구를 찾았던 것이다.

태수는 전 영감의 얼굴에 준 시선을 거두지 않고 말을 이었다. 눈빛이 이글거렸다.

“어떻게 아이가 죽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까? 살아 있는 아이를?”

태수가 느릿느릿 말했다. 조용한 말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시간이 흐를수록 힘이 주어졌다.

전 영감의 얼굴이 전에 없이 붉게 물들었다. 화를 품은 목소리에는 역정이 묻어났다.

“그때 입양시켜 버렸어야 했어.”

전 영감의 냉정한 말에 태수의 눈이 순식간에 차갑게 변했다. 지금까지 고요해 보이던 그의 시선은 전 영감의 말 한마디로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태수의 서릿발 같은 시선에도 전 영감은 화를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혜린이 그것이 이렇게 날 배신할 줄 알았다면 그때 네놈을 찾지 않고 화근인 그 애를 입양시켜 버릴 걸 그랬다. 네놈이 그 아이의 존재에 대해 알리지만 않았어도 혜린이는 지금쯤 새 삶을 살고 있었을 게야!”

“그러니까 모든 것이 할아버님의 거짓이었다는 말씀이시군요?”

태수가 입술의 움직임 없이 차갑게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다면 네놈은 지금도 아비 자격도 없이 개망나니처럼 살았을 게야. 어디서 지금 그따위 말을 하고 있는 것이야?”

물론 지훈이 없었다면 지금도 아버지와 생모에게 분노하며 정신없는 세월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처럼 고개 숙이고 들어가 자신의 어린 아들을 돌봐 달라고 무릎 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토록 이 악물며 자신을 채찍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미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 영감의 노기 어린 말에도 태수는 자신의 생각을 담담히 말했다. 쏘아보는 시선만이 태수가 지금 얼마나 전 영감에게 분노하고 있는지 보여 줄 뿐이었다.

“그러니까…… 제게는 혜린이가 제 자식을 입양시키려 한다고 말씀하시고, 혜린이에게는 제 자신이 죽었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군요?”

“네, 이노옴!”

전 영감이 급기야 고함을 질렀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손녀의 가슴에 상처를 주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게 도대체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