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누가 버리고 간 것인지 소복이 눈 쌓인 길 위에 땔감이 한가득 실린 지게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런데 지게가 저 혼자서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그것도 모자라 물에 둥둥 떠내려가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귀신이 부린 조화일까? 자세히 보니 땔감 속에 푹 파묻혀 있는 왜소한 체구의 소녀가 보인다. 아니, 작은 아기였다.

“하악, 하악! 내 이름…… 헉, 헉! 내 이름은……민연화. 내 이름은 민연화!”

검붉게 얼어버린 입술에서는 허연 입김만 쉼 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며칠 전 새해 떡국을 두 그릇이나 먹은 후 6살이 된 연화는 집을 향해 다시금 가쁜 숨을 몰아내셨다.

“헉, 헉! 내, 내 이름은 민연화.”

지게 위엔 어린아이가 한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땔감이 실려 있었다. 정수리에서부터 흘러내린 비지땀은 머리카락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작은 고드름이 되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게 끈에 쓸린 어깨는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쓰라렸다. 하지만 동지섣달 추위로 빨갛게 언 손보다는 덜 아팠다. 그래도 연화는 씩씩하게 눈 덮인 산길을 헤치며 내려갔다. 문득 고개를 들자 동네에 있는 주막집 앞이 보였다. 지척에 집이 있다고 생각하자 안도의 기쁨이 소녀를 채웠다. 주막집 앞을 지나쳐 가려는데 연화를 알아본 주막집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쫓아 나왔다.

“아이고, 막순아!”

“헤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랑 아저씨.”

주막집 부부가 동시에 땔감 속에 파묻혀 있는 아이를 안쓰럽게 쳐다봤다.

“아이고 막순아! 눈이 이렇게나 많이 내렸는데…… 아무리 작게 만들었어도 지게는 지게인 것을.”

아이의 몸은 눈 쌓인 산속에서 굴렀는지 흠뻑 젖은 채 여기저기 찢기고 옷 위에까지 핏물이 배어나 있었다.

“이따가 달래하고 끝돌이 오라버니랑 놀아도 돼요?”

아주머니의 딸은 군불을 땐 방에서 솜이불까지 덮고 쿨쿨 자고 있었다. 그런데 제 딸하고 동갑내기인 저 아이는 이리 추운 날에도 지게 가득 땔감을 하러 나왔다.

“그럼, 그럼! 이따가 오면 내가 뜨신 국밥 줄게 꼭 와라, 알았지?”

“예!”

우렁찬 대답과 함께 지게에 발이 달린 것처럼 주르륵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쯧쯧쯧, 사람은 없고 지게만 보이네……. 그 못된 상궁년이 또 새벽 댓바람부터 저 어린 것한테 땔감을 해오라고 내보낸 게지.”

“그때 그지그지 상그지 꼴을 해서 밥 동냥을 왔을 때 잡일이라도 시키면서 델꼬 있을 걸 그랬나?”

주막집 아저씨도 부아가 치민 얼굴로 아내를 보다가 죄책감 어린 눈길로 연화가 지나간 길을 쫓았다.

“작년에 돈 역병 때문에 우리도 끼닛거리를 걱정해야 할 때라……. 그래도 그렇지! 지가 지난날 궁궐에서 살았으면 살았지, 여기가 궁궐이야!”

연화를 대신해 화를 내주던 아주머니는 당장 쫓아가서 부지깽이로 그 상궁의 머리통을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였다.

“그래봤자 손님 밥해주는 내 팔자나 왕이 먹는 밥을 해주는 거나, 뭐가 달라! 그러면서 다닐 때 보면 아주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저만 상전인 줄 안다니까.”

“임자, 참어참어. 거기서도 저리 못돼 처먹게 굴다가 쫓겨난 게 맞다니까.”

주막집 부부는 안타까운 한숨만 흘리면서 저 멀리 싸리문 안으로 사라지는 지게를 바라보았다.

“마마님!”

