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드라마틱한 만남

여느 날처럼 수연은 아침에 지하철을 타고 어딘가로 이동 중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돌아설 틈도 없는 만원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수연 앞에 빈자리가 나서 수연은 자리에 앉았고 도원은 수연과 불과 몇 발짝 떨어진 자리에 서 있었다. 전철 안에서 도원은 수연을 자꾸만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수연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조심하면서. 수연은 사람들이 그녀 앞에 마주하고 서 있어서 뻘쭘해 눈감고 잠자는 척 하는데도 예민한 촉으로 누군가 자꾸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어느 순간 갑자기 눈을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보았다. 하지만 그녀를 보는 별다른 사람은 없는 듯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수연이 전철에서 내리자 수연을 놓칠세라 수연의 뒤를 쫓아 미친 듯 달리는 도원이었다. 출근시간이라 사람이 꽤 많은 지하철 플랫폼에 서서 수연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친구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내내 웃으면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도원은 수연을 쫓아오다가 전철 플랫폼에 이르렀을 때 더욱 미친 듯이 수연을 향해 달려왔다. 다다다다다다.

그리고 두 사람은 부닥치고 말았다. 부닥침과 동시에 수연의 손에 들려있던 휴대폰이 그대로 수연의 손을 벗어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수연은 괴성을 지르면서 바로 휴대폰을 주워 보았는데 액정화면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지지 직- 금이 가운데에서 시작해 세 갈래, 네 갈래로 짜자 작- 가 있었다. 수연은 그걸 보고 몹시 경악하고 말았다. 모든 물건을 얌전하게 쓰는 수연의 일생일대에 다른 물건들이 쓰다 고장 난 경우는 봤어도 휴대폰이 그렇게 망가진 경험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수연은 처음으로 값이 좀 나가는 스마트 폰을 바로 엊그제 구입했는데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수연은 도원을 곧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도원은 무척 잘생긴 훈남이었다. 눈은 쌍꺼풀 없이 좌우로 길게 찢어진, 소처럼 큰 눈과 보석들을 마구 박아놓은 듯 반짝이는, 칠흑같이 검고 큰 눈동자에, 눈초리는 쳐지지도 너무 올라가지도 않게 적당했고, 코는 오뚝하고 콧대가 길었다. 입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간 정도에 입술 역시 너무 얇지도 두텁지도 섹시하지도 귀엽지도, 예쁘지도 못나지도 않은 평범한 모양을 한, 전체적으로 이목구비가 조화가 잘 되어 선해 보이는 인상에 아기처럼 투명하고 하얀 피부를 한, 누가 봐도 눈에 띄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하늘나라에서 온 여자가 선녀라면, 하늘나라에서 온 선남은 이렇게 생겼을까 싶게 존재만으로도 묘한 매력이 흘러나오는 것이 마치 이 세상사람 같지 않았다. 다른 세상사람 같았다.

키 180가량에 호리호리한 몸매의 남자는 위아래로 말끔한 진한 그레이색 정장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온 몸을 온통 명품으로 휘감고 있었다. 팔목엔 아르마니 시계에 가방은 루이비똥, 구두는 돌체앤가바나, 정장은 입생로랑 꺼였다.

수연은 잘 생긴 사람을 좋아했다. 하지만 수연은 잘생긴 남자라고 무조건 꺼뻑 죽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잘생기고 부자라고, 잘 나간다고 오만방자한 스타일들에겐 자신도 더욱 자존심을 앞세워 절대 지지 않으려고 맞서는 스타일이었다. 그건 자신보다 잘난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이라기보다는 그냥 그들에게 쩔쩔 매거나 지는 것이 싫었다.

“그렇게 소중한 폰이면 절대 안 놓치게 꼭 붙잡고 있었어야죠. 살짝 부딪쳤다고 그걸 떨어뜨리면 어떡합니까?”

수연이 곧 울 듯한 얼굴을 하자 도원이 말했다.

“뭐요? 살짝? 이게 어떻게 살짝이야아!!”

“살짝이지 그럼! 어디 다치기라도 했어요?! 아니잖아요!”

