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랜 친구 사이

딸랑.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창가에 앉아 예쁜 뷰 대신 내내 휴대폰만 들여다보던 해율이 시선을 옮겼다.

혼밥, 혼술, 혼영, 혼캠, 혼여….

요즘 분야를 가리지 않고, 무언가를 홀로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해율은 영 혼자인 것에 익숙해지질 않았다.

특히 사람들이 많은 곳에 혼자 있어야 할 때 찾아오는 고독, 작아짐 따위의 감정들에 그녀는 정이 안 갔다. 싫었다.

트렌드에 뒤처지고 문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제 성향이 이런 걸 어쩌나 싶었다.

어쭙잖게 싫은 걸 꾹 참아가며 그것을 따라 하진 않기로 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퍽 오래 기다렸다.

요즘 SNS에서 가장 핫하다는 디저트 카페에 오는 일을 말이다.

요즘이라기엔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도록 오래 기다리게 된 건 다른 문제였지만.

그래도 카페의 인기가 사그라들기 전에 말년휴가를 나오는 찬형이 있어 다행이었다.

덕분에 아마 오늘이면 해율도 제 SNS에 이곳에서만 판매하는 양 모양의 케이크 사진을 올릴 수 있을 터였다.

뭐 태운과 헤어지지 않았다면 진작에 오고도 남았겠지만.

몇 주 전 헤어진 남자친구가 떠오르자 해율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맛있는 거 먹으러 온 예쁜 곳에선 좋은 생각만 해야지.

나름 긍정적인 생각을 해보려 노력하는 주인 덕에 열심히 흔들리던 머리의 중앙은….

탁.

“아앗!”

“뭐 하냐? 정신 사납게.”

길게 뻗은 단단한 손가락에 의해 빨갛게 부어올라 버렸다.

까칠한 말투와는 다른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난 곳을 향해 해율이 고개를 들었다.

곧 다가올 전역을 대비해 아슬아슬한 머리 길이를 유지하고 있는 찬형이 씨익 웃으며 서 있는 모습이 해율이 길고 가늘게 뜬 눈에 담백하게 비쳤다.

“아프잖아! 왔으면 말로 하지.”

“철 지난 춤 추는 것도 아니고. 혼자 앉아서 이상한 짓을 하길래.”

“이씨.”

찬형이 자연스럽게 해율의 앞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아직 여름인데 챙겨 입은 길고 하얀 셔츠와 검은색 슬랙스가 보통의 성인 남성보다도 크고 훤칠한 찬형을 멋들어지게 감쌌다.

그는 꼭 데이트라도 하러 나온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해율의 눈에 그런 게 들어올 리 없었지만.

“아프긴 하겠다. 이마 빨개졌어.”

“지가 때려놓고.”

“그게 때린 거냐. 친구끼리 하는 인사지, 인사.”

별거 아니라는 듯, 찬형은 긴 팔을 뻗어 해율의 빨개진 이마를 스윽스윽 문질렀다.

조금 갑작스러울 법한 그의 손길에도 해율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다.

갑작스럽다기보다 당연함, 익숙함 따위의 감정을 느끼기라도 하는 듯, 그냥 그의 세심한 손길을 자연스럽게 받아냈다.

여전히 붉은 제가 만들어놓은 흔적을 살펴보는 찬형의 눈빛엔 미안함이 묻어났다.

“아아. 아프다고.”

“그니까. 혼자 이상한 짓 안 했으면 이럴 일 없잖아.”

“와. 박찬형 진짜 어이없어. 때린 네가 잘못한 거지. 내가 잘못했냐? 아줌마한테 다 일러야겠다.”

“쯧. 어른한테 이를 생각이나 하고. 아직도 애고만. 함해율.”

“흥, 뭐래.”

해율이 눈치채기도 전에 그 눈빛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토라진 척을 하는 해율의 모습에 살짝 코웃음을 친 찬형이 그녀에게 물었다.

“아무튼. 오늘 뭐 하자고? 여기서 양 케이크인가 뭔가 먹고. 사진 찍고 동감 보러 가자고 그랬나?”

“어. 사진은 못 찍어도 동감은 꼭 봐야 해. 그거 개 슬프대.”

“슬픈 걸 왜 일부러 돈 주고 찾아서 보냐.”

“….”

카페에 온 후 처음으로 해율은 침묵을 지켰다.

내내 밝아 보였는데, 급속도로 변하는 해율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던 찬형이 말을 돌렸다.

“또. 하고 싶은 거.”

“….”

“함해율!”

“어?”

“또 뭐 하고 싶냐고.”

“…갑자기 생각 안 나. 너 언제 들어간댔지, 박찬형?”

“일주일 있다가. 근데 어차피 다다음날 전역이야.”

다행히도 그가 대답하자 멍하던 해율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표정 참 다이내믹하네.

해율이 느끼는 감정의 기복이 작은 얼굴에 다 드러났다.

아직 그녀는 이별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질 못한 모양이었다.

노력하는 것 같긴 한데, 차도가 없어 보이니 안쓰러웠다.

하지만 찬형은 신경이 쓰이면서도 아픈 해율의 마음을 어떻게 위로해 주어야 할지를 잘 몰랐다.

