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I’m calling you

격렬한 아픔은 불처럼 소멸해 버린다. 악몽은 현실이 아니다. 조바심 낼 필요는 없다. 불면증 걸린 밤 시곗바늘의 냉담한 움직임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이런 아픔이 무뎌질 날이 오긴 하겠지만 시간이 필요하다. 혼란스럽고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지만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긴 채 눈을 감는다. 시계는 거침없이 움직이고 어김없이 태양은 지고 달은 차올랐다. 은아의 악몽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나면 선명했던 꿈은 깊은 안개 속으로 사라져 언제나 아련함만 남았다. 또 그렇게 그녀는 기억 저편에 중요한 것을 두고 온 것만 같은 불안한 마음 한켠에 묻어두고 밝은 표정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고은아의 영화음악입니다. 모두 잠든 이 새벽에 우리 고영음악 가족들은 영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지요? 어제 하루 열심히 달려 새로운 오늘을 준비하는 고영음악 가족들을 위해 경쾌한 노래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영화 베니와 준에서 나온 I’m gonna be 500 miles입니다.”

영화전문 라디오 프로그램 아나운서 고은아. 그녀는 갓 스물을 넘은 듯 앳된 얼굴이지만 벌써 서른한 살의 베테랑 아나운서였다. 은아의 경쾌한 목소리의 멘트와 강한 비트의 음악은 새벽 1시의 적막함을 기분 좋게 깨웠다. 사실 은아의 목소리는 굳이 주의 깊게 듣지 않아도 위로를 전해주는 목소리였다. 잠들어 있든, 깨어 있든 간에 누구에나 따스함을 스며들게 했다. 출구 없는 혹독한 세상사에서 영화와 음악을 통해 삶의 쉼표를 찍는 영화광들에게 은아의 라디오는 다정한 친구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오늘 화요일은 [쉽게 풀어보는 미술사] 시간입니다. 영화와 미술은 서로 때어 놓으려고 해도 떼어놓을 수가 없죠. 그래서 저희가 한 달 전부터 야심차게 준비한 코너입니다. 한국대학교 미술사학과 미남교수님이시죠. 신이수 교수님과 함께 하는 미술을 통해 바라본 영화 보기. 곧 시작하겠습니다. 잠시 광고 듣고 오겠습니다.”

라디오 부스에 들어오자 이수의 눈에 그녀가 보였다. 태양계에서 가장 눈부실 것 같은 그녀가 그를 보고 활짝 피어난 모란꽃처럼 웃었다. 그녀는 영화와 영화음악을 좋아하는 정도를 넘어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인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의 미모와 지성이라면 TNB 방송국의 메인 프로그램에서 충분히 활동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영화음악이 좋아 힘들다는 심야방송을 자진해서 맡았다.

“어서 오세요. 교수님.”

헤드셋 한쪽을 벗은 뒤 큰 눈망울을 찡긋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그녀를 보자 이수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네.”

아마도 그녀의 눈에 비친 이수의 모습은 마치 방송하러 온 것이 불만인 사람인 듯 잔뜩 굳어진 입매와 표정이었을 것이다.

심야 방송이기에 몇 개 안되는 라디오 광고가 지나는 사이 이수가 방송실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은아가 가벼운 눈인사와 함께 일포스티노의 메인음악이 잔잔하게 흘렀다.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영롱한 푸른 바닷가를 경쾌하게 달리는 자전거의 움직임이 그려지는 영화. 이수는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 마치 예전에 간절히 누군가에게 편지를 썼던 것 같은 착각이 들어 마음이 애달파 왔다. 이수는 잠시 두 눈을 감고 음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은아는 그런 이수를 잠시 바라보았다. 매번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 남자는 차가움 속에 그윽한 부드러움이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묘한 매력을 가진 사람이다. 신이수. 그는 서른여섯의 차갑고 재미없는 표정의 남자였지만 은아에게는 궁금증을 일으키는 남자였다.

“오늘도 지난주에 이어 신이수 교수님께서 함께 해주셨습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네, 안녕하세요. 신이수입니다.”

