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찌 저리 강하고 간결할 수가

방의 창문을 통하여 빠져나오고 벽면을 탄 후에 훌쩍 정원으로 뛰어내렸다.

밤…. 조명이 꺼진 백작가는 조용했다. 몰래 담을 넘으면서 뒤돌아본 저택은 어둠 속에 봐도 위용 넘치는 모습이었다.

‘여기 있으면 편할 텐데, 그냥 있을 걸 그랬나?’

부모도 없이 사부님께 무술을 배우며 직접 물 긷고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면서 살다가, 하녀들이 식사도 침대로 가져다주고 병간호해 주고 온갖 시중을 다 해주는 백작이라는 귀족 딸의 몸으로 영혼이 들어오니 편안함에 몸이 늘어지기는 했다.

‘아니야. 그래도 그럴 수는 없지.’

애써 고개를 저었다.

아픈 딸의 얼굴을 보러 오는 아타나시아의 아버지를 볼 때면 자꾸 죄책감이 들었다. 들킬까 봐 무섭기도 하고.

나는 그녀가 아니니까…. 진짜 딸은 죽고 속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버지가 지금처럼 자상할까?

‘들키기 전에 떠나는 게 예의야.’

미련을 떨치기 위해 다리를 더욱 빨리 움직여 앞으로 나갔다.

늦은 밤, 거리에는 인적이 거의 없었다.

이 몸으로 깨어난 후에 처음 보는 이국적인 모습을 눈에 담았다. 회색 네모난 돌로 바닥이 잘 정돈된 거리. 낮에는 지금보다 화려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늦은 시간, 장사를 하다가 접는 사람들만 간간이 있었다.

구경해 보고 싶은 호기심을 살짝 눌렀다.

도망치는 몸. 누군가 원래 이 몸의 주인인 아타나시아를 알아볼지도 모르니까 안 돼! 잠시 거리의 모습을 살핀 후에 곧바로 어두운 골목길로 숨어들었다가 굴러다니는 쓰레기와 특유의 악취에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뒷골목은 정비된 대로변과 차이 나게 더러웠다.

찍! 찍!

쥐새끼의 후다닥 도망치는 소리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찡그렸던 표정을 풀었다.

‘그사이 고급스러운 생활에 익숙해졌나?’

어둠에 몸을 감추고 잠시 숨을 돌리면서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지 고심하는 그때.

부스럭.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사람?’

아직 내공이 돌아오지 않아서 원래의 몸처럼 기척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보통 사람 수준보다는 나았다.

인기척이 느껴지고 난 다음에 약간의… 살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도시에서? 살기라니?’

의아해하며 어두컴컴한 골목 끝을 바라보자 어슴푸레하게 인영이 2개 보였다.

무언가 묵직한 것을 끌어서 운반하는 걸로 보이는데 끌려가는 그것은… 사람이다? 시체인가? 이런!

난데없는 나의 등장에 흠칫 몸을 굳힌 남자 2명이 바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칼을 치켜세워 들고 덤벼들었다.

슉.

“이크!”

한 달 남짓이지만 틈틈이 운동도 하고 운기 조식으로 내공도 모았기에, 운동이라곤 아마도 편지 쓰고 밥 먹는데 쓰는 정도였던 아타나시아라는 아가씨의 몸에도 조그마한 근육 정도는 만들어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장정 2명과 대적할 정도는 되지 않았다. 몸을 회복하고 근육 키우는데 한 달은 너무 작았다.

그래도 무술은 눈이 9할이다. 움직임을 읽고 몸이 자연스럽게 칼을 피했다. 칼이 허공을 찌르자 눈이 커지고 당황한 표정의 남자.

퍽!

팔목을 내리치자 남자가 칼을 떨어트렸다. 주우려고 몸을 숙이는 순간 뒤에서 다가온 손! 향이 나는 손수건으로 내 입을 막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이건 설마 미혼향 종류? 이 사람들 누구지? 왜 이렇게까지?

“이것 봐…. 바지를 입었지만 여기도 여자야.”

“귀족 같은데?”

“잘됐네! 같이 실어!”

가물가물해지는 머릿속으로 그들의 대화가 꽂혔다.

​***

흑흑 크흑.

어디선가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과 함께. 도대체 누구지.

그만 좀 울라고 하고 싶은데 말이 되어 나오질 않았다. 그제야 몸이 무겁다는 걸 알았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있고 손과 발은 결박되어 있었다. 몸은 흔들리고 머리는 지끈거린다.