그래서 그냥 웃으니 다행이라고, 마냥 생각했다.

사실 다행이라는 단순한 것보다 더 뜨겁고 커다란 감정이 다가왔지만 외면했다.

의지적으로 붙잡고 있는, 해율과 제가 그런 것에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되는 관계라는 생각에 여전히 변함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해율의 웃는 모습은 확실히 찬형의 마음을 꿀렁대게 만들었다.

“오! 나 이제 늦게까지 놀아도 되겠다!”

“내가 네 경호원이라도 되냐. 나도 바쁘거든.”

“크. 따로 놀다 같이 들어가면 되지. 요즘 들어 제일 마음에 드는 소식이네.”

“차하.”

혀를 차면서도, 제 앞에서 해실대며 웃고 있는 해율에게서 찬형은 눈을 떼질 못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려서 해율의 말랑한 볼을 슬쩍 꼬집었다.

어느새 그녀를 따라 웃고 있던 찬형의 시선이 한 번 더 이마를 향했다. 이제 많이 가라앉은 꿀밤의 흔적에 안심이 됐다.

“빨리 시켜라. 한정 수량만 판매한다며.”

“아. 어. 너 뭐 마셔? 아아?”

“그러지 뭐. 덥네.”

해율이 카드 지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의 의미로 누나가 쏠게, 오늘은.”

“돈 많냐? 각자 내.”

“어 많아. 는 아니고, 어제 나 월급날이었거든! 크. 기다려, 찬형아.”

한 번 더 살짝 웃으며 카운터를 향해 뒤를 도는 해율에게서, 찬형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웃으면서, 이름만 부르면 어떡하라고.

“후우우.”

몇 년째 애쓰고 있는 제 노력을 알아주려는 생각은 없는 모양인 듯한 심장의 박동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기다린 시간만큼이나 잔뜩 기대를 했는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줄을 서 있는 해율의 뒷모습이 보였다.

활기차기 그지없는 해율의 뒷모습 뒤로, 찬형은 긴 한숨을 뿜어냈다.

***

계속 해율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건 제 생각에도 좀 미련한 짓 같기는 했다.

하지만 결국 찬형은 그것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신이 잔뜩 났는지 가만히 있질 못하고 몸을 이리저리 흔들거리던 해율의 움직임이 별안간 멈추는 것도, 작은 머리통이 한곳으로 돌아가는 것도, 그리고 고정이라도 된 듯 더 이상 움직이질 않는다는 사실도 바로 알아챌 수 있었으니 말이다.

찬형은 해율이 쳐다보고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해율의 전 남자친구인 태운이 처음 보는 여자와 함께 있었다.

태운도 분명 해율을 못 보지 않았을 텐데, 그녀가 신경 쓰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해율과 헤어진 후 그 짧은 사이 생긴 모양인 새로운 여자와 시시덕거리며 쪼개고 있는 꼴을 보면 말이다.

그런 태운의 모습을 본 찬형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끓어올랐다.

‘함해율, 다 봤으려나.’

그리고 걱정이 되었다.

빌어먹게도 전 남자친구였던 태운에 대한 해율의 마음이 얼마나 컸는지, 이별 직후 얼마나 힘들어했고, 힘들어하는 중인지를. 찬형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

얼마나 태운이 있던 방향을 본 채 서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해율이 걱정되어 다시 그녀가 줄을 서던 쪽으로 찬형이 고개를 돌렸을 때 이미 해율은 그곳에 없었다.

별로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함해율!”

찬형은 해율이 이 카페에서 벗어났다는 걸 알아챘으면서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하며 해율의 이름을 불렀다.

“해율아!”

해율이 두고 간 소지품들을 챙기며 몇 번을 더 그 이름을 불러댔다.

한창 새 여자에 정신이 팔려있던 태운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 박찬ㅎ….”

“…찌질한 새끼.”

눈이 마주쳤다.

태운의 눈동자는 흔들렸고 찬형의 것은 서늘했다.

한마디 말과 함께 태운의 멍청해 보이는 눈빛을 무시한 찬형이 출입문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태운을 죽어라 패주고 싶었지만, 해율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을 이겼다.

휴대폰도 두고, 정말 말 그대로, 태운을 보자마자 나가버린 해율을,

‘울 텐데.’

그녀를 찾는 일이 더 급했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

제가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해율은 도망치듯이 카페에서 빠져나왔다.

그냥 그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다.

사고가 정지하도록, 짧은 찰나에도 숨이 막혀 들도록 힘들었다.

여자는 제 것이었던 자리를 차지한 채, 태운을 보며 갖은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몇 년이나 제 곁을 지키던 남자는 그것을 익숙하게, 당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고.

‘고작 3주일 리가 없어.’

그래 사고가 정지했다기보다, 저 생각에 갇혀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해율의 뒤에서, 그녀에겐 갑작스러웠을 이별을 계획하고 준비했을 태운을 떠올렸다.

