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미호에 홀린 나그네

환자는 의사만 믿고 수술대에 오른다.

내가 뭐라고. 내 어딜 믿고?

그저 돈 많이 벌자고 시작한 일이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건지.

“교수님, 빨리 마무리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더 끌면 BP(혈압) 떨어집니다.”

“아, 응. 그래.”

수술실에서 멍을 때리다니. 나는 역시…….

‘돈에 미친 것, 대체 언제 그만 둘 거냐? 쯧! 이 인간 말종 쓰레기 새끼야!’

“이 인간 말종 쓰레기 새끼.”

그녀의 중얼거림 하나에 수술실 안 모두가 토끼 눈을 떴다. 모두의 주목에도 그녀는 덤덤히 손을 움직여 수술을 마무리했다.

XX 대학 병원 1층 카페테리아. 교수와 주오를 제외한 GS 외과 전원이 카페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대화 주제는 정연주 교수의 수술실 욕설 썰.

학벌부터 실력, 외모까지 완벽한 정 교수님께서 욕설을? 단연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주제였다.

“그래서, 정 교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다고?”

“인간 말종 쓰레기 새끼.”

경청하고 있던 이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말도 안 돼.”

“너무 섹시했겠다. 욕하는 정 교수님이라니!”

“아, 그 수술 내가 들어갈 걸!”

황홀한 표정으로 감탄하던 이들 사이에서, 조용히 커피만 마시던 예빈이 물었다.

“그런데 왜 욕을 하신 거야? 수술이 잘 안 풀려서?”

“이유야 뭐겠냐.”

“뭔데?”

“병원장실을 수술실보다 더 많이 들어가시잖냐. 매번 별일도 아닌 것 가지고 가루가 되도록 까이시는데. 아무리 강철 멘탈이라 한들, 몇 년간 이어진 가스라이팅은 못 버티지.”

“아휴, 정 교수님께서 우리가 못하는 말들 늘 교수님께서 총대 메주셔서 너무 편하고 좋았는데.”

빨대 끝을 잘근잘근 씹던 예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교수님 나가시면 우리 병원은 끝이다.”

테이블에 앉아있던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옳다 그르다 꼭 짚고 넘어가야 하고, 해야 할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 하는 성격은 우리한테나 사이다지, 윗분들한텐 눈엣가시겠지.”

“정 교수님은 너무 정의로워서 피곤한 성격이시잖아.”

“그래. 정 교수님이 워낙 기존세긴 하지.”

“기존세? 그게 뭐야.”

“줄임말도 모르냐? 기 존나 세다, 기존세!”

“오, 정 교수님한테 딱 어울리는 말이네.”

자리에 있던 모두가 크게 공감하며 한바탕 큰 웃음을 터뜨리던 그때, 한 남자가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듣는 사람 많습니다.”

이주오. 본 대학 병원장의 귀한 외동아들.

낮게 깔린 목소리와 싸늘한 눈빛은 단번에 그들을 제압했다.

“이, 이 선생님……!”

“아무리 병원이라 한들, 여기가 인턴실이나 랩실도 아니고. 병원 내부에 관한 말은 아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죄송합니다…….”

한편, 화제의 주인공인 연주는 자신에 대해 뭐라 떠들던 교수실에 콕 박혀있었다.

“콜 들어올 때까지만 쉬어야지…….”

간이 소파에 풀썩 누운 그녀는 등허리를 말아 몸을 웅크리곤 눈을 꾹 감았다.

수술 때문에 밥도 못 먹었는데 배가 고프지도 않네.

“인간 말종 쓰레기 새끼.”

수술 내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병원장의 말. 역시 수술 직전에 만나는 게 아니었다. 싹수없다고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더라도 수술 끝나고 만날 걸.

‘돈에 미친 것, 대체 언제 그만 둘 거냐? 쯧! 이 인간 말종 쓰레기 새끼야!’

병원장의 말을 곱씹던 그녀는 작게 중얼거리며 쿠션에 얼굴을 파묻었다.

“뭣 같은 단어들만 모아놨네. 제발 나 좀 그냥 내버려 둬라……!”

똑똑-

절대 그냥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듯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고개를 들기는커녕 연주는 쿠션에 얼굴을 더 깊이 파묻었다.

보나 마나 이주오일 게 뻔하다.

“교수님, 들어가도 될까요?”

뻔뻔한 놈. 답을 듣기도 전에 들어올 거면 노크는 왜 하는 걸까.

“이미 들어와 놓고 뭘 물어.”

연주가 새침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주오는 피식 웃으며 테이블에 가져온 음료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가 이렇게 눕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을 텐데요. 허리에 안 좋다고요.”