그녀를 만나는 것은 언제나 신나는 일이지만 진심으로 영화를 좋아하고 두 눈을 반짝이며 영화음악을 설명하는 은아의 모습은 오늘 더욱 눈부셨다.

“교수님. 지금 나온 음악 어떻게 들으셨나요?”

“다행히 제가 좋아하는 음악이 나와서 드릴 말씀이 있네요. 일포스티노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파블로 네루다와 관련된 영화로 유명한 헐리우드 배우들이 네루다의 시를 낭독한 OST로 유명하지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는데 이렇게 자세히 설명해 주시니 놀라운데요.”

순간 은아는 이수의 막힘없는 대답에 잠시 멈칫 했지만 그의 차분한 대답에 미소를 지으며 멘트를 이어 나갔다.

“교수님 덕분에 지중해의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아름답고 낭만적인 시낭송이 들려오는 것 같네요. 오늘 교수님께서 어떤 미술작품과 영화이야기를 준비해 오셨는지 더욱 더 기대가 되는데요?”

이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황금빛 미소를 띤 채로 은아는 손을 펴서 이수의 다음 멘트를 안내했다.

“예. 제가 오늘 준비한 내용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세종대왕과 관련된 영화와 드라마가 많이 만들어지고 있죠. 그래서 세종대왕 시절의 미술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세종대왕 시대라면 모두가 알고 있듯이 한글이 만들어지고 문화의 황금기로 조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대였잖아요.”

“예. 맞습니다. 문화, 과학, 예술 전반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세종대왕 시기에 그려진 몽유도원도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몽유도원도라 하면….”

몽유도원도란 이름을 들은 은아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서늘한 공기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아 두 팔을 어색하게 모아 껴안듯이 팔을 둘렀다.

“안견이 그린 그림입니다.”

“안견이요?”

“조선 초 도화원 화가인 안견이 그린 그림으로 몽유도원도라는 제목처럼 꿈속을 그린 그림입니다. 세종대왕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안견이 화폭에 옮겨놓은 작품입니다.”

이수는 마치 눈앞에 화폭을 확대시켜 손으로 만지며 설명하듯 황홀한 그림을 자세히 설명했다.

“안평대군은 왕자의 신분이면서도 뛰어난 문인이었기에 당대의 문인들과 활발히 왕래했습니다. 몽유도원도가 완성된 시점에서 신숙주와 같은 뛰어난 문인들이 그림에 대한 찬시를 짓기도 했습니다.”

“그렇군요. 대단한 작품이네요.”

“몽유도원도의 작품성이야 많이 알려진 내용이고, 오늘은 몽유도원도의 수난에 대해 이야기 해드리려 합니다.”

“네. 그럼 이번 시간은 미학적인 측면보다는 역사라는 단어에 포인트가 있겠네요. 그러고 보니 일전에 교수님의 전공분야가 몽유도원도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은데요.”

이수는 은아의 모습을 거울처럼 따라하듯 어색하게 두 팔을 모아 팔을 둘렀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아득한 현기증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손가락 하나만 뻗어도 닿을 거리에 있는 그녀에게 수줍은 자신의 모습이 들키지 않도록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전공이라기보다는 박사논문 주제가 몽유도원도였습니다. 몽유도원도의 수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써 지금 이 작품이 있는 곳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은아 씨께서는 몽유도원도가 지금 어디에 있는 아십니까?”

은아는 최대한 빨리 생각해 내기 위해 검은 눈동자를 위로 찡끗거리며 고민했지만 알 수가 없었다.

“조선시대 안평대군의 꿈을 안견이 그린 그림이니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을 것 같은데요?”

“저도 그랬으면 너무 좋겠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지금 일본 덴리대학에 있습니다. 어떻게 일본까지 가게 된 것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일본에서 국보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슬픈 일이네요. 그렇게 귀한 그림이 일본에 있다니 너무 안타깝네요.”

“슬픈 일을 넘어 화가 나는 일이지요.”

