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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꿈
어둠이 짙은 한겨울의 공원.
적막한 그 시공을 빠르게 나아가는 발소리들이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여리게 새어 들어오는 컴컴한 숲길로 사내 넷이 여자 하나를 끌고 가고 있었다. 여자는 입이 틀어 막히고 옆구리엔 번뜩이는 칼날이 다붙은 채였다.
이내 가로등 불빛이 사라지고 키 큰 나무들에 둘러싸인 안온한 공간이 나타났다. 눈도 별로 쌓여 있지 않은 그곳은 침엽수 낙엽들이 이불처럼 깔려 푹신했다.
비극을 직감한 여자가 격렬히 저항했다. 사내들은 여자를 들어 올려 땅에 눕히고 목에 차가운 칼을 붙였다. 활개를 치던 여자가 핀에 꽂힌 나비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빨리 해.”
“얼른 벗겨.”
“나부터 할게.”
사내 셋이 팔다리를 붙드는 사이 나머지 하나가 여자의 가랑이 사이로 무릎을 꿇었다. 여자의 허리띠를 풀고 지퍼를 내리고 바지를 끌어 내리자 뽀얀 속살이 드러났다. 사내들의 눈알이 번들거리고 여자가 몸을 비틀며 울음 가득 저항을 하는 그때였다.
퍼억!
“억!”
여자의 허벅지를 쓸어 만지던 사내가 번쩍 스치는 빛과 함께 가랑이 속으로 처박혔다. 나머지 셋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젖혔고, 어둠 저편으로 튕겨 나간 무언가는 퍼드덕 너부러졌다.
사내들은 즉시 여자를 놓고 칼을 꺼냈다. 가랑이 사이로 엎더졌던 사내도 얼른 몸을 빼돌려 칼을 집어 들었다. 사방이 순식간에 고요해지고 컴컴한 시공은 섬광의 잔영을 일렁이며 숨을 죽였다.
“…….”
저만치 어둠 속에서 삐죽빼죽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사내들은 움켜쥔 칼을 더욱 움켰다. 그 긴장감을 빨아들이며 시커먼 무언가가 점점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벌렁 너부러져 가쁜 숨을 내쉬었다.
사내들은 놀란 눈빛을 주고받으며 칼을 더 앞으로 내밀었다.
쿨럭쿨럭….
정체 모를 무언가가 그런 소리를 냈다. 그리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땅에 손을 짚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긴 머리칼이 쓸려 나가며 여성적인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두 눈에 그렁거리는 눈물… 그 눈망울에 칼을 쥔 사내들이 비쳐들었다.
쾅!
느닷없는 소리에 사내들은 기겁을 하듯 칼을 부르쥐었다. 하지만 곧 그들의 눈과 입은 멍하니 벌어지고 말았으니, 긴 머리 남자가 땅에 내리찍은 건 한 줄기 은빛 장검이었다.
옛날 옛적 무사들이 쓸 것만 같은….
생경한 은빛 검신에 나무 사이로 새어 들어온 불빛이 바스러졌다.
그 검에 의지해 일어나는 긴 머리 남자.
검은색 의복 곳곳에 부러지고 꺾인 화살들이 박혀 있었다.
사내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벌린 입을 다물 줄 몰았다.
그때였다. 그 미지의 존재가 사내들 사이의 여자를 발견하더니 별안간 안광을 내뿜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뱉으며 장검을 앞으로 내들자 그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내들이 번갯불처럼 내빼고 말았다.
어둠 속으로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땅을 박차는 소리가 요란하게 멀어지다 사라졌다.
빠르게 고요해지는 시공.
그 안에 홀로 남은 여자는 나무처럼 굳어 미동도 못 했다. 그러다 허공에 들려 있는 장검이 휘청하며 내려서자 화들짝 숨을 집어삼키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사, 살려 주세요… 살려… 사….”
야수 같은 사내들에게 붙들려 참담한 상황을 맞으려다 벗어난 것도 잠시, 곧바로 마주한 은빛 장검은 설상가상의 비현실로 여자의 정신을 파편화시켰다.
“살려….”
그런 둘 사이로 눈송이가 환영처럼 지나갔다.
바지가 무릎 위로 벗겨진 채 여자는 숨도 못 쉬었다.
그런데 장검을 늘어뜨린 긴 머리 남자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나무 사이로 비쳐드는 여린 불빛을 멍하니 쳐다보는가 싶더니,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도시의 화려한 불빛을 얼빠진 듯 바라보았다.
“…….”
다시 여자를 마주하는 그 얼굴엔 낯선 세계에 떨어진 이방인처럼 눈빛이 어지러웠다.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미지의 언어….
장검이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시선은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두운 하늘 위로 올라가 방황했다. 그 모습에 여자는 눈물을 반짝거리며 애원했다.
“살려 주세요… 전 아무 잘못도 안 했어요… 정말 착하게 살아왔어요… 제발… 아아….”
남자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여자가 울고 있었다. 여자가 울고 있는데… 울고… 있는데….
남자의 눈빛이 점점 흔들리며 호흡이 가빠져 갔다. 그의 시선이 다시 어두운 하늘로 올라가 그 밤빛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숨이 선명히 가빠 오르는가 싶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가 털썩 쓰러졌다. 그의 손에서 라앙…! 청아한 울음이 날리고, 은빛 장검은 둔탁한 쇳소리를 내며 너부러졌다.
“…….”
정적이 호수의 수면처럼 고였다. 여자의 두 볼 위로 또르르 눈물이 굴렀다. 빛과 어둠의 경계 속으로 여자는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며 입술을 바들거렸다.