“또, 또 잔소리. 아주 지긋지긋하다.”

주오는 그녀의 어깨를 돌려 바른 자세를 잡아주었다.

“선배 이렇게 누워있는 모습이 더 지긋지긋해요. 허리도 안 좋으면서, 매번 그렇게 말을 해도 이러시네요.”

그가 작게 툴툴대자 그녀는 여태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떠 그를 바라봤다.

“소름 돋네. 다른 애들 앞에서 하는 것처럼 해. 왜 자꾸 내 앞에서만 연기야.”

“연기라뇨. 제가 언제 선배 앞에서 안 이런 적 있나요.”

아무리 병원에 친한 사람이 없다한들, 이주오가 병원에서 어떤 평판인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소시오패스. 말로 뼈를 때리다 못해 촌철살인을 낸다고 명성이 자자한 이주오.

연주가 머릿속으로 냉철한 주오를 상상하고 있을 때, 그는 말없이 그런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5년째 보는데도 당최 모르겠다. 모르겠어.

사랑을 귀찮아하지만 애정을 갈구하고, 자신의 마음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또…….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나한테 미안해하진 마라.”

둔하고 착해서 짜증 나는 여자.

내가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떤 짓까지 벌이고 다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뭐? 미안해하지 말라고?

“내가 왜 미안해할 거라 생각하지. 우리 아빠가 병원장이라? 선배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나서?”

정신 나간 새끼. 왜 자기가 성을 내?

연주가 미쳤냐는 듯 바라보자 그는 굳혔던 표정을 풀고 슬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요.”

“사과 다음은 이민?”

“이번엔 프랑스. 어때요?”

“돈 많은 놈이라 그런지 고백도 참 특이해.”

실소를 터뜨리는 그녀를 빤히 보던 그는 그녀의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빤히 얼굴을 보다 머리칼을 매만지는 것. 5년이란 시간이 낳은 오랜 습관이었다.

나한테 오면 편할 텐데.

그녀의 머리칼에 손을 댈 때마다 가슴 깊숙이서부터 정복욕이 끓어오른다.

“선배는 왜 그렇게 살아요?”

느닷없이 인생 비하? 어이가 없는 나머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넌 욕까지 신박하게 한다?”

“돈 많고 어린 내가 한평생 먹여 살리겠다는데. 왜 마다하는지 이해가 안 돼요.”

“아, 너 진짜 재수 없다.”

“병원 관두고 같이 해외로 가요. 선배가 원하는 곳으로.”

꾹 다문 입술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또 까이는 건가.

“네 번째 고백인 거 알죠?”

“그럼 난 네 번째 거절이겠네.”

“이유라도 말해줘요.”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 그거 착각이야.”

착각? 그래. 처음엔 사랑이었다 한들, 5년이나 되니 이제 오기가 된 것 같기도.

내게 오는 당신 모습을 꼭 봐야겠어. 결국 나밖에 없었다며 우는 얼굴, 그 예쁜 얼굴을 봐야겠다고.

지속되는 침묵과 눈맞춤 끝에 연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님 뭐, 나랑 자고 싶어서 이래?”

“그, 무슨…….”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게 여간 자극적인 게 아니다. 하긴 이 얼굴, 몸매에 쿨한 마인드면 그 어떤 놈이 안 넘어오겠는가.

하지만 난 그런 저급한 놈들과 달라. 난 단순히 욕정에서 끝날 게 아니거든.

하룻밤 불장난이 아니라, 당신이 온전히 내 품에만 안겼으면 좋겠어.

“그런 류의 욕구였으면 5년 안 끌었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저는 애인 아닌 사람이랑은 안 자요.”

그의 말을 가만히 듣던 그녀는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왜? 사귀네 마네 관계 정의 내리는 게 더 귀찮지 않나.”

말을 잇던 그녀는 테이블을 쓱 훑고 인상을 찌푸리더니 주오의 손에 들린 아메리카노를 뺏어들었다.

“사랑을 할 자신은 없지만 몸은 외롭지. 연애는 싫고 관계는 좋아.”

빨대를 입에 문 채로 말하느라 짓눌린 입술을 한입에 삼켜버리고 싶다.

5년간 정연주는 내게 아무렇지 않게 몸을 맡기고, 내가 입을 댄 빨대를 물고, 긴장감 하나 없이 나를 마주해 왔다. 그렇게 여지는 다 줘놓고 고백하면 거절하는 게 야속했던 참이었는데. 그냥 ‘연애 싫어 관계 좋아’였다니.

밀려드는 허무함에 작게 헛웃음을 치며 고개를 떨구었다.

“사 올 거면 두 개 다 아메리카노로 사 오지.”