“….”

살짝이란 도원의 말에 수연은 얼이 나가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도원을 보았다.

“혹시 일부러 그런 거 아닙니까? 돈 뜯어내려고? 지구인… 아니, 요즘에 보험사기네 뭐네 그런 이상한 사기 치는 사람들이 엄청 많다는데! 진짜 새 폰인지, 중고 폰인지 알게 뭡니까?! 이미 고장 난 폰을 일부러 떨어뜨려서 돈 뜯어내는 걸지도 모르잖아요?”

“하… 속고만 살았나? 이봐요… 제 폰을 봐보세요… 폰에 대해 잘 모르시나본데 이거 엊그제 출시된, 그것도 요즘 대세 아이돌 그룹 워너비가 광고하는 바로 그 폰이라구요. 이게! 그것도 한정판! 당장 확인하러 가볼까요?!”

“….”

이번엔 도원이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오래된 폰도 아니고 이런 귀하고 비싼 새 폰을 제가 미쳤다고 일부러 떨어뜨리겠어요? 무슨 이득이 있다고? 말이 되는 소릴 하셔야죠! 그리고 가만히 서 있는데 그쪽이 달려들어서 부딪쳤잖아요오!”

“그게 왜 제 잘못입니까? 통화에 깊이 몰입하느라 주위를 잘 안 살핀 그쪽 잘못이죠!”

‘온 몸에 명품 옷에 명품가방, 구두… 돈도 많아 보이는데 조금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안하무인 개자식…!’

수연은 도원의 위아래를 다시 한 번 훑어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옷 입은 거 보니 혹시 제비족? 돈 많은 사모님들 후리고 다니시나? 제대로 된 부자가 왜 지하철을 타고 다녀? 비싼 셔츠 구김가게….”

수연이 일부러 속을 박박 긁는 투로 말했다.

“인격모독하지 마시죠. 저 제비족 아니구요. 평창동 살고요. 억대연봉 받는 사업가랍니다. 십부제 지키느라 오늘 차 놓고 왔을 뿐인데? 흠흠.”

“오오, 그러세요? 아니, 그렇게 돈 많으신 분이 왜 이깟 휴대폰 수리비 안 줄라고 바락바락 하실까아아?”

하며 수연이 또 몹시 비꼬듯 말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난 근거 없는 지출은 십 원 한 장도 막 하지 않는 스타일이라….당신 폰이 상해를 입은 건 절대 내 잘못이 아니란 말이죠.”

수연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안 되겠다고 경찰 부르자 했고 얼마 후, 두 사람은 경찰서에 있었다. 두 사람은 한 경찰관 앞에 나란히 앉아서 목청껏 자기주장을 해댔다.

“그쪽이 엄청 세게 달려와서 부딪쳤잖아요!”

“엄청 세게 아니구요. 진짜 살짝 부딪힌 거라니깐요? 부딪힌 것도 아니죠. 그냥 살짝 스쳐지나갔을 뿐인데 갑자기 폰을 떨어뜨리는 겁니다. 이 여자가! 어찌나 황당하던지….”

“야!!”

수연은 그 말에 자기도 모르게 경찰서 안이 떠나가라 소릴 꽥 지르고 말았다.

“이거 완전 사기꾼 아냐?! 아저씨! 이 새끼 말 절대 믿으심 안 돼요! 어디서 개수작을 부려?!”

수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도원의 멱살을 막 잡으려하고 도원도지지 않으려 양 팔을 들어 올렸을 때 경찰관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아아아! 두 분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난리에요?! 진정해요. 둘 다!”

경찰이 소릴 지르자 두 사람은 자리에 앉으며 잠잠해졌다.

“그니까… 세게든 살짝이든 그쪽 분이 와서 부딪힌 건 맞으시죠?”

경찰이 도원에게 물었다.

“네? 네.”

“아가씨도 통화중이어서 주의를 딴 데 팔고 있었던 잘못이 있고….”

“아저씨!”

수연이 그건 아니라는 듯 경찰에게 빽 소릴 질렀다. 그러나 경찰은 아랑곳없이 말을 이어갔다.

