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 눈에 반했어요

바람이 분다.

향긋한 꽃향기를 타고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있었다.

“아빠가 만든 꽃밭에서 오순이랑 우리 할머니랑 예쁜 도순이랑 고구마 먹고…….”

툇마루에 걸터앉아 25살 맹오순은 혼자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짧은 단발머리에 헐렁한 티셔츠와 낡은 주름치마를 입고서 그녀는 무엇이 그리도 흥이 나는지 연신 같은 노래만 반복하고 있었다.

“오순아, 배고파.”

학교에서 돌아온 초등학교 3학년 도순이가 툇마루에 책가방을 집어던지고는 수돗가에서 손을 씻었다.

“고구마 줄까?”

동생이 학교에서 돌아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던 오순이가 쪼르르 부엌으로 달려가 방금 갓 쪄낸 고구마 한 소쿠리를 가지고 나왔다.

“고구마 말고 과자 없어?”

오순이가 내민 고구마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도순이가 물었다.

“없어. 할머니가 과자 같은 거 먹으면 이빨이 몽땅 썩어버린다고 했어.”

“그 말을 믿어?”

“할머니가 말씀하신 거잖아?”

“바보!”

지능이 어린아이 수준 밖에 되지 않는 언니에게 도순은 걸핏하면 바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남들이 오순에게 바보라고 말하면 도순은 가만두지 않았다.

그녀를 바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팔순의 할머니와 자신뿐이었다.

도순의 바보 소리에 오순은 그저 실없이 웃기만 했다.

“바보!”

“괜찮아.”

“바보 소리가 뭐가 괜찮아?”

“우리 도순이가 항상 하는 말이니까.”

“진짜 바보!”

“응.”

오순이가 한 술 더 뜨며 고개까지 끄덕거렸다.

“돈 없어? 진짜 과자 사먹고 싶단 말이야.”

“없어.”

오순의 대답에 도순은 냉큼 방으로 들어갔다.

“뭐하려고?”

돼지저금통을 손에 쥐고 있는 도순의 모습에 오순이 화들짝 놀라며 동생에게 달려들었다.

“딱 천 원만 가져갈게.”

“안 돼! 나중에 할머니 생일선물 살 거란 말이야.”

“할머니가 생일선물 같은 건 필요 없다고 그랬잖아?”

“그래도 안 돼!”

기어이 도순의 손에서 돼지저금통을 다시 빼앗은 오순은 저금통을 두 손 안에 단단히 감추었다.

행여 또 도순이 빼앗아 갈까 싶어 그녀는 잔뜩 경계하는 눈초리로 동생을 노려보았다.

“배고파서 그런다니까.”

“고구마 먹어.”

“싫어.”

“그럼, 밥 먹어.”

“학교에서 급식하고 왔어.”

“근데 왜 배고파?”

“원래 밥 먹는 배랑 밥 배는 따로 있는 거니까.”

“정말?”

도순의 대꾸에 오순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넌 배가 따로 있어? 난 하나 밖에 없는데……?”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신의 아랫배를 슬그머니 내려다보았다.

“바보. 그런 배가 아니잖아?”

“그럼?”

“아, 몰라! 몰라!”

도순은 골이 난 얼굴로 방 안을 나갔다.

하는 수 없이 툇마루에 걸터앉은 도순은 고구마를 먹었다.

“맛있지?”

동생 앞에 동치미 국물을 건네주며 오순이 다정하게 물었다.

“고구마가 뭐가 맛있어? 과자가 훨씬 더 맛있지.”

“난 고구마가 더 맛있던데?”

“바보니까 그렇지.”

“그런가?”

또 배시시 웃고 있는 오순에게 도순이 “흥!”하며 가벼운 콧방귀를 뀌었다.

“오늘 학교에서 뭐 배웠어?”

“말해주면 알아?”

오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학, 국어, 영어, 체육, 음악 등등…….”

“그렇게나 많이?”

오순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서 지금 무지 피곤해.”

“내가 어깨 주물러 줄까?”

“마음대로.”

도순이 언니에게 냉큼 어깨를 내밀었다.

비록 지능은 낮지만 손끝 하나는 누구보다 야무진 오순은 동생의 양어깨를 신나게 안마해 주었다.

“어때? 시원하지?”

“그럭저럭.”

도순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이자 더욱 신이 난 오순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동생의 어깨를 주물렀다.

“도순아! 또 니 언니 부려먹는 거여?”

밭에서 돌아온 할머니가 동생의 어깨를 안마해 주고 있는 오순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도순이가 피곤하다고 해서.”

“학교에서 편하게 앉아 공부만 하는 것이 뭐가 피곤해? 하루 종일 밭일 혀는 내허고 집안 일 도맡아 하는 니가 더 피곤하지.”

할머니의 말에 도순이 입을 삐죽거렸다.

“불쌍한 니 언니 부려먹을 생각만 하지 말고 도순이 너도 집안 일 좀 도와.”

“언니가 뭐가 불쌍해? 할머니랑 내가 있는데?”

“나이가 차도록 결혼도 못하고 매일 저렇게 집구석에만 처박혀있으니까 그러지.”