흐릿한 정신을 이기고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조금 후 시야가 서서히 선명해지고 눈앞의 형체가 보였다.

아까 남자들이 옮겨 운반하던 그 물체가 눈앞에 있다. 시체가 아니었어! 살아있는 여자였구나!

갈색 머리의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고 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얼굴은 부어있다. 입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재갈이 물려있고.

그 상태로 울다 보니 크게 울지 못하고 훌쩍였던 거다. 이제야 아까의 울음소리가 무엇인지 알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쪽도 내가 깨어난 걸 알아차렸는지 여자가 몸을 움직였다.

“으음. 움.”

하지만 입에 물린 재갈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미혼향이 깨면서 몰려오는 두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몸을 일으켜서 벽에 기대고 내부를 살폈다.

어둡고 좁은…….

‘짐마차?’

자꾸 덜컹거렸던 것은 그 때문이었구나. 설마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납치를 당하는 걸 목격해서 같이 납치를 당한 거였어!

물론, 몸이 바뀌는 경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제 어떻게 하지?’

몸은 묶여있고 어디인지도 모르고.

후.

한숨이 깊게 나왔다. 그러는 중에 몸의 흔들림이 조금씩 줄어들더니 마침내 흔들림이 멈췄다. 마차가 멈춘 걸까? 남자들 말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발소리와 함께 멀어졌다.

"음음… 으음.”

앞의 여자를 살펴보니 나에게 뭔가를 말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잘 안 되는 거 같았다. 의사소통을 포기하고 마차 안을 다시 살펴보니 나무 상자가 보였다. 바닥을 기어 슬슬 움직여서 상자로 다가갔다. 몸을 뒤로 돌렸다.

슥슥.

상자 모서리에 밧줄을 문질렀다.

젠장!

단단하게 결박했는지 밧줄이 풀리지 않았다.

‘너무 섣부르게 도망을 쳤나. 좀 더 내공을 쌓은 후에 나왔어야 했나?’

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그때,

쿵!

옆에서 여자가 넘어지더니 묶인 손으로 자기의 목걸이를 손짓했다.

다시 바닥을 기어 가까이 가서 살펴보았다. 목걸이 같아 보이지만 겉보기만 그럴 뿐 호신용 칼이라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려에 있을 때 무공을 모르는 여인들이 품고 다니던 쓸모없어 보이던 장식칼 같은 느낌이지만 이번에는 유용할 듯했다.

양손을 뒤로해서 뚜껑을 빼니 나온 것은 반 뼘도 안 되는 크기의 칼! 누구를 찌를 정도는 아니지만 밧줄 정도는 잘라낼 수 있을 듯하다.

조심히 여자의 손을 결박한 밧줄을 더듬어 잘라내고 여자에게 칼을 건네니 여자가 이번에는 내 밧줄을 풀어주었다.

모든 결박을 풀어내고 나니 여자가 소리 죽여 울음을 터트렸다.

“소리 내지 말아요.”

남자들이 멀리 가지는 않았을 거다. 그녀를 토닥여 달래주고 소리 낮춰 물었다.

“납치범은 몇 명이었어요? 세 명인가요? 네 명? 혹시 더 있어요?”

“잘 모르겠어요. 흐윽. 죄송해요.”

전생에서는 고수인 내가 어쩌다가 무공도 모른 남자들에게 납치를 당했을까. 무공만 회복했으면 이렇게 쉽게 납치를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무공의 회복이 시급하다. 더 강해져야 한다.

하지만 우선은 도망부터 치자.

“이제 어떻게 할까요?”

“도망칠 방법을 생각해 보죠.”

손에 든 칼은 너무 작다. 게다가 나는 아직은 나약했다. 그래도 그동안 쌓은 내공으로 급소를 노려볼 수는 있겠다.

달그락 달그락.

마음을 굳히는 데 밖에서 자물쇠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난 재빨리 여자를 원래 위치에 앉히고 재갈과 밧줄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슬쩍 걸쳐놓았다. 그리곤 나도 맞은편에 앉았다.

덜컹 삐그덕.

곧 문이 열렸다.

“…깨어났네? 흐흐.”

남자가 그 여자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음흉하게 웃었다. 마차가 남자의 움직임에 따라 삐걱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허름한 복장, 더럽고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 악취, 거구.

남자가 맞은편 여자에게 다가가면서, “이쪽이 취향인데.”라고 중얼거리자 구역질이 날 것 같다.

그자가 여자를 살펴보는 사이. 나는 소리 나지 않게 조심하며 몰래 뒤로 다가갔다.

