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날밤을 보내고 마주친 건…

“으….”

술 때문에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지안이 눈을 떴다.

어젯밤 내내 바라봐서 그다지 낯설지만은 않은 천장이 지안을 마주했다.

“하.”

입김을 불어 술 냄새가 나지는 않는지 확인했다.

괜찮다.

그야, 술은 잘하지도 못하니까. 소주 한 잔만 마셔도 다음 날 머리가 아프고 속이 미식거리는 게 그녀였다.

어제는 도수 낮은 칵테일 한 잔만 먹었을 뿐인데도 머리가 아팠다. 아픈 건 머리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뻐근했다.

지안은 아직 누워 몸을 뒤척이며 어젯밤을 회상했다.

‘그 칵테일, 엄청 맛있었는데.’

지안은 눈을 감고 그 맛을 되뇌어 보았다.

지금 음미하고 있는 것은 칵테일의 맛이 아니라 어젯밤의 여흥이었다.

‘누군가 나를 신경 써 준다는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어.’

그녀는 팔을 내밀어 옆에 있을 세현을 찾아 더듬거렸다.

탁.

세현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피곤할 만도 하다. 야근하다 그렇게 밤을 보냈는데, 몸이 성하다면 강철이나 다름없겠지.

‘운동을 많이 하는 것 같아 보이는 몸이었는데, 의외네.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서 운동한다더니, 순 거짓말인 거 아냐?’

세현은 지안의 부하 직원이었다. 입사한 지 이제 반년이 지난 그녀의 부사수는 말이 없이 조용한 편이었다.

조용이라기보다는 과묵하다는 편이 어울리겠다.

그가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한 얼굴일 때면 부장도 눈치를 볼 정도로 카리스마가 넘쳤다. 신입의 분위기라고는 없는 모습이랄까.

일도 곧잘 해내곤 했다.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아는 남자, 이세현.

모델처럼 쭉 뻗은 키에 어제 육안으로도 확인된 탄탄한 몸매, 잘생긴 얼굴이 그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될 줄, 어제 야근할 때까지만 해도 지안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나저나, 지금 몇 시지.’

핸드폰은 어디로 던져 버렸는지 모르겠다.

‘맞아.’

지안은 눈을 크게 떴다.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주원이한테 자고 간다고 연락 안 했다.’

주원은 지안의 열 살 어린, 체대 입시를 준비하는 열아홉 살짜리 동생이었다.

키는 지안보다 훨씬 크지만, 지안은 어릴 때부터 주원을 혼자 돌봐 왔던 기억 때문인지, 아직도 그녀를 어린아이 취급하곤 한다.

‘창문 사이로 새는 빛을 보면 아주 대낮은 아닌 것 같고, 아홉 시 정도?’

핸드폰을 찾기 위해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만 머리를 지배할 뿐, 좀처럼 쉽게 몸이 일어나지질 않았다.

잠을 푹 잤는데도 온몸이 쑤셨다.

세현이 돌아누우며 지안에게 팔을 툭, 올려놓았다. 지안은 그의 잠든 얼굴을 감상했다.

‘콧대가 어떻게 저렇게 생길 수가 있지?’

보면 볼수록 완벽한 얼굴이다. 지안은 세현의 머리카락을 살짝 쓸었다.

일어나려는 생각도 멈추게 하는 얼굴이다.

흐트러진 머리와 잘생긴 콧대. 무방비한 입술. 지그시 감은 두 눈의 속눈썹은 지안의 것보다 길지도 모른다.

부하 직원일 때의 세현과, 이런 사적인 장소에서의 세현은 다른 사람 같았다.

회사에서의 그는 뭐랄까, 신입 사원답지 않은 카리스마를 가졌다면 사적인 곳에서의 세현은, 그 카리스마 사이의 수줍음을 보여주는 느낌?

눈을 감은 세현을 보며 어제의 얼굴이 겹쳐졌다. 지안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생각을 털어 버렸다.

‘밝히는 것도 아니고! 정신 차려, 안지안.’

세현이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우기도 난감했다.

우선은 그냥 두고 나가도 되겠지?

‘세현 씨 깨기 전에 얼른 나가야지. 놀랄 수도 있으니, 편지 정도는 쓰고 가줄까? …아니다. 너무 오버하는 것 같다. 그리고, 요즘 시대에 무슨 편지, 문자 정도면 되지.’

