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눈에 보이게 형상화 하면 이 나라가 될 것이다’라고 하여 향유국이라고 불리는 이 땅에는 붉은 입술이 붉은 꽃을 머금고 있다하여 홍화라고 불리는 공주가 있었다. 홍화 공주는 현왕의 하나 뿐인 딸로 무남독녀인 홍화 공주는 왕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다. 현왕에게는 형제가 따로 없었다. 현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다른 형제들을 처단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현왕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자들이 행여 홍화 공주를 앗아갈까 염려하여 향유국 뿐 아니라 하늘 아래에서 제일가는 무예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화령을 공주의 호위무사로 맞았다. 화령은 홍화 공주와 동갑내기로 주종관계임에도 벗과 같이 지냈다. 화령도 딱히 신분에 연연하는 인물은 아니었음으로 홍화 공주를 편하다 못해 막대했다. 본디 화령은 다섯 살배기 꼬마아이처럼 장난기가 많은 성격이었다.

“홍화 공주,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못 찾았다고 말해. 또 혼인이니 뭐니 하실 거니까.”

나이가 스물, 꽃다운 나이라는 말이 딱 맞을 만큼 홍화 공주는 투명한 피부에 꽃과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니 홍화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았다. 덕분에 이리저리 홍화 공주에게 혼담이 들어왔지만 정작 홍화 공주는 그 이야기를 극도로 싫어하며 아버지를 피해 다녔다.

“그러다 홀로 할머니가 되고 마십니다. 공주님.”

“넌 내가 그러길 바라는 거냐?”

홍화가 매서운 눈으로 화령을 노려보았으나 화령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가 감히 어찌 공주마마께….”

“너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거든?”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 아니라고.”

홍화가 주먹을 쥐고 화령의 어깨를 치려했으나 화령의 커다란 손에 의해 홍화의 가녀린 손목은 손쉽게 잡혀 버리고 말았다.

“곧 혼인을 치르실 공주마마께서 이리 난폭해서야 되겠습니까. 새신랑이 도망을 가고 말겁니다.”

“도망칠 남자 같은 건 필요 없다.”

그런 남자를 신랑으로 맞이할 바에는 그냥 홀로 늙어가는 편이 낫다. 홍화가 혼담을 받아들이지 않는 데에는 단순히 혼인할 마음이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민류기 님 때문에 그러십니까?”

민류기라는 이름 세 글자에 홍화의 얼굴이 이름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민류기는 현왕의 왕권을 위협할 만큼 학식이 뛰어나고 타고난 지략가였다. 그는 무예보다 학문에 뛰어났음에도 걸음이나 말투, 표정에서 위엄이 느껴져 그의 앞에 서면 웬만한 장수들도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고 했다. 류기와 화령은 전혀 다른 분야에서 뛰어난 천재였으나 묘하게 맞는 구석이 있어 아니라고는 해도 속으로 맺은 벗이었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적어도 궁 안의 사람들은 공주님의 표정만 봐도 알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게 티가 났단 말이냐? 어쩌지, 류기가 알아채기라도 했다면.”

“그도 그런 면에서는 돌부처니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류기의 유일한 벗인 화령이 그렇다하니 홍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민류기가 몸속에 파란 피가 흐를 것이라 말하며 그를 차갑고 냉정하게 생각하지만 홍화의 생각은 달랐다.

‘이곳은 풀이 많아 벌레가 많으니 조심하거라.’

어린 기억이지만 홍화의 과거에 류기는 용맹스럽고 다정한 사내였다. 그가 민류기라는 건 추후에 안 사실이지만 홍화는 그날 뒤로 류기의 모습을 남몰래 훔쳐보며 연모하는 마음을 키워왔다.

“확실히 그라면 홍화 공주를 감당할 그릇은 됩니다만, 그의 취향은 참한 여자로 알고 있는데.”

역시 불가능할 듯합니다. 홍화 공주. 화령은 노골적으로 실실 웃으며 홍화 공주의 약을 올렸다. 화령이 예상한 바로는 홍화 공주가 평소처럼 길길이 날뛰며 자신을 향해 솜방망이 같은 주먹을 날릴 거라 여겼으나 예상과 달리 그녀는 어쩐지 풀이 죽은 모습으로 화령을 올려 봤다.

“류기는 역시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겠지? 그렇게나 멋지신 분이니까.”

화령은 이상하게도 홍화 공주의 여린 모습을 보게 되면 마음이 약해져 버린다. 화령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홍화의 곁으로 다가가 서서 홍화를 마주본다.

“폐하께서 말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오늘, 류기 님께서 연회에 참가하신다고 합니다.”

“류기가?”

“그렇습니다. 지금쯤이면 도착하셨을 지도 모르겠네요.”

“그걸 왜 이제 이야기해?”

홍화는 서둘러 연회장으로 걸음을 옮기려다 다시 화령이 있는 편을 돌아봤다. 홍화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수줍은 눈으로 화령을 올려다봤다.