그녀의 타박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어 순식간에 그녀의 손에 들린 아메리카노를 빼앗았다.

“커피 하루만 안 마셔도 머리 아프다면서요. 그거 카페인 중독이에요.”

딸기 라테를 연주의 손에 쥐여 준 그는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나랑 사귀지는 못해도 잘 수는 있다?”

딸기 라테를 쪽 빨아들인 그녀는 달큰함에 눈살을 찌푸렸다.

“할 수야 있지만 하고 나면 지금처럼은 못 지내. 난 한 번 잔 사람이랑은 다시 안 만난다는 나름의 철칙이 있어서.”

“철칙을 세운 이유는?”

“보다 보면 정들어. 몸 나누고 정까지 들면 나중에 힘들어지잖아.”

“정? 왜. 사랑이라도 하고 싶어지나?”

연주는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빨대를 휘젓는 속도가 점차 느려진다. 길게 뻗은 그녀의 손가락을 빤히 바라보다 입을 뗐다.

“그 철칙에 예외는?”

“평생 없어.”

하고 싶다. 평생 없을 거라 단언하는 그녀의 예외가 되고 싶다.

주오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가기 직전 우뚝 멈춰섰다.

“선배, 도망쳐도 돼요. 되도록 제 쪽으로.”

연주가 미간까지 찌푸려가며 그의 말을 곱씹는 사이, 그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도망이라니. 왠지 조금만 더 생각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굳이 알아내고 싶지는 않아 생각을 멈췄다.

자기 쪽으로 도망치라니. 저질…….

어느새 아메리카노를 전부 마셔버린 그녀는 남은 각얼음 하나를 와작 씹으며 중얼거렸다.

“아니지. 대뜸 자고 싶냐고 물은 내가 저질인가.”

***

“교수님! 병원장님 호출이요.”

“교수님, 병원장님…….”

“교수님, 병원…….”

소파에 누우려던 연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하루 네 번. 밥도 세끼를 다 못 먹는데 병원장과 하루에 네 번씩 만나고 있다니.

텅 빈 눈으로 일어난 그녀는 자신을 데리러 온 인턴에게 다가가 초콜릿을 쥐여 주었다.

“네가 무슨 죄니. 고생이 많다.”

“아니에요. 교수님이야말로……. 파이팅입니다.”

연주는 대답할 기력도 없는 듯 손을 대강 휘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병원에 누가 되지는 말아야지. 어린 것이 교수돼서 설친다고 학계에 난리가 났을 때 널 감싸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

“저는 이 병원에서 의료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안쓰러울 정도로 지쳐 있었다.

“그냥 좋게 넘어갈 수는 없었니? 동료 교수 의료 실수 정도야, 그간의 정을 봐서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거잖아. 그걸 환자도, 보호자도, 외부인도 아닌 네가 왜 들춰서 이 사달을 만들어?”

“잘못된 일을 잘못 됐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말이 안 통하는구만. 너 언제까지 이 바닥에서 살아남나 보자.”

“곧 회진 시간이라. 죄송하지만,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꺼져!”

연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맞는 건 맞고 틀린 건 틀렸다고 말했을 뿐이다. 근데 내 잘못이라니? 진실을 입에 올린 것이 잘못 된 건가.

됐다. 이제와 고민한다고 해서 뭔가 해결되기라도 하나? 이미 미운털 단단히 박혔는데.

“선배?”

주오가 멍하니 걷던 연주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

“계속 불렀는데. 못 들었어요?”

이주오, 네가 왜 여기…….

“아, 너도 호출?”

주오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 수고해.”

그녀는 힘없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지나쳤다. 축 쳐진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그는 다시 몸을 돌려 병원장실로 향했다.

그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정연주가 곧 내게로 도망친다.

한편, 병원장과의 힘겨운 면담을 끝낸 연주는 회진 도중 진상을 상대하고 있었다.

“환자를 이렇게 방치하면 어떡해!”

흔한 일이다. 수술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안한 보호자의 걱정. 이제 익숙하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힘들지.

“전에 말씀드린 대로, 수술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추후 경과를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고요. 수술은 무사히 끝났으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 말만 몇 번째야! 애가 저렇게 아프다는데!”

연주는 환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척 봐도 진짜 아픈 게 아니라 투정이었다.

작게 한숨을 쉰 그녀가 입을 뗐다.

“현재 김건영 환자 분은 후유증 하나 없으신 상태고요. 수술 후 미세한 통증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진통제 투여는 원하실 때마다 해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어머, 한숨? 지금 한숨 쉬었죠? 이거 의사 맞아? 환자가 아프다는데 한숨이나 쉬고 말이야!”

옆에서 보다 못한 간호사가 중재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