“수리비 반으로 딱 잘라서 두 분이 사이좋게 해결하세요. 됐죠? 더 이상 말 않겠습니다아! 두 분 서로 연락처 교환하시고, 아가씨는 수리비 청구서 나오면 이 분께 청구하세요오. 그럼 전 이만!”

하며 담당 경찰은 급한 일이 있는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모자를 쓰고 후다닥 밖으로 나가버렸다.

“당신, 운 좋은 줄 알아! 하… 재수가 없을 라니까 별….제 친구가 수리해봐서 아는데 이거 삼십 오만원에서 사십 만 원 정도 나와요. 그러니까 음… 아, 몰라. 인심 썼다. 15만원만 받을게요.”

“인심은 무슨….”

하고 콧방귀를 뀌며 도원은 먼 산만 바라보았다.

“뭐해요? 빨리 돈 달라구요오! 돈 많다며?!”

수연이 소릴 질러도 도원은 어디서 개가 짖냐는 듯 했다.

“사람 성가시게 하지 말고 그냥 이 자리에서 끝내자구요오! 무슨 부자가 그렇게 쪼잔해요?”

“쪼잔한 게 아니라 알뜰한 겁니다. 경. 제. 적!”

‘하, 말도 더럽게 많아. 말 많은 남자 딱 질색인데….’

“돈이 많지만 전 매달 일괄적인 지출을 하죠. 아무 때나 아무 액수나 막 지르진 않는다고 말씀 드렸을 텐데요? 더군다나 그리 큰 액수를….월급날 되면 일괄적으로 바로 쏴 드리도록 하죠.”

“월급날이 언젠데요.”

“25일요.”

“뭐라구요?!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수연이 핸드폰 바탕화면에 작게 있는 달력을 보며 말했다.

“엊그제였네… 돈 있겠네! 빨리 줘욧!”

“이번 달엔 급히 쓸데가 있어서 이미 다 쓰고 없습니다.”

‘무슨 월급을 이틀 만에 다 써?! 일용직 알바야 뭐야?’

“하… 알았어. 내가 참는다 진짜. 당신, 그 사이에 얼로 날르기만 해봐아?! 내가 지구를 다 돌아서라도 당신 찾아낼 거니까 도망갈 생각 말고!”

“미안한데 할부로 나눠서 내면 안 되겠어요? 무이자로….”

무이자로 라고 할 때 도원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내가 카드산줄 아나… 뭐요?! 할부? 무이자?!”

수연이 어이가 없다는 듯 얼굴을 몹시 구기며 째려보았다. 그러자 도원은 비굴하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돈 들어갈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라서….”

수연은 한숨을 푹 쉬더니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삼 개월! 더 이상은 안 돼요. 내가 뭐 한가한 사람도 아니고…!”

“네네. 고마워요!”

“계좌로 부쳐요. 월급날 꼭 부쳐요?! 하루라도 늦기만 해봐?!”

수연이 도원을 째려보며 말했다. 둘은 서로의 명함을 교환하고 서 밖으로 나왔다.

도원은 재수 없게 픽픽 웃으며 몸을 돌려 가더니 한 손을 들어 여유 있게 흔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자 수연은 우다다다다 열나게 뛰어가서 배구할 때 강 스파이크! 하듯 도원의 뒤통수를 시멘트 바닥에 매다 꽂아주고 싶었다.

‘뭐야… 잘 산다며… 할부, 무이자… 하긴, 잘 사는데 왜 지하철을 타고 다니겠어? 보아하니 겉멋만 잔뜩 든 양아치구만? 에잇, 퉤퉤.’

하며 수연은 도원이 사라진 쪽을 향해 입으로 침 뱉는 시늉을 했다.

#2화 외계스러운 남자

수연은 요즘 들어 부쩍 술에 취해 밤늦게 들어오시는 아버지와 공부는 안하고 매일 게임만 하는 철없는 남동생 현석 때문에 힘들었다. 게다가 3년 사귄 남자친구와는 애정이 식다 못해 말라 비틀어져가고 있었다.