작은 마당으로 들어선 연화는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등으로 잽싸게 지게를 떠받쳤다. 아직은 6살에 불과한 작은 체구라 땔감이 실린 지게의 무게는 아직 버거웠다. 손에 쥐고 있던 막대기로 지게를 고이려다가 같이 휘청 넘어갈 뻔했다. 다행히 몸에 밴 요령이 있어서 후다닥 지게를 고정했다.

“막순이 왔어요! 마마님!”

연화가 칭찬을 바라는 음성으로 닫혀 있는 방문을 향해 소리쳤다. 방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비스듬히 앉아 있는 조 상궁이 냉랭한 시선으로 연화와 지게를 번갈아 보았다. 한 번 헤헤 웃어준 연화는 지게 위에서 제 덩치보다 족히 서너 배는 더 커 보이는 양의 땔감을 내리기 시작했다. 바닥으로 모두 내린 땔감은 다시 부엌 옆에 장작이 빼곡히 쌓여 있는 곳으로 옮겨 놓았다. 어린 몸으로 해내기엔 무리다 싶었던 땔감이 어느새 사라졌다. 그런데 지게 바닥에 어린 그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 하나가 있었다. 어린아이의 손에 맞춰 제작한 듯한 활과 화살이었다. 그 활 아래엔 눈처럼 새하얀 털이 붉은 피를 묻힌 채 죽어 있는 산토끼 한 마리도 있었다.

“오늘은 토끼 한 마리밖에 얻지 못했어요.”

“수고했다.”

메마른 대꾸였지만 칭찬이란 걸 알기에 연화는 속도 없이 헤헤 웃었다. 방문에서 잠시 사라졌던 조 상궁이 다시 보였다. 조 상궁이 방문 밖으로 손 하나를 내밀었다. 그 손에는 허름한 천 조각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 하나가 들려 있었다.

“문 진사댁 제사에서 얻어온 엿과 과자다. 동무들과 놀 때 뜀박질 내기에 걸어라.”

과자란 소리에 달콤한 침이 잔뜩 고인 연화가 쪼르르 달려가 냉큼 받았다.

“날이 차구나. 들어와 아침 먹자.”

연화는 다 떨어진 짚신을 하늘 높이 벗어 던지고 방으로 냉큼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조각 천을 이어 붙인 밥상보를 걷는 조 상궁의 손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꼴깍 침을 삼켰다. 돈으로 양반 족보를 사들였다는 소문이 있는 문 진사 댁. 그 집은 무언가 티를 내듯 제사나 생일 때가 되면 산더미처럼 음식을 만들어서 이웃들에게 나눠줬다. 그때마다 궁궐 수라간에서 음식을 만들었다는 조 상궁한테 도움을 청했다. 그래서 거지들마저 그날만큼은 튀어나온 배를 두드릴 수 있었다. 조 상궁도 품삯 대신 온갖 음식을 바리바리 싸 왔다. 조 상궁이 먼저 젓가락을 들어 두툼한 소고기와 파를 끼워 계란물을 입힌 산적을 한쪽 떼어내 입에 넣었다.

“아기씨, 이제 드시지요.”

“잘 먹겠네, 조 상궁.”

방문 밖과 안이 사뭇 달랐지만 두 사람은 개의치 않고 씹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식사를 마쳤다. 조 상궁이 허름한 궤짝 안에서 꿰맨 자국이 가득한 버선 하나를 꺼내왔다. 조 상궁은 구멍이 숭숭 뚫리기 시작한 연화의 치마를 걷어 올려 두고 종아리에 꽁꽁 싸매둔 묵직한 쇳조각들을 풀어냈다. 그리고 온몸이 푹 파묻혔을 눈 속을 헤치며 다니느라 짜면 물이 나올 것처럼 흠뻑 젖은 연화의 발에서 버선을 벗겨냈다. 그런데 뽀얀 발 대신 거무튀튀한 가죽 천 같은 것이 연화의 발을 감싸고 있었다. 조 상궁이 젖어 든 가죽을 작은 발에서 벗겨냈다. 무심해 보이던 조 상궁이 꽁꽁 얼었다가 벌겋게 녹기 시작한 자그마한 발을 정성스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만해, 조 상궁. 발이 차가워서 조 상궁 고뿔 들어.”