“이제 겨우 25살인데 할머니는 뭘 그리 벌써부터 걱정해? 때가 되면 알아서 갈 텐데…….”

한 마디도 지지 않고 꼬박꼬박 대꾸하는 도순을 오순이 옆에서 살짝 꼬집었다.

“그만해. 할머니 뿔나셨잖아?”

“괜찮아. 할머니 뿔나시는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슬금슬금 눈치보고 있는 오순과 달리 도순은 할머니를 전혀 겁내지 않았다.

“어디서 저런 것이 우리 집에 태어났는지… 쯧쯧…….”

“할머니 아들 때문에 태어난 거잖아? 아닌가? 할머니 며느리가 오순이랑 날 낳았으니까 할머니 며느리 때문에 태어난 건가?”

“뭣이여?”

할머니가 두 눈을 무섭게 부라렸다.

“이젠 밭일 끝난 거야?”

오순이 생글거리며 할머니와 도순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비가 오려는지 당최 허리가 아파서 오늘은 일찌감치 들어왔다.”

“또 신경통이야?”

오순이 걱정스레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하루 이틀 아픈 것도 아닌데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어.”

“집에 파스 없어?”

할머니가 아프다는 소리에 은근 걱정된 도순이가 안방으로 들어갔다.

“지난밤에 마지막 남은 거 전부 써버리고 없으니까 괜히 방 안만 어지럽히지 말고 어여 나와.”

“내가 지금 약국 가서 사올게.”

지갑을 챙긴 오순이가 부리나케 대문을 나섰다.

“나도 같이 가! 너 혼자 다니면 위험하단 말이야!”

그녀 뒤를 따라 도순이가 달려갔다.

약국을 가려면 마을버스를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오순과 도순은 버스정류장에 나란히 서 있었다.

“진짜 불편해. 파스 하나 사려고 버스까지 타야 하니까.”

“마을버스 타면 금방이잖아?”

“누가 그걸 몰라? 우리 집은 너무 촌구석에 있단 얘기야.”

“난 우리 집이 제일 좋은데?”

오순의 대답에 도순이 또 입을 삐죽거렸다.

마을버스가 도착하자 오순이 먼저 차 안에 올라탔다.

“안녕하세요?”

“도순이랑 시내 나가는 모양이구나!”

꾸벅 인사하는 오순에게 기사 아저씨가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다.

“할머니 파스 사려고 약국 가요.”

오순은 버스 안에서도 어르신들에게 일일이 인사했다.

“오순이 오랜만에 얼굴 보네.”

그녀가 도순과 나란히 빈자리에 앉자 뒤에 있던 중년의 아주머니가 반가이 아는 체했다.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마치 동네 이장처럼 버스 안 사람들과 다정히 인사를 나누고 있는 그녀 모습에 도순은 샐쭉한 얼굴로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마을버스에서 내린 두 사람은 단골 약국으로 들어갔다.

“어서 와.”

약사가 자매에게 비타민 드링크 한 병씩을 건네주었다.

30대 중반의 약사 아주머니는 할머니와 외롭게 사는 오순과 도순의 사정을 딱하게 여기며 그녀들에게 항상 친절히 대해 주었다.

그 자리에서 드링크를 마시고 있는 도순에 비해 오순은 그대로 손에 쥐고 있었다.

“오순아, 왜 안 마셔?”

“할머니 드리려고요.”

약사의 물음에 오순이 해맑게 웃었다.

“할머니 건 따로 챙겨줄게.”

약사가 드링크 한 병을 또 오순의 손에 쥐여 주었다.

“우와! 그럼, 오늘하고 내일 할머니가 두 병 마시면 되겠네?”

양손에 드링크를 쥐고서 오순이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오순이는 정말 효녀라니까.”

약사의 칭찬에 오순이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약국을 나오자 마침 그녀들 앞으로 고급 차량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어? 저 차 진짜 멋지다!”

“진짜 멋지다!”

도순이 내뱉은 뒷말을 따라하며 오순 역시 동생과 마찬가지로 차량 뒤꽁무니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나도 이다음에 돈 많이 벌면 저렇게 멋진 차 몰고 다닐 거야.”

“진짜?”

“당연하지.”

오순의 놀란 물음에 도순이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그럼, 나도 탈 수 있겠네?”

“왜?”

“안 태워 줄 거야?”

“생각해 보고.”

“나도 태워주라.”

당장 도순이 차를 구입한 것도 아닌데 오순은 어린 동생 팔에 매달려 애원하고 있었다.

“거참, 사람 귀찮게 시리… 알았어. 나중에 태워줄게.”

“우와! 신난다!”

손뼉까지 쳐가며 오순은 무척 즐거워했다.

두 사람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자 할머니는 안방에 누워 있었다.

“할머니, 파스 사왔어.”

“낸중에 저녁 먹고 붙일게.”

할머니는 많이 피곤한 모양인지 금세 잠이 들었다.

안방에서 나온 오순은 곧장 부엌으로 들어갔다.

“뭐하려고?”

“저녁 해야지.”