그 남자가 나를 알아차리고 흠칫했을 땐 이미 늦었다. 나는 내공을 실어서 재빠르게 마비혈을 눌렀다.

내 점혈 수법은 사부님이 언제나 칭찬하셨다. 검술, 창술, 보법 다 잘하지만, 점혈은 정말 최고라고.

내공의 양이 많지 않아도 수련해온 정확성이 있기에, 거구의 남자는 몸이 빠르게 마비되어 쓰러졌다.

쿵!

마차가 흔들렸다.

남자가 고함를 지르기 전에 이번에는 재빠르게 아혈을 눌렀다. 아혈을 눌리면 말을 못 하게 된다. 입을 벌린 상태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자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몸을 뒤졌다. 칼이 있으려나.

다행히… 있다!

칼은 많이 잡아본 나지만, 이것은 낯설다. 길이는 내 팔뚝만 하고, 손잡이는 두껍고 무겁다. 현재의 몸이 약해서 더욱 무거운 듯했다. 그래도 휘두를 수는 있으리라.

나는 칼을 잡지 않은 손으로 여자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얼른 도망쳐요. 우리! 얼른!”

놓고 갈 수는 없지. 같이 가야겠다. 여자가 악기 현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디… 어디로 가요?”

“나가서 생각해요.”

난 여자를 재촉했다. 그녀가 덜덜 떨리는 작은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스윽.

마차 밖으로 발을 내밀었다. 다른 납치범들이 없어야 할 텐데.

마차를 나가자마자 근처 수풀 안으로 여자를 끌고 뛰어 들어갔다. 하지만 나의 바람은 빗나갔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거구의 남자가 서 있었던 거다.

나와 여자를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가 가늘어졌다.

기절하기 전에 봤던 남자였다. 아까 그놈과 마찬가지로 몸집은 더럽게 크고 냄새가 나는.

“너희 둘… 흐흐.”

남자가 눈에 살기를 띠었다. 하지만 겁먹은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입가 한쪽이 올라갔다. 비웃는 건가.

“나는 반항하는 여자가 좋더라.”

“미친놈!”

“위험한 물건은 내려놓고, 조용히 있어! 가만히 있으면 목숨은 살려주지.”

선심 쓰듯이 말했다.

“웃기는 소리 집어치워!”

도망치려다가 납치에 휘말린 나는 불쌍하지만, 나에게 곧 죽을 너는 불쌍하지도 않다.

아직 다른 남자들의 인기척이 없다. 그래도 납치범의 수를 모르니 나는 주변으로 기를 보내며 주변을 경계했다.

동시에 뒤에서 바들바들 떠는 여자도 보살펴야 했다.

하지만 싸움 경험이 많은 나는 기의 운용을 모르고 무식하게 힘만 셀 거 같아 보이는 이 남자가 무섭지는 않았다.

내 말에 남자의 눈이 험악해지며 나를 향해 검을 찔러 왔다.

잽싸게 몸을 비틀어 검을 피하고 뻗어있는 상대의 팔에 단검을 올려 쳤다. 그리곤 재빨리 몸을 돌려 남자의 목을 제대로 찔렀다.

“컥!”

남자는 비명도 끝까지 지르지 못했다. 비릿한 냄새와 함께 피가 솟았다. 육중한 몸이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내 뒤에 숨어있는 아가씨가 놀라서 히끅거렸다. 칼을 털어서 피를 덜어냈다.

그걸 본 여자는 “헉”하더니 바로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나는 더욱더 정신을 바짝 차렸다.

마차에 마비되어 있는 남자 한 명, 내가 금방 상대한 남자 한 명 그리고 적어도 한 명이 더 있을 테고. 숨어있는 사람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기를 넓게 펼쳐서 인기척을 살폈다. 그때 아까와 다른 누군가의 기척이 뒤에서 느껴졌다. 몸을 재빠르게 돌리며 동시에 칼을 내질렀다.

하지만 인영은 빠르게 피하고, 칼은 그의 팔목만 살짝 스쳤다. 재빠르게 균형을 잡고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피했다는 데 놀랐는데 그는 아마도 칼이 자기 팔목을 스쳤다는 데 놀란 듯 멈칫했다.

때마침 달을 가린 구름이 비켜나며 주변이 살짝 밝아진 틈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홍채는 어둠 속에서도 달빛을 받아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날렵한 코,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나는 하얀 피부 윤이 나는 검은 머리카락 큰 키.

마치 검은 털을 가진 흑표범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