은아는 서글픈 역사적 사실에 안타까움을 애써 진정시키며 쾌활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이수는 몽유도원도 이외에도 무수히도 많이 빼앗기고 망가진 우리나라 문화재의 현실에 대해 말을 전하며 코너를 마무리했다. 이수는 방송실에서 나와 벽 쪽 의자에 앉아 유리 너머 은아를 바라보며 그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방송시작 하기 전 은아는 차가 없는 이수에게 집이 같은 방향이라며 태워주겠노라 기다리라고 하였다. 이수는 그녀와 함께 집으로 향할 생각에 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무던히 애써야 했다. 어느덧 방송국 시계가 밤 1시 50분을 가리켰다.

“오늘 하루도 우리 음악방송 가족 분들, 힘찬 하루를 보내시길 바라며 저 고은아 인사드리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다 잘 될 거예요!”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엔딩 멘트가 흐르며 방송은 끝났다.

“수고했어요. 은아 씨.”

“네, 김 피디님, 노 작가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동료들에게 인사를 마친 은아가 이수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을 지쳐보였지만 이수에게는 서둘러 쾌활하게 다가왔다. 아무리 영화와 음악을 좋아한다 하여도 매일 늦은 밤까지 방송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는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서 어김없이 자신의 일을 해왔다.

“오래 기다리셨죠. 제가 괜히 태워드린다고 했나 봐요.”

“아닙니다.”

이수는 은아를 따라 라디오 방송국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지친 하루 끝에도 눈부시게 빛나는 그녀를 닮은 하얀 승용차가 꼼짝 않고 주인을 기다렸다. 이수는 은아를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미인도 속 여인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군.’

아마도 신윤복이 지금 이 자리에 있다면 은아의 처연하게 아름다운 모습에 미인도의 주인공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녀와 함께 퇴근을 하게 된 상황으로 인해 이수는 순식간에 세상에서 엄청난 행운을 차지한 사내가 된듯했다. 자신이 이런 기회를 누릴 자격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떨림을 그녀에게 들키지 않으려 조용히 조수석 자리에 앉았다.

은아는 습관적으로 오디오의 영화음악 OST를 틀었다. 영화 바그다드 카페의 [I’m calling you]가 흘러 나왔고 새벽과 어울리는 창백하고 몽환적인 공기가 은아와 이수를 둘러쌌다. 그녀의 삶은 온통 영화음악이었으며 나른하고 지친 표정의 그녀였지만 이수에게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매일같이 늦은 새벽 시간까지 방송하는 일과가 힘들지는 않으세요?”

“힘들다니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그리고 원 없이 영화음악을 듣고 있으면 제가 복이 많은 사람이구나 생각해요.”

“저도 미술을 좋아하긴 하지만, 은아 씨만큼의 열정은 가지지 못한 것 같아요.”

“교수님은 저보다 더 뜨거운 열정을 지니신 것 같은데요. 신 교수님과 방송을 같이 하면서 제가 늘 생각했던 건데요. 미술에 대해 이야기 하실 때 교수님의 눈이 너무 매력 있으세요. 저는 똑똑히 보았어요. 제가 범접할 수 없는 열정을 가지신 분이구나!”

“제가 그런가요.”

이수는 한숨이 나왔다. 학교에서 냉혈한이란 별명의 이수이지만 은아와 함께 하는 시간들은 이수가 미술에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다행히도 그녀에겐 들키진 않았지만 이런 자신이 한심하여 이수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었다. 새벽 도로는 서울 한복판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한산하여 여유로움을 넘어 평온함까지 느껴졌다.

“교수님. 집에 빨리 가셔서 쉬셔야 하는데, 제가 괜히 모셔다 드린다고 해서 번거롭게 해드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절대 아닙니다! 절대!”

은아의 이야기를 강하게 부정하며 이수가 손을 들어 휘저었다. 순간 그의 손이 그녀의 뺨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찰나의 순간, 그녀의 살갗은 부드럽고 따스했으며 매끈거렸다. 이수는 자신의 손가락을 맞잡으며 불규칙한 심장박동이 경련을 일으키지 않도록 심호흡을 했다.

“이런, 죄송해요.”

은아는 자신의 뺨에 그의 손이 닿는 순간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당황해하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녀는 쾌활하게 웃으며 자신의 뺨을 쓰다듬으며 그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미안해하시지 않아도 돼요. 교수님. 너무 재미있는 분이세요. 훗.”

