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여인이 번화한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여인은 불빛으로 물든 거리를 돌아보며 여긴 어딜까 생각했다.

자신은 누굴까…. 알 수 없었다.

스쳐 가는 사람들, 밝게 웃는 사람들, 술기운에 흔들리는 모습과 행복한 표정들, 이야기들.

여인은 자신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한 남자가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한쪽에만 귀걸이를 한, 예리한 눈빛으로 먹잇감을 노리는 그 얼굴이 미소를 머금고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헤이, 그쪽이 맘에 드는데. 어때요? 술 한 잔? 아니면 차 한 잔?”

여인은 남자를 바라보더니 무심히 말했다.

“그쪽은 날 좋아하지 않아. 그렇게 느껴져.”

“아, 뭐 이제부터 좋아하면 되죠. 안 그래요?”

“아니야. 당신은 날 좋아하지 않아.”

여인이 가려고 하자 귀걸이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여인이 손을 빼려 하자 꾹 쥐었다. 여인은 그를 돌아봤고 형형한 그 안광에 남자는 움찔하며 손을 놓고 물러났다.

순간 남자의 손이 쿠킹 호일처럼 구겨졌다. 고통에 소리를 지르려 했는데 다시 보니 손을 그대로였다. 분명 은박지처럼 마구 찌그러지고 있었는데.

여인은 돌아서 걸어갔다.

화려한 불빛 속을 힘없이 걸어가는 그 모습을 남자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의 손을 보았다. 격한 아픔이 휘감아 도는 손은 오므리려 해도 되지 않았다.

‘뭐….’

그저 알 수 없는 여인이 별바다 같은 세상 속으로 꿈을 꾸듯 멀어질 뿐이었다.

***

번화가의 중심에서 조금 벗어나자 거리는 안온한 밤빛으로 변화했다.

여인은 여전히 길 잃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귀를 스치는 희미한 비명을 들었다.

돌아보니 건물과 건물 사이의 어두운 통로에 여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무리의 안쪽에 좀 더 작은 여자애 둘이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 게 보였다.

때릴 것처럼 올라간 손이 서서히 내려가며 무어라 윽박지르는 소리도 들렸다. 여인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고, 그때 한 여학생이 고개를 돌리더니 바로 욕설을 날렸다.

“뭘 봐, 씨발아.”

여인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마.”

고등학생들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하나둘 돌아섰다. 그중 하나가 답했다.

“뭘 그러지 마.”

여인은 한숨을 쉬듯 말했다.

“그러지 마. 그러지 마.”

“꺼져.”

다른 여학생들이 한 마디씩 더했다.

“네가 뭔데 그러지 마라야, 응?”

“맞기 싫으면 그냥 가세요. 지랄하지 마시고.”

“멍하게 생겨가지고 웃기고 있네.”

“안 꺼져, 이 씨발아?”

여학생들이 인상을 쓰며 다가오려 하는 그때였다. 갑자기 그녀들의 머리칼이 일제히 하늘로 솟구치며 모조리 뽑히려 했다. 여학생들은 너나없이 두 손으로 머리를 움키며 경악했다.

하지만 모든 건 꿈처럼 사라지고 머리칼은 제 자리로 돌아왔으니 경악스런 기억은 욱신거리는 아픔으로만 남았다.

그 생생한 감정에 여학생들은 겁먹은 눈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움찔움찔 뒤로 물러나다가 동시에 후다닥 도망쳤다.

도망가는 모습들이 건물과 건물 사이의 끝에서 사라졌다.

붙들려 있던 여자애 둘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주춤거렸다. 이내 여인을 향해 다가왔다. 감사하다고 눈물 어린 얼굴로 꾸벅하더니 서둘러 환한 거리로 달아났다.

모두가 사라진 건물의 사잇길에서 부드러이 밤바람이 불어왔다. 그 밤공기에 실리듯 여인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여긴 어딜까.’

알 수 없는 길을 걸어갔다.

즐거워 보이는 연인이 다가왔다. 지나가는 그 모습을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마음속에 불빛이 켜지는 듯했다. 입가로 미소가 번지는데 또 마음은 아련히 쓸쓸해져 갔다.

밤길을 리어카 한 대가 종이박스들을 가득 실은 채 또 다가왔다. 등이 굽은 할아버지가 앞에서 끌고 아내인 듯한 할머니가 뒤에서 밀고 있었다.