집에 가서 문자를 보낼 때쯤이면 그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다, 갑자기 덮친 세현의 팔에 저지당했다.

깨지 않게 살금살금 팔 사이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세현은 잠결에 그녀를 더욱 꼭 안아 버렸다. 지안의 등이 세현의 품 안에 들어왔다.

“흠….”

보디 워시 향과 함께 그의 숨결이 닿았다.

지안은 얼굴이 빨개졌다. 밀착한 몸이 따뜻했다. 그의 손길을 뿌리치기 미안할 정도로 포근한 품이었지만, 집에는 기다리는 동생이 있다.

“세현 씨.”

“…….”

묵묵부답이었다. 지안은 그의 눈앞에 손을 흔들어 자고 있는 게 맞는지 확인한 뒤, 그의 팔을 치우고 일어났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방 안 이곳저곳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를 주워 입었다.

그런데, 가방이 없었다.

‘내 가방! 어디 뒀지?’

지안은 눈을 감고 어제 어디에 가방을 내팽개쳤는지 기억해내려 애썼다.

‘현관문 앞이다.’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순식간에 내팽개쳤던 가방이 떠올랐다. 약 3년째 쓰고 있는, 사은품으로 받은 에코백.

옷을 다 갖춰 입은 지안은 살그머니 문을 열었다.

발끝으로 서서 조심스럽게 복도를 걸었다.

‘아니, 무슨 복도가 이렇게 길어?’

어제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세현의 방으로 직행하느라 이렇게 긴 줄도 몰랐다.

주변을 둘러보니, 집 자체도 꽤 큰 크기였다.

‘혼자 사는 집이 이렇게 크다니.’

세현의 방만 해도 지안의 집 크기 정도였다. 이 정도 집은 얼마나 할까? 과연 평생 일을 하더라도 이 집의 방 한 칸 정도 살 수는 있을까, 문득 의문이 들었다.

‘어제 얻어먹은 술값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지안은 집 안을 둘러보았다. 거실에는 딱 필요한 가구만 있을 뿐, 사람이 사는 냄새가 나지는 않았다.

아닌가?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어디선가 풍기는 음식 냄새… 냄새에 이끌려 시선이 부엌에 닿았을 때.

“드디어 일어났군요.”

우아한 중년 여성이 팔짱을 끼고 지그시 지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세요?”

당황한 지안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저 말이 튀어나왔다.

‘분명 혼자 산다고 했는데?’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몸이 굳었다.

마음 한편으로는 옷을 주워 입고 나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일어나자마자 바로 나왔다면… 그건 대참사였을 테니.

차선재 회장은 다짜고짜 누구냐고 묻는 여자를 보며 어이가 없었다. 미국에서 돌아와 얼굴 한 번 보여준 적 없는 아들의 집에 반년 만에 찾아왔더니, 이 집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자신에게 누구냐고 묻는 낯선 여자라니.

자신이 마주한 여자가 세나 그룹의 총수라는 것도 모르고, 지안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누구지? 설마, 세현 씨 어머니…?’

아직까지 지안은 저 여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맨손으로 사업을 일궈낸 아버지를 도와 재계 서열 1위로 끌어올린 장본인.

세나 그룹은 지안과 세현이 근무하고 있는 세나 백화점의 모기업이다.

차 회장의 뒤로 주방 장갑을 끼고 냄비를 옮기는 남자가 보였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냄비를 향했다. 보통 솜씨가 아닌 것 같은 음식 솜씨를 자랑하는 저 남자는 세현의 아버지, 이중건 사장이었지만 지안은 그가 누군지 당연히 알아보지 못했다.

“설마 우리 세현이를 두고 몰래 나가려다 딱 걸린 것은 아니겠죠?”

딱 봐도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차 회장을 보자 지안은 자신도 모르게 위축이 되었다.

누군데 이렇게 카리스마가 넘치는 걸까?

세현 씨가 어머니를 닮았나 보다.

“네? 하하, 설마요. 화장실 좀 가려다가….”

집에 가려던 것은 맞다, 하지만 화장실 가려고 일어난 것은 아닌데.

‘내가 왜 지금 변명을 하고 있는 거지?’

“세현이 방에 화장실이 있을 텐데. 모를 리는 없을 것 같고.”