“은아 씨와 함께 퇴근하는 게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어차피 저와 방향이 같으셔서 말동무도 하고 좋아요.”

“참, 교수님. 아까 방송 중에 말씀 하셨던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안평대군의 꿈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셨죠?”

“네, 그런데 그건 왜….”

“꿈이라고 해서 다 같은 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도 악몽을 자주 꾸거든요. 교수님도 꿈 자주 꾸세요?”

은아의 질문에 이수가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저는 머리만 땅에 닿기만 해도 잠이 들어서요. 하하.”

“좋으시겠어요. 저는 어릴 적부터 꿈을 자주 꾸는데 항상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거든요.”

은아의 말에 이수가 궁금한지 무슨 내용인지 물었다.

“무슨 꿈이기에 식은땀까지 흘릴까요?”

“저도 그게 궁금해요.”

“네?”

은아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도무지 생각이 안나요. 꿈을 꿀 때는 가슴이 너무 먹먹하고 아픈데, 꿈에서 깨고 나면 전혀 기억이 안나요.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것 같은 속상함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군요. 은아 씨가 힘들겠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니구요. 이제 익숙해져서요. 그냥, 이제는 꿈 내용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반복해서 같은 꿈을 꾸는걸 보면 저에게 의미 있는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서요.”

“은아 씨가 답답하겠어요. 하긴, 안평대군도 꿈 내용을 잊지 않기 위해 안견에게 명을 내려 그림으로 남겨 놓았죠. 꿈이라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 구름처럼 흩어져 사라지니까요.”

“구름처럼 흩어져 사라진다…. 좀 서글프네요.”

은아의 대답에 이수가 걱정스러운 듯 쳐다보았다.

“은아 씨가 오늘 밤은 잠을 잘 자야 될 텐데요. 걱정이네요.”

“아뇨! 괜찮아요. 괜히 말씀드렸나 봐요. 헤헤!”

이수는 집 앞에 도착한 것도 모른 채, 오늘만큼은 은아가 단잠을 자길 바라며 어떻게 하면 숙면을 할 수 있을지 고심했다.

“자! 도착했습니다! 교수님!”

“벌써요?”

“네. 도착했습니다.”

집 앞에 도착한 것도 모른 채 이수는 오늘만큼은 은아가 단잠을 취하길 바랐다.

“교수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참, 은아 씨 침실에 커튼이 암막 커튼인가요?”

“암막… 커튼이요? 아니요. 근데 왜….”

“제가 들었던 이야기인데요. 숙면을 위해서는 온도와 습도, 조명 등이 잘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대요. 최대한 쾌적한 환경에서 수면을 취해보세요. 특히 아침 햇살이 은아 씨 수면을 방해하면 안 되니까 암막커튼으로 바꿔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은아 씨.”

순간 이수의 표정이 수면 전문가처럼 진지하고 심각해져서 은아는 웃음이 났다.

“하하. 네. 알겠습니다. 교수님.”

“예. 가볼게요.”

은아는 그 짧은 사이에 암막커튼을 생각해서 이야기 해주는 이수의 모습을 보며, 무뚝뚝한 차가움 속에 그의 따스한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아 반갑고 고마웠다.

반면, 이수는 은아의 승용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어정쩡한 자세로 움직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고작 생각해낸 게 암막커튼? 흠….’

하지만 은아는 자신의 싱거운 말에도 화사한 미소로 대답해 주었다. 이수는 은아의 불편함을 제대로 해결해주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한심한 놈.’

이수는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집은 하나의 서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벽면에 책이 꽂혀 있었다. 그는 늘 그렇듯 불 꺼진 집에 혼자 들어와 아무렇게나 외투를 소파에 던져 놓았다. 적막함은 이미 그에겐 익숙한 하루의 마침이었다. 샤워를 마친 이수는 텅 빈 냉장고에서 캔맥주 하나를 가지고 와서 입에 털어 넣었다.

“아! 맞아. 암막커튼!”