“조금만 더요, 아기씨. 저도 해내지 못할 일을 시켜놓고 피눈물이 가슴에 고여 썩어 듭니다.”

위로 같은 말에, 대견하다고 말해주는 격려에 괜스레 코끝이 맵다. 작년에 어머니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아니, 돌아가셨다는 소문만 들었다. 그 밤 연화는 집을 나와 무작정 길을 떠났다. 어머니는 어느 날 무언가 작심한 듯한 얼굴로 어린 딸을 마주 앉혀 놓았다. 그러더니 5살 된 딸의 두 눈을 뚫을 듯 똑바로 쳐다보면서 어미가 없어지면 무조건 그곳으로 가라며 강압적인 다짐을 받아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볼일을 보러 간다던 어머니는 끝내 돌아오지 않으셨다. 연화는 동냥으로 배를 채우면서 사람들한테 물어물어 겨우 이곳으로 왔다. 꼬박 한 달이 지나가 있었다. 그리고 열흘을 더 이 동네에서 개울물을 퍼먹거나 동냥을 하면서 지냈다. 하도 굶은 탓에 주막집에서 풍기는 맛있는 국밥 냄새에 이끌려 밥을 조금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때 옆으로 다가온 한 아주머니가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네 이름이 뭐냐?’

‘막순이요.’

동냥을 하게 된 이후 씻지 못한 몸에서는 시큼하게 썩은 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갈하게 차려입은 아주머니는 주막집 밖에 서서 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있는 그녀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조 상궁님 요즘 참 이상하시네? 거지 아이들만 보면 뭘 그렇게 이름부터 물어 싸요? 찬밥이라도 한 덩이 주고 묻던가.’

주막집 아주머니가 끼어들어 빈정댔다. 없이 사는 건 매한가지인 동네였다. 그런 곳에서 혼자만 고고한 척 꼿꼿한 표정으로 다니는 조 상궁을 그동안 아니꼽게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 상궁은 찬찬히 연화의 모습을 살펴보더니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네 나이는 알고 있느냐?’

‘5살입니다.’

연화는 또박또박 제 나이를 말했다.

‘마침 집안일을 거들어 줄 아이가 하나 필요했다. 그동안 본 아이 중에서 네 눈빛이 가장 똘망똘망한 것이 마음에 드는구나.’

‘그런 거였어요? 그러면 그렇다고 진즉 말을 하시지…….’

무안해진 주막집 아주머니가 슬쩍 조 상궁을 탓했다.

‘밥은 먹여 줄 터이니, 나와 같이 가겠느냐?’

연화는 고개가 떨어질 정도로 흔들었다. 당장 주린 배만 채울 수 있다면 죽으라는 것 빼곤 무엇을 시키든 따를 수 있었다. 그날부터 연화는 조 상궁의 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 상궁이 먼저 어머니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그녀가 누구인지도 안다고 말했다. 조 상궁은 어머니에게 무슨 언질이라도 받아 두었던 것인지, 어머니께서 하시던 그대로 연화를 혹독하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조 상궁이 자신에게 사랑이나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면 해내기 위해서 절대로 애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루고자 하는 그녀들의 간절함과 진실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듯 설산으로 내몰곤 창자가 끊어지는 듯 고통 어린 눈길로 발을 주물러 주고 있었다. 이런 게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진심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어머니처럼 조 상궁의 마음 또한 사랑이란 걸 알기에 연화는 뜻 모를 훈육을 묵묵히 견뎌낼 수 있었다. 조 상궁이 불쑥 물었다.

“낳아주신 어머니는요?”

“오월이.”

연화는 두려움이 일 정도로 강인하면서 아름다웠던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대답했다.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냉정하게 가르치면서도 지어주던 온화한 미소가 어여뻤던 어머니가 또 보고 싶어진다. 때때로 인정을 두지 않고 거세게 몰아붙였지만, 그 속에 따듯함을 담은 어머니의 음성이 그리워 미치겠다.

“아버지는요?”

“몰라.”

“전에 살던 곳은요?”

“어딘지는 모르지만 백 밤은 넘게 걸어가야 있는 거지 움막.”