현웅과 수연은 33세로 동갑이었다. 수연은 오랜만에 남자친구 현웅과 데이트를 하였다. 그런데 일이 바빠서 요즘 통 외모에 신경을 쓰지 못해 수연은 부스스한 모습이었다. 그러자 현웅은 수연을 보며 말했다. 몹시 띠꺼운 얼굴로.

“너 완전 아줌마 다 됐구나? 튜닝 좀 해야 되는 거 아니냐?”

정말 거침없이 내뱉는 것이었다. 그것도 농담 같이, 웃으면서가 아니라 심각한 얼굴로 진담같이. 수연은 그 말에 뭐라 대꾸하지 않았지만 맘속으로 큰 상처를 받고 말았다.

수연은 최근 그렇게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썩 좋지 않았다.

수연은 그동안 영화사에서 수입도 그저 그런 신인작가로 지내오다가 최근 자신이 단독으로 쓴 시나리오가 곧 있을 한국영화제 시나리오 상 후보에 올랐다. 한국영화제는 국내에서 제일 저명한 3대 영화제 중 하나였다. 그래서 공무원인 현웅 앞에서 낮았던 자존감이 조금씩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현웅에게는 수상후보에 올랐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시나리오 상을 수상하면 그 사실을 현웅에게 당당히 알려 깜짝 놀라게 해줄 심산이었다.

그런 와중에 수연은 친한 친구인 진영으로부터 이상한 얘길 듣고 말았다. 어느 날 남산공원에 놀러갔는데 현웅이 다른 여자랑 데이트를 하고 있는 걸 목격했다는 것이었다.

“그 여자… 어떻게 생겼는데?”

“어려 보이던데… 이십대 중후반? 음… 가슴이 크더라? 예뻐. 눈도 크고 입도 크고 키도 크고 머리는 작고.”

“나랑 다 반대네….”

“어머, 그러네?! 하하하하하! … 하….”

진영은 미친 듯이 호탕하게 웃다가 수연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더니 갑자기 웃음소리가 급 사그라졌다. 그리고 급 수습에 들어갔다.

“야, 아니야아… 너도 예, 예뻐… 미운 얼굴은 아니지이이….”

하며 진영은 말을 얼버무렸다.

“야, 됐거드은?!”

어쭙잖은 위로가 그녀를 더 기분 나쁘게 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고 잠시 후 수연이 또 입을 열었다.

“진짜 그렇게 보였어?”

“어어, 그럼. 내가 그런 건 또 기가 막히게 알잖냐. 대학 때도 우리 과에서 누구랑, 누구랑 뭔가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얼마 뒤에 떡하니 둘이 사귀고 있고… 내가 한두 번 맞춘 줄 아냐?”

“둘이 손잡고… 공원에서? 사진도 찍고?”

“어어, 그렇다니까아! 우리 이제 막 시작했어요… 딱 그런 느낌 있잖아 왜. 약간 조심스러우면서 풋풋하고 애틋하고… 간질간질하고… 으으….”

하며 자기 양 팔을 팔짱끼더니 손으로 자기 양 팔등을 간질이면서 몸을 부르르 떨며 말하는 것이었다.

“좋냐?!”

“아, 아니? 미, 미안. 흐흐. 내가 너무 몰입했네? 암튼, 분명해. 틀리면 내가… 네 엄마다!”

“야… 어딜? 씁-.”

수연이 한 손바닥을 들어 진영을 치는 동작을 했다. 그러자 진영이 또 자지러지게 웃었다.

“아하하하하!”

수연은 장난스럽게 하다가 얼굴이 싹 변하며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어느덧 날짜가 지나 도원이 말한 월급날이 되었다. 수연은 달력에 표시해 놓고 그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연은 그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도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월급날이죠? 언제 보낼 거에요?]

보내놓고 기다리는데 답이 없었다. 몇 분이 지나고 수연이 슬슬 초조해 질 무렵 도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만나서 직접 드릴게요… 그래야 제가 안심이 돼서요….”

“네에?! 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