‘모를 리는 당연히 없다. 어제 두 번 넘게 썼으니까! 저 사람, 눈치 하나는 빠르다. 이것도 세현 씨와 비슷한 면이네.’

이 사장이 오히려 차 회장을 말렸다.

“세현이가 깰까 봐 조심하려던 거지, 여보.”

이 사장이 지안을 돌아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아침, 같이 들도록 할까?”

이 사장은 자신이 정성스레 준비한 아침 밥상을 가리키며 물었다.

악의 없는 이 사장의 제안에 지안은 대답을 머뭇거렸다.

“하하, 그게 말이죠….”

잊지 못할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그 남자의 부모님을 마주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밥을 먹자고 말을 건넬 확률은?

‘거절하고 싶다.’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속이 좋지 않아 밥이 넘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너무나도 불편한 자리다.

“…….”

차선재 회장이 지안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눈치가 보여 일단은 식탁에 앉아야겠다.

저 아저씨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아침을 권한 걸까?

지안은 그들의 생각을 읽으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너무… 좋은 제안이라 생각합니다.”

‘왜인지, 익숙한 얼굴이란 말이야.’

식탁에 앉아 자기도 모르게 앞에 앉은 부부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차가운 인상이 세현을 닮아서일까, 아니면 진짜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걸까.

‘본 적이 있다면 바로 생각났을 법한 익숙한 얼굴인데, 흠. 도대체 어디서 봤지? 아직 잠에서 덜 깨서 그런가?’

차 회장과 눈이 마주친 지안은 시선을 피하려다, 본능적으로 눈웃음을 지었다.

눈을 피하면 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뭐지, 이 면접 보는 것 같은 기분은.’

하필 옷차림도 어제 출근 때 입었던 옷 그대로였다.

“우리가 누군지 알죠?”

차 회장이 먼저 어색한 침묵을 깼다.

초면에, 누군지 아느냐고?

예상치 못한 질문에 지안은 망설였다.

‘뭘까? 왜 초면에 자신을 아느냐고 묻는 것일까? 그래도 일단은 예의 있게 대답해 봐야겠다.’

“세현 씨 부모님 되시는 분 같습니다.”

“그것 말고는?”

저렇게 대답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지안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 순간, 지안은 이 눈앞의 사람들을 어디서 본 적 있는지 기억해냈다.

지안이 약 6년째 몸담고 있는 세나 백화점 면접을 봤을 때.

물론 차 회장과 이 사장은 면접 때 나오지 않았다.

취업 준비생 시절 지안은 면접 준비를 하려고 세나 그룹 임원들의 얼굴을 프린트해서 앞에 두고 자기소개 연습을 했었다.

회장, 사장, 전무, 상무, 계열사 대표들의 얼굴까지 좌르륵.

그렇다. 이 사람들은….

‘세나 그룹 회장 부부? 그렇다면 세현 씨가…?’

지안은 말문이 막혀 입을 떡 벌렸다.

그녀가 속한 홍보1팀에 세현이 신입으로 들어왔을 때만 해도 말이 돌긴 했다.

“이중건 사장님 아들인 거 아니에요? 성씨가 같잖아요.”

누군가 그렇게 말했을 때, 지안이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성씨 중 하나잖아요, 설마요!”

낙하산으로 들어올 거면 아예 높은 직급부터 시작하겠지, 왜 굳이 신입으로 들어오냐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그런데 정말 세현이 그 세나 그룹을 이을 사람이라고?

말도 안 돼.

“설마, 모르는 건 아니죠?”

차 회장이 재차 물었다.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속으로는 여러 가지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 바람에 입으로는 간단한 말만 겨우 내뱉을 수 있었다.

“세나 그룹….”

결국 말을 끝맺지 못했다.

지안의 생각을 비집고 차 회장이 직접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맞아요, 세나 그룹 차선재 회장입니다.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지안은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기억 속 저편으로 묻어 두었던 옛일이 생각나려 하고 있었다.

‘네 따위가 우리 아들이랑?’

그 기억 속에서는 그 말을 던진 사람이 중년 여자가 아닌, 중년 남자였지.

‘내 인생에서 가장 초라했던 시간이었는데.’

어느새 지안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차 회장이 물컵을 잡았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다. 지안은 처연히 눈을 감았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차 회장은 물컵을 입으로 가져다 댔다. 지안은 눈을 살며시 뜨고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세현이 얼굴 좀 볼까 하고 왔는데 생각하지도 못한 상황을 맞닥뜨린 거라, 준비한 것은 없네요.”