일러준 대로 정확하게 대답하자 냉랭하던 조 상궁의 눈빛에 흡족함이 서렸다. 조 상궁은 한 손바닥 안에 쏙 들어와 겨우 온기가 돌기 시작한 조막만 한 발을 보자 가슴이 시리도록 아팠다.)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쇳덩이를 붙여 단단히 묶어둔 다리에는 온통 멍이 들어 있었다.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이 강산을 소중히 여기며 아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길 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잊지 마세요.”

죽으면 끝이다. 비루하더라도 살아 있어야만 훗날을 기약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조 상궁은 이 아이가 제 어머니처럼 죽음을 택하기보단 제 목숨을 지키는 일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길 바랐다. 너무나 이른 나이에 부모를 잃어서인지 아이는 어른처럼 의젓하기만 해서 마음이 아팠다. 조 상궁은 붉어지려는 눈시울을 감추듯 아랫목 이불속에 넣어두었던 가죽 천을 꺼내왔다. 가죽 천을 다시 연화에 작은 발에 둘둘 감싸 발목에 꽉 묶어두고 솜을 넣어 군데군데 기운 버선까지 신겨주었다. 그리고 걸을 때 거치적거리지 않게끔 조각낸 쇳덩이를 어린 나뭇가지 같은 연화의 다리에 붙여놓고 천으로 꽁꽁 동여맸다.

“자, 이제 나가서 실컷 노세요. 저녁때 돌아오시면 아직도 미숙하기 이를 데 없는 서체를 다듬으시고 읽으시는 책도 떼도록 하세요.”

“웅, 그럴게!”

친구들과 놀 생각에 들뜬 연화는 방문을 열고 후다닥 뛰어나갔다. 방문을 닫으려는데 오늘 딱 하루만이라도 집에 있으라고 할까 고민하는 조 상궁이 보였다.

“조 상궁. 조마조마 가슴 졸이지 마. 여차하면 날쌘 다람쥐처럼 열흘 밤낮 달려 쥐도 새도 모르게 숨을게. 우리 거기서 다시 만날 수 있잖아.”

자신의 존재로 인해 매일을 불안함 속에서 살아야 하는 조 상궁한테 미안했다. 그래서 좀 더 예의를 갖추고 품위 있게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작은 머리통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예,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그리고 제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거나 연락조차 없으면 지체 말고 강 장군을 찾아가세요.”

당부하는 조 상궁을 안심시켜 주기 위해서 헤헤 웃은 연화는 힘주어 고개만 끄떡 흔들었다.

“어서 자라서 그분을 직접 뵈러 가셔야죠?”

“그럴게.”

“선왕께서 승하하시기 전 제게 궁에서 어서 나가라고 귀띔해 주신 분이 바로 강진원 장군, 그분이셨습니다. 그분 덕에 저는 목숨을 건졌고, 아기씨 어머니의 스승님이시기도 하신 분이니 그분만큼은 믿어도 될 듯합니다.”

“응! 나, 놀다 올게.”

연화는 듣는 둥 마는 둥 찬바람이 들세라 방문을 꽉 닫아주었다. 친구들하고 놀 생각에 신이 난 연화는 눈덩이가 덕지덕지 붙은 짚신을 땅바닥에 패대기쳐서 털어내고 신었다. 한 손에는 아까 조 상궁이 준 과자가 들려 있었다. 밖으로 나간 그녀는 한참을 달음박질하듯 작게 언덕진 동네 아래로 내달렸다. 작은 목에 남아 있는 숨이 없을 만큼 정신없이 달려왔던 연화는 걸음걸이를 바꿔 살금살금 이판 대감댁 뒤쪽 담 아래로 가서 섰다. 그때가 되어서야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거칠어져 있는 숨을 골랐다.

“얘, 막순아?”

불쑥 머리 위에서 작지만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움에 고개를 번쩍 드니 이조판서 대감의 무남독녀이자 금지옥엽 이부연이 보였다. 그녀가 고운 비단에 감긴 팔 하나를 아래로 쭉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편지가 연화가 있는 쪽으로 톡 떨어졌다. 종이 새처럼 푸시시 떨어지는 편지를 누가 볼세라 얼른 집어 든 연화는 그것을 재빨리 품속에 감췄다.