가슴에 생생한 파문이 번졌다. 뱃속이 아르르 떨려 와 여자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해할 수 없는 비현실로부터 조용히 시선을 거뒀다. 가만히 손을 내밀어 바지를 끌어 올리고, 숨 막힐 듯한 숨죽임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일어난 여자는 소리 없이 몸을 돌리고 살얼음을 걷듯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뒤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어깨를 움츠렸다. 달라붙는 소름을 이를 깨물고 떼어냈다. 서둘러 한 걸음, 두 걸음 나아가는데 아파하는 소리가 옷깃을 붙잡았다.
“…….”
가슴이 고동쳤다. 마음은 뛰어 달아나고 있는데 몸은 제자리였다. 다리가 땅에 뿌리를 내린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다시 들려오는 선명한 고통 소리에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돌아보고 말았다.
시커멓게 쓰러져 있는 존재….
그 위로 박혀 있는 화살들이 심장을 뒤흔들었다. 당장 몸을 돌려 도망치고만 싶은데, 남자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이 하얀 눈을 적시고 있었다.
“…….”
허공에서 눈송이는 떨어져 내리고… 남자의 모습이 핏빛으로 번져 가고… 여자는 고요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막막한 어둠 속엔 도와줄 이 아무도 없었다. 여자의 얼굴에 울음 빛이 일렁거렸다. 격정이 몰려들었다. 달아나고만 싶은데….
갈등하고 번민하다 그러나 여자는 탄식을 하며 다시 남자를 보았다. 눈앞이 부예졌다. 진동하는 가슴을 누르고 결국 남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발….
또 한 발….
조금 거리를 두고서 목을 길게 빼 그를 살폈다. 부러지고 꺾인 화살들, 빛나는 장검, 생경한 옷차림과 흐트러진 긴 머리칼… 그리고 손가락에 걸려 있는 가느다란 은실과 그 실에 달린 동그란 방울이 보였다. 여자의 눈빛이 혼란과 두려움으로 넘실거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영화라도 찍다 온 배우인가.
널을 뛰는 심정을 붙들고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서서히 몸을 낮추고 겁먹은 모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기….”
심장이 와르르 떨렸다.
“저기요….”
남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여자는 울음을 꾹 참고 파르라니 떨리는 손을 길게 내밀어 남자의 팔을 만졌다.
“저기요… 정신….”
미동도 없었다. 손끝으로 몸을 흔들자 박혀 있는 화살대가 함께 흔들렸다. 주체할 수 없는 두려움에 울음이 새어 나왔다.
“제발… 정신….”
손끝에 피가 묻어났다.
“정신 차리세요… 제발….”
밤하늘 멀리서 아련히 성탄절 찬송가가 들려오고 눈송이는 하나둘 무성한 함박눈으로 화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보세요…!”
뜨겁게 눈물이 쏟아졌다.
#2. 이신
다사다난했던 겨울이 떠나고 있었다.
세상을 온통 하얗게 채색하던 함박눈의 기억은 이제 초봄의 햇살에 밀려나고 있었다.
대학교 교정의 너른 호수.
오리들이 유유히 노니는 수면 위로 햇살이 빛나고, 흰 구름이 떠가는 하늘엔 잔설이 반짝거렸다. 호수 너머의 커다랗고 네모난 건물들이 반사광으로 눈부셨다.
가로등에서 흘러나오는 생경한 음악이 바람을 타고 떠다니는데….
긴 머리 남자는 호숫가의 벤치에 앉아 그 풍경들을 투명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낯선 세계의 괴리한 모습들… 꿈이라면 너무도 생생한 꿈… 대체 이곳이 어디인지… 정말 꿈속인 건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
나래가 두 손에 따끈한 커피 두 잔을 들고 왔다. 그의 옆자리에 앉아 헤이즐넛 향이 피어나는 하얀 종이컵을 내밀었다.
“여기….”
“…….”
둘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따뜻하고 향기로운 커피를 마셨다. 호수 위를 느릿하게 흘러가던 오리들이 그 향기에 끌려 고개를 돌렸다.
나래는 헤이즐넛 커피를 마시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음이 불안정하면서도 설렜다. 신비로운 그는 헤이즐넛 커피가 마음에 드는가 보았다.
나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조심히 돌아보았다. 가슴이 도근도근 설렜다. 말도 하지 못 하고, 글도 읽지 못하고, 그날을 생각하면 여전히 비현실적이기만 한 그는 대체 어느 곳에서 왔을까.
이따금 생경한 언어로 혼잣말을 하거나, 그의 가슴속에 숨어 있는 네모난 은방울이 희미하게 소리를 내면 그의 눈빛도 따라 어지러이 흔들리곤 했는데….
‘꿈이라면… 정말 꿈이라면… 언젠가는 깨겠지….’
그런 심정으로 나래는 꿈만 같은 헤이즐넛 커피를 마셨다.
반짝이는 햇살 속으로 그윽한 향기가 말할 수 없이 좋았다.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래….”
나래는 움찔하며 그를 보았다. 그가 또 이름을 불러 준 거였다.
“네? 왜요?”
그가 텅 빈 컵을 내밀었다.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그의 시선에서 헤이즐넛 향기가 났다.
나래는 상기되듯 활짝 웃었다.
“얼마든지요. 그럼요. 얼마든지. 얼마든지.”
나래는 벌써 카페에 뛰어갔다 온 듯 숨이 가빴다. 모든 게 여전히 꿈만 같고 또 알 수 없는 심정이 나울거리지만 기쁨은 또 이렇게 생생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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