이수는 핸드폰을 꺼내 암막커튼을 검색해 보았다. 생각 외로 밝은 색상의 다양한 암막커튼이 많았다. 생전 해보지도 않았던 인터넷 쇼핑을 하려니 어색하고 불편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인터넷으로 카드 결제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지만 맥주 때문인지 온몸에 피로가 엄습했다.

“암막 커튼 하나 사야하는데…, 흠….”

암막커튼 검색을 하던 이수는 핸드폰을 손에 든 채로 소파에 앉아 잠이 들었다. 잠든 이수는 잠결에 아주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그것도 정말로 깨어나고 싶지 않은 그런 꿈. 바로 은아와 함께 몽유도원을 거닐며 행복하게 웃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꿈속의 몽유도원, 복숭아 꽃 어여쁘게 핀 언덕에서 그의 사랑을 듬뿍 받은 은아의 두 눈이 빛났다. 그만을 위해 활짝 피어오른 그녀를 바라보는 이수의 마음은 행복감으로 가득 차올랐다. 이수의 두 눈에 고인 은아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었다. 단아한 비단 저고리와 오색치맛자락이 그녀의 가녀린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녀는 세상의 것이 아닌 미소를 그에게 지어주었다. 그렇게 꿈속에서 이수와 은아는 억겁의 시간이 흐를 때까지 부드러운 바람결 타고 행복한 산책을 했다. 물론 아침에 되어 꿈은 모든 것이 사라지겠지만 꿈을 꾸면서도 이수는 은아와 자신의 얼굴에 흐르는 미소가 흩어지지 않도록 두 팔 가득 은아를 껴안았다. 아침이 되어 태양의 바람결이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겠지만 꿈속에서만이라도 이수는 은아와 영원히 함께 하고 싶었다. 꿈에서 깨기 싫었던 그는 그렇게 불편한 소파에서 아침을 맞았다.

***

다음날 아침. 소파에서 불편하게 잠을 자서 그런지 이수는 온몸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아 최대한 얼굴을 쿠션에 파묻었다.

‘띠리링~ 띠리링’

출근을 알리는 알람. 알람을 꺼 놓고 잔다는 것이 그냥 잠들었나보다. 원하는 시간에 정확하게 울리는 알람처럼 인생도 모든 것이 정확하고 확실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순간하며 이수는 잠에서 깼다. 

오전수업이 없는 일정이라 오랜만에 늦잠을 잘 생각이었지만 어김없이 울리는 알람과 소란스러운 바깥 소리에 이수는 할 수 없이 눈을 떴다. 아마도 옆집으로 누군가 이사를 오는가보다. 

‘늦잠 한 번 자기 힘들군.’

짐 옮기는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란스러움에 그는 한숨을 쉬었다. 

어쨌거나 잠에서 깬 그는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텅 비어있는 냉장고에는 생수병 하나가 뒹굴거렸다.

‘처량하군.’

마치 이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냉큼 생수병을 낚아 챈 뒤 냉장고 문을 닫았다.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거실을 차지하고 있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

‘빈속에 먹을 게 물밖에 없다니.’

서른여섯이나 되도록 여자 친구 없이 처량하게 홀로 아침을 맞이하는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처량해서 짜증이 올라왔다. 현관문 밖에서는 짐 옮기는 소리가 가까이 들리는 것이 매우 소란스러웠다.

‘옆집으로 이사 오는가 보군.’

솔직히 그는 더 자고 싶어 좁은 소파에 몸을 둥글게 말아 더 자려고 뒤척였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한 번 깨버린 잠은 떠나간 연인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지금껏 떠나보냈던 연인은 없었지만 아주 오래전 누군가를 떠나보낸 것 같은 착각은 가끔 들긴 했다. 고전문학을 너무 심취해서 읽어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아무튼 늦잠 자는 것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늦게까지 자려 했는데…. 어쩔 수 없지.’

라디오 방송과 늦은 귀가로 그는 충분한 수면이 필요했지만 더 이상 자리보전하고 누워있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소란스러운 문 밖의 소리는 젊은 여자와 중년의 여자가 싸우는 것 같은 목소리로 변해있었다.

‘엄마와 딸인가 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