리어카 옆으로 흘러내리는 종이박스.

할머니가 그 모습을 봤지만 힘에 부치는 듯 한숨만 쉬었다. 불어오던 바람이 방향을 바꿔 불어갔다. 땅에 떨어진 종이 박스 두 개가 바람에 훌렁 떠올라 도로 수레 위에 얹혀졌다.

할머니는 누가 올려줬나 하고 주위를 돌아봤지만 밤거리엔 저마다의 이야기를 나누며 멀어지는 사람들뿐, 밤하늘에 별들만 반짝거렸다.

***

번화가를 벗어난 한갓진 놀이터에 이르러 여인은 길가의 벤치에 몸을 앉혔다.

‘모르겠다….’

초가을의 밤공기가 선선하니 흘러가고 여인은 별과 달이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때였다. 맵시 난 옷차림에 그림처럼 잘생긴 남자가 걸어와 옆자리에 앉았다.

여인은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는 여인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뭐 하세요?”

여인은 그를 찬찬히 살피듯 하다가 이내 경계심이 풀리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나를 좋아하는군요?”

“당연히 좋아하죠.”

여인은 남자를 한 번 더 곰곰이 보다가 말했다.

“저를 미워하기도 하고요.”

“미워하지는 않아요. 다만 그쪽 때문에 혼이 좀 나곤 하는지라.”

“…….”

“삐짐이라고나 할까.”

밤바람이 둘을 스치어 갔다. 무슨 말일까. 여인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후우….

밤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편안한 얼굴로 오갔다. 어디선가 듣기 좋은 노랫소리가 들리고, 주인을 따라 나온 털복숭이 강아지는 벤치의 남녀를 흥미롭게 쳐다보다 지나갔다.

그때 길 저편에서 덩치 큰 남자들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손가락으로 여인을 가리키는 남자는 아까 손이 쿠킹호일처럼 구겨졌던 그 귀걸이였다.

“저년이에요.”

건장한 남자들이 벤치를 둘러쌌다.

한 눈에도 건달들 같아 보이는 모습.

여인은 옆에 앉아있는 잘생긴 남자에게 물었다.

“근데 왜 난 내가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죠?”

“그야 사탕을 너무 많이 드셔서 그렇죠.”

건달들은 우악스러운 자신들의 등장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남녀에 약간 뚱해졌다.

여인은 잘생긴 남자에게 물끄러미 보았다.

“사탕…이라니?”

“고민이 있거나 마음이 답답할 때 먹으면 행복해지는 사탕이죠. 다만 너무 많이 먹으면 기억이 사라지면서 허무해지곤 해요. 그걸 좀 과하게 드시고 이곳으로 오신 거예요.”

험상궂은 사내가 말했다.

“우리는 쥬라기파다. 여기 전부가 우리 구역인데 듣자 하니 아가씨가 우리 애의 손모가지를 짜부라뜨렸다고? 설마하니 간이 배 밖으로라도 나오셨나?”

덩치들이 안광을 빛냈지만 벤치의 남녀는 무반응이었다.

잘생긴 남자가 말했다.

“그만 가시죠. 어머님께서 걱정이 많으십니다.”

여인은 문득 스치는 기억에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미남에게 물었다.

“나 여기 온 거 말 안 했지?”

“당연히 안 하죠. 우리만의 비밀이니까.”

미남은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하늘에서 새하얀 빛들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인상 사나운 쥬라기파 사내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이것들이 내 말이 말 같지 않나? 응? 죽고 싶어?”

미남은 여인의 손을 잡았다.

“가시죠.”

하늘에서 흘러내리던 빛들이 얼기설기 물결을 쳤다. 그렇게 벤치의 남녀를 감싸는가 싶더니 반짝! 섬광과 함께 사라졌다. 위압하듯 다가서던 건달들은 일순 주춤하며 그 텅 빈 벤치를 내려다보았다.

“어….”

“뭐야….”

잔광이 흐르는 벤치엔 공허한 밤바람만이 지나갔다.

쥬라기파들은 눈을 끔뻑거리며 주위를 돌아봤지만 남녀의 모습은 흔적도 없었다. 그들은 얼빠진 공룡들처럼 입을 벌리며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모습도 곧 우두커니 멍해졌으니 자신들이 왜 이곳에 모여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건 그저 기억나지 않는 꿈처럼 흩어지고 밤하늘엔 별들만 가득 빛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