생각하지도 못한 상황을 마주한 것치고는 굉장히 차분한 어조였다. 대기업 회장님이라 그런가, 제법 강심장이었다.

‘저도 자고 일어나서 바로 그 남자의 부모님 되는 분들을 만날 줄은 몰랐어요….’

세나 그룹의 총수가 제시하는 금액은 어느 정도일까?

돈 봉투를 건넨다고 해서 받을 요량은 아니었지만 괜스레 그 액수가 궁금해지는 지안이었다.

또한 궁금증과 함께 세현이 오너 패밀리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배신감이 밀려왔다.

어디선가 인기척과 함께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준비한단 말씀이세요? 설마, 돈 봉투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죠?”

세현의 목소리였다.

식탁에 앉아 있던 차 회장 부부와 지안, 셋은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르게 세현이 서 있었다.

방금 깨어난 것일 텐데도 깔끔하게 셔츠를 입은 모습이었다. 셔츠는 그의 몸에 꼭 맞아 탄탄한 윤곽을 보여주었다.

‘아직 세현 씨 얼굴을 다시 볼 마음의 준비를 못 했는데.’

함께 밤을 보낸 이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숨기고 싶어서 숨기지는 않았을 거야.’

그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 회사에서는 정돈된 머리 스타일인데, 왁스를 바르지 않은 머리도 세련되어 보였다.

밝은 곳에서 이렇게 세현을 다시 보니, 지안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진정해. 나와는 어차피 다른 세계 사람이야. 상처받고 싶지 않으면 한 가지만 명심하자. 절대, 분수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우리 집의 가장이고 상대는 재벌 집 아들이야.’

더는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와중에, 세현이 어깨를 가볍게 쓸고 옆에 앉았다. 자연스러운 스킨십이었다. 기분 좋은 보디 워시 향기가 풍겼다.

‘넘어갈 뻔했다.’

세현은 부드러운 손길과는 달리 강한 어조로 차 회장을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이야기하던 중이었는지 안 봐도 뻔하군요. 지안 씨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제 사수고, 제가 경영 수업을 받으려고 신입 사원의 신분으로 회사에 들어갔다는 사실 같은 건 꿈에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이건 꿈이라고, 현실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현의 입에서 저렇게 인정하는 말이 나오다니.

지안은 다시 한 번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그러면 정말 세현 씨가 세나 그룹 후계자라는 말이잖아…. 나한테는 왜 이런 일만 일어나는 거지? 9년 전에도, 지금도.’

지안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옛 남자 친구, 한준의 얼굴이 떠오르려 했다.

“사수? 그러면 우리 세나 그룹 사람이란 말인가?”

차 회장이 눈썹을 올리며 흥미롭다는 듯 말을 건네는 바람에, 지안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네, 세나 백화점 홍보1팀 안지안 대리입니다.”

회사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회장의 눈에 들어 승진하고 싶다는 생각은 막연하게 해본 적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하는 소소한 희망이었는데, 어쩌다 하룻밤을 보낸 부사수가 회장 아들이라니. 계획에 없던 일이다.

지안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오른쪽 뺨에 가져다 댔다. 자신의 가장 초라했던 순간의 기억이 계속 괴롭히려 하는 것 같았다. 자꾸만 빨개지려 하는 얼굴을 애써 차가운 손으로 억누르다시피 어루만졌다.

“그래, 회사 보는 눈은 있고, 직업은 탄탄하긴 하네요.”

차 회장이 말했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기 자랑을 하는 모습. 저것이 바로 대기업 총수인가?

‘저거, 자화자찬 아닌가…?’

분명 아까만 해도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지 않도록 신경을 기울이느라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지안은 그녀의 말에 살풋, 웃음을 터뜨렸다.

“감사합니다. 하하.”

웃음을 터뜨린 지안에게 일제히 가족들의 시선이 몰렸다. 셋 다 다른 표정이었다. 차 회장은 목이 타는지 연신 물을 마시다 ‘내가 웃긴 말을 했나?’ 하고 묻듯 살짝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이 사장은 여전히 온화한 미소 그대로였고, 세현은 그런 모습도 귀엽다는 듯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유명한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다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거의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몰린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눈치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