“난 피자 먹고 싶은데…….”

“된장찌개 해줄게.”

“피자 먹고 싶다고.”

“된장찌개 해줄게.”

도순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오순은 쌀을 씻고 뚝배기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았다.

“그럼, 돼지고기 넣은 김치찌개 해줘.”

“돼지고기 없는데?”

오순의 대꾸에 도순은 그대로 부엌을 나가버렸다.

오순이 분주하게 저녁준비를 하고 있는 사이 무료해진 도순은 동네 주변을 무작정 거닐었다. 자신도 TV에 나오는 또래 아이들처럼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서 피자와 치킨도 시켜 먹고, 크리스마스엔 갖고 싶은 게임기도 선물 받아보고 싶었다.

흔한 휴대폰 하나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학교에서 오직 자신뿐이었다.

작은 텃밭을 일구며 근근이 먹고 사는 어려운 형편에 언감생심 휴대폰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라는 걸 빤히 잘 알면서도 도순은 가끔 한 번씩 이렇게 심통을 부리곤 했다.

면사무소에서 지원해 주는 생활보조금이 있긴 했지만 그것으로 생활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도순은 빨리 커서 자신의 힘으로 직접 돈을 벌고 싶었다.

빨리 많은 돈을 벌어서 좋은 집도 사고, 고급 차도 구입해서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즐기고 싶었다.

**

도순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시내에서 보았던 고급 차량이 비어 있는 옆집 대문 앞에 떡하니 주차되어 있었다.

옆집은 두 달 전 도순과 같은 학급 친구였던 은실이 가족이 살던 집이었다.

그들이 시내로 이사 간 후 줄곧 비어 있었던 곳이다.

“어? 저렇게 멋진 차가 왜 여기 있는 거지?”

호기심에 도순은 대문이 활짝 열려 있는 마당 안을 힐끔거렸다.

“도순이 왔구나!”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남자 옆에 서 있던 이장이 대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는 도순을 발견했다.

“누가 이사 와요?”

도순은 이장 옆에 서 있는 키가 훤칠한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응. 며칠 내로 이분이 이사 들어오실 거야.”

“대문 앞에 있는 차 아저씨 거예요?”

도순의 물음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렇게 멋진 차를 갖고 있으면서 왜 여기로 이사 와요? 넓은 아파트에서 살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뭐라고?”

도순의 당돌한 질문에 남자가 눈에 걸치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고 아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차는 진짜 멋진데 사는 집이 후줄근하면 뭔가 밸런스가 맞지 않잖아요?”

남자의 잘생긴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도순은 정말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너 같은 아이가 상관할 바 아니니까 그만 집으로 돌아가.”

남자는 잠시 벗어두었던 선글라스를 다시 눈가에 걸쳤다.

“해도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뭐하러 선글라스를 써요? 혹시 연예인이에요?”

“도순아,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지. 또 오순이가 찾아다닐라.”

옆에서 보다 못한 이장이 도순에게 얼른 가보라는 손짓을 보였다.

“전에 살던 양반들이 워낙 깔끔해서 따로 손 볼 건 없을 겁니다. 도배와 장판 정도만 새로 하면 될 것 같은데……?”

찬찬히 집 안을 둘러보던 남자가 이장을 돌아보았다.

“도배와 장판은 새로 해주시는 거지요?”

“네? 월세라면 모를까 전세는 좀…….”

이장이 난처한 기색으로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왕 도배와 장판 해주시는 거 좋은 것으로 해주세요.”

“그건 집주인한테 따로 물어봐야 하겠지만 젊은 양반 사정이 하도 딱해서 전세금을 많이 깎아 줬는데 도배랑 장판까지 해달라고 하면 아마 싫어할 겁니다.”

“해주세요. 이번 주말에 이사 오겠습니다.”

남자는 이장의 말에는 아랑곳없이 잔뜩 찡그린 얼굴로 집 안을 둘러본 후 대문 밖을 나섰다.

“일단 집주인한테 물어보긴 하겠습니다.”

이장은 하는 수 없이 남자의 의견을 들어주었다.

남자가 대문 밖을 나왔을 때 도순은 여전히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검은색 차량을 구경하고 있었다.

“도순아, 아직 집에 안 들어간 거야?”

“아저씨, 이 차 무지 비싸지요?”

이장의 걱정 어린 물음엔 대답도 하지 않고 도순이 남자에게 물었다.

“어린 애가 제법 보는 눈이 있네. 야! 함부로 만지지마! 이게 얼마짜린데…….”

광택이 반지르르 흐르는 차량을 도순이 손바닥으로 어루만지자 남자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따! 귀청 떨어지겠네! 제가 이렇게 비싼 차는 가까이서 보는 게 처음이라서 그래요. 조금 구경한다고 차가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이건 너 같은 아이가 함부로 만질 수 있는 게 아니야.”

“저도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이 차보다 훨씬 더 좋은 거 몰고 다닐 거예요.”

운전석에 올라타는 남자를 향해 도순이 혀를 날름 내밀었다.

미끄러지듯 차량이 사라지자 도순은 부러운 눈초리로 잠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