“이건 심부름 값이야.”

담 위에서 던져준 엽전 하나가 어젯밤 내린 눈 속에 파묻혔다. 연화는 잃어버릴세라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후다닥 눈을 파내 엽전 하나를 찾아냈다. 하루 종일 밭을 갈아주고 받는 품삯이 두 냥인 걸 생각하면 심부름 값치곤 후하다 못해 넘치는 값이었다. 한 손엔 과자 주머니를 다른 손엔 엽전 한 냥을 꼭 쥔 연화가 담 위에 있는 부연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맡겨주세요, 부연 아가씨.”

동그란 얼굴형에 겁이 많아 보이는 큰 눈과 약간 통통한 입술인 부연이 예쁘장하게 웃었다.

“그래, 매번 고맙다. 눈이 와서 길이 많이 미끄러우니까 뛰지 말고! 늦어도 괜찮으니 천천히 다니렴.”

“그럴게요. 이만 가볼게요, 아가씨.”

예쁘게 웃어주는 부연을 뒤로 하고 천천히 걷던 연화가 슬쩍 뒤를 돌아다보았다. 부연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연화는 이내 쏜살같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 호판 대감댁 뒷담으로 왔다. 서로 약조된 기왓장 하나를 살짝 들어 올린 연화는 받아온 편지를 조심스럽게 넣었다.

“막순아!”

“까악!”

갑작스러운 아는 체에 깜짝 놀란 연화의 몸이 눈 속으로 벌러덩 자빠졌다.

“괜찮으냐!”

“덤벙대기는, 쯧쯧쯧.”

담장 위로 불쑥 솟아오른 두 개의 머리 중 오른쪽에 있는 미남자가 크게 당황하여 물었다. 미남자는 호조판서 대감의 외동아들 장지혁이다. 선한 인상의 그는 한쪽 눈을 감고 보아도 글공부에 열심인 모범생 선비님 그 자체였다. 그랬던 그가 요즘 이판 대감 댁 딸 이부연과 목화 연애 중이었다. 어른들의 눈을 피해 꽃피우고 있는 둘의 연정을 위해서 연화가 오작교 노릇을 하는 중이었다.

몇 달 전 연화는 조 상궁의 심부름으로 고관대작들만 산다는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그때도 오늘처럼 아무 생각 없이 뛰어가다가 어느 부잣집 도련님의 가슴팍으로 돌진해 버리고 말았다. 양 뺨이 퉁퉁 붓도록 얻어맞고 머리통이 얼얼할 정도로 주먹질을 당했지만 연화는 발이 손이 되도록 비는 수밖에 없었다. 그 광경을 우연히 지나가던 부연과 지혁이 보고 달려와서는 구해줬다. 그때의 인연으로 연화는 두 사람의 연정에 팔을 걷어붙이고 물심양면 돕게 되었다. 그리고 쯧쯧쯧 혀를 차는 최도엽 도련……아니, 저놈은. 아니 저 님은, 그녀보다 10살이나 더 많으면서 만나기만 하면 구박부터 했다.

‘님아, 밤길 조심하셔요. 뒤통수 간수도 잘하셔야 할 겁니다요.’

아주 마음에 안 드는 최도엽은 영의정 대감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몸 전체에서 흐르는 매섭고 강한 기세만 빼면 지혁 도련님처럼 미남자로 보이긴 하였다. 키마저 지혁 도련님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컸다. 그리고 세상이 공평한 것인지 불공평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최도엽은 하라는 글공부는 남의 나라 얘기처럼 여겼다. 대신 유흥거리나 싸울 거리만 찾아다니는 소문난 한량이었다. 두 분이 어쩌다 친구가 되었는지 어린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뛰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했음에도!”

미간에 힘을 팍 준 도엽이 무섭게 을렀다. 그러자 친구 지혁이 도엽의 어깨를 퍽 때리면서 그만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두 남자가 다툴까봐 걱정이 된 연화는 생각이 없는 아이처럼 헤헤 웃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