해율은 마냥 그와 행복해했던 그때의 제가 안타깝고 불쌍해서 마음이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계단으로 5층을 내려왔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처음 도착했을 때와는 제법 달라진, 꾸물거리는 낮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해율은 바깥 공기를 마신 지 오래지 않아 멈추어 섰다.

찬형이 시간을 내주어서 마음먹고 처음 와본 곳이었다.

근처에 무엇이 있는지 어딜 가야 하는지 그녀가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안 그래도 길치인데, 정신까지 없었으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앉을만한 곳이 보였다.

해율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터덜터덜 걸어가 그냥 그 위에 앉았다.

길가 벤치에 혼자 앉아 넋을 놓고 있는 그녀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다행인지 눈물이 나오진 않았다. 그래, 혼자인 건 싫었지만 울지 않은 것은 확실히 다행이었다.

방금 맞닥뜨린 태운의 행복해 보이던 모습과 그와의 마지막 순간이 겹쳐졌다.

쓰린 마음이 요동치듯 꿀렁거렸다.

끝까지, 다행일 수 있을지 모르겠네.

“아, 해율아. 나 할 말 있는데.”

“응, 뭐예요, 오빠?”

“헤어지자, 해율아.”

“…네? 지금 뭐… 라ㄱ….”

“헤어지자고. 그만 만나, 너랑 나. 이제.”

꽤 정확하고 명확하게 들려서 이해되었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해율은 비참하게 몇 번씩이나 되물으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의 뜻을 확인했다.

구차하게 이유도 물어봤다. 뭐, 대답을 듣진 못했지만.

고작 3주 만에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는 태운을 보니 매달리고 붙잡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사실 이별을 맞은 그날 밤엔, 그를 붙잡지 못했던 그 순간의 자신을 몇 번씩이나 후회했으면서.

마음이 하는 일을 머리로 이해하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태운의 이별 통보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던 해율은 홀로 아픔을 감내하는 와중에도 궁금했었다.

“걔 여자 생긴 거 아니니?”

“…설마.”

“싸운 것도 아니라며.”

“응.

“근데 왜 갑자기….”

“몰라요, 나도. 잘래. 불 꺼줘.”

계속 고민하고 궁금해했던 질문의 답은 결국, 설마가 사람 잡는다, 였는데.

왜 절대 그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해율은 이제 다 가라앉은, 찬형이 꿀밤을 때렸던 이마를 퍽퍽 쳐댔다.

아마 정신을 차려보려고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럴수록 행복해 보이던 태운의 웃음과 애정이 담뿍 담겼던 눈빛이 자꾸만 생각났다.

답을 알고 나자, 빌어먹게도 한 번 더 차인 기분이 들었다.

“…동감, 안 봐도. 되겠네. 흐읍.”

차오르던 슬픔이 넘쳐버렸다.

결국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던 일도 다행일 수가 없게 되었다.

다행이긴커녕, 해율은.

혼자. 낯선 곳에서.

바보같이 헤어진 연인 때문에 울고 있는.

최악의 상황 속에 홀로 놓여 있었다.

***

도대체가 날씨를 종잡을 수 없는 여름이었다.

분명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시꺼메지더니 천둥번개가 치며 비를 쏟아내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뜨거운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길 반복하는.

오늘도 여지없었다.

가을처럼 높고 맑았던 하늘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언제 맑았나 싶었다.

해율을 따라 급하게 밖으로 뛰쳐나온 찬형에게 우산 따위 있을 리가 만무했다.

휴가의 첫날인 오늘, 찬형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해율을 만나기 위한 준비를 하고 곧장 이곳으로 온 참이었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찬형의 넓은 어깨 위로 하나둘씩 흩뿌려지기 시작하는 빗방울의 자국이 새겨졌다.

신경 써서 입고 나온 흰 셔츠는 조금씩 젖어 들었다. 젖은 셔츠가 2년간 잘 그을린 그의 탄력 있는 피부에 착 들러붙었다.

덕분에 스쳐 가는 여자들의 시선을 잔뜩 받았다.

뭐, 찬형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도 않는듯했지만.

“어디에 있는 거야.”

그래도 꽤 바로 따라왔으니 해율이 멀리 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페 건물 주변을 찾아다녀도 찬형은 30분이 넘도록 해율을 발견할 수 없었다.

땀방울인지 빗방울인지 모를 것이 그의 짧은 머리카락을 타고 빨개진 뺨 위로 흘러내렸다.

“후우.”

정신이 좀 없었다, 해율이 울고 있을 거란 생각에.

그냥 눈물을 흘리고 있을 해율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렸다.

찬형은 그녀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에 온통 사로잡혀 있었다.

혼자 있는 거, 무척이나 싫어하니까.

옆에 있어 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고, 해도 되니까.

…친구니까.

그냥 그럴 셈이었는데.

보이질 않으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흐아아. 하아.”

뛰어다니고 있던 발을 멈췄다.

잠깐 숨을 골랐다.

별로 사람이 많은 복잡한 곳도 아니고, 엄청나게 넓은 지역도 아닌데 해율이 보이질 않았다.

이상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 진동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저는 평소 무음으로 휴대폰을 설정해 두곤 했기에, 울리고 있는 휴대폰이 해율의 것이라는 사실은 금세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