“나 괜찮아 보여?”

화령의 시선이 한동안 홍화에게 머물렀다. 짧은 순간 여러 가지 감정이 실타래처럼 얽혔다.

“일단 온전한 사람 같긴 합니다만.”

“그런 걸 물어보는 게 아니잖아. 화령. 바보.”

홍화가 화령에게 소리를 내어지르고 연회장 쪽으로 걸어 나가버린다. 화령은 계속해서 홍화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내 앞에서 그런 얼굴을 하면.”

화령은 팔로 얼굴의 반을 가렸음에도 붉게 달아오른 귀가 가리지 않았다. 하여간 신경 쓰이는 공주님이라니까. 화령은 눈을 감아도 홍화가 눈에 아른거렸다. 화령은 이것이 단순히 호위무사로서의 사명이라고 여겼다.

***

홍화는 류기를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분주히 움직였다. 얼마나 류기에게 신경을 쏟았으면 머리장식이 삐져나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홍화의 빠른 걸음은 누군가에 의해 막혔다. 홍화가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홍화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눈앞에 못 본 사이 늠름해진 류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디를 그리 바삐 가십니까?”

“아, 그게.”

홍화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뭐든 말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시야에 류기가 가득 찬 순간부터 머릿속도 류기로 가득했다.

“공주님이 이리 바삐 만나러 가시는 분이 누군지 참으로 부럽습니다.”

머리가 흐트러진 것도 모르고 가시다니요. 홍화에게 류기는 참으로 부드럽고 자상한 사내였다. 류기의 희고 긴 손가락이 홍화의 흐트러진 머리장식을 올곧게 바로 잡아주었다. 홍화의 시선이 류기에게로 향했다. 이어 류기의 눈동자에도 홍화의 모습이 가득 차올랐다.

“고맙다.”

“벌써 공주님의 혼담이 오고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엿한 여인이 되셨군요.”

“나는 얼굴도 모르는 이와 혼인하고 싶지 않다.”

홍화는 자신의 혼담 이야기에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류기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홍화 자신은 아버지께 반항하면서까지 혼담을 거부하고 있는데 류기의 여유로운 태도는 홍화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공주의 혼인은 나라의 연합을 맺고 끊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지.”

홍화는 류기의 말이 듣고 싶지 않았다. 두 귀를 막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홍화는 그대로 류기를 스쳐 지나갔다. 홍화의 검고 긴 머리카락이 류기의 시야에 담겼다. 비단결을 보듯 부드럽고 아름다운 검은 머리카락을 향해 류기의 손이 펼쳐졌으나 끝내 닿지는 못했다.

“바라시지 않는 사내와의 결혼이라 하여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공주님은 강한 사내의 곁에 서게 되시는 겁니다. 행여 마음이 없더라도 말입니다.”

류기의 낮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에 짙은 어둠이 깔렸다. 그것은 아련하게 슬퍼 보이기도 했고 증오를 담은 것같이 원망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

한창 연회가 진행될 시간에도 홍화는 자신의 궁을 나서지 않았다. 류기를 보게 되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어찌 이리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지 홍화는 류기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홍화가 열을 식히려 창을 열자 불쑥 창 너머로 화령이 나타났다.

“히익.”

“공주마마. 왜 또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계신 겁니까?”

“넌 왜 사람이 나올 것 같지 않은 곳에서 나타나는 것이냐?”

“어차피 지금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통로로 들어갔다면 저를 만나주지 않으셨을 게 아닙니까.”

화령의 말이 옳았다. 분하지만 홍화는 화령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지금 홍화의 기분이라면 아무리 화령이라도 방안으로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민류기가 공주님과 혼인은 싫다고 하던가요?”

“….”

“역시 아직 제대로 몸매가 갖추어지지 않아서 그렇다던가요?”

“….”

“그게 아니면….”

“화령. 사라져라.”

홍화가 창을 닫으려하자 화령이 홍화의 손목을 붙잡았다. 화령의 시선이 홍화에게 닿았다.

“어떤 이유이건 공주마마는 아쉬울 게 없습니다. 위엄을 잃지 말아주세요. 공주님은 이 땅을 통 틀어 제일간다는 화령이 모시는 분이시니까요.”

“….”

“딱히 잘나지 않은 부분도 없으십니다.”

“그것은 칭찬인 것이냐. 욕인 것이냐.”

“제가 설마 공주님께 욕을 하겠습니까.”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다. 너는.”

“요즘 제게 칭찬을 아끼시지 않으시네요. 공주마마.”

“칭찬이 아니라고 해도!”

홍화는 화령의 장난 덕분에 다시 환한 미소를 되찾았다. 화령은 한층 밝아진 홍화의 모습에 그제야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

연회가 끝이 나고 모두가 잠에 들었을 고요한 밤, 왕의 침소에서 왕의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촛불이 켜진 문풍지 너머로 세 명의 그림자가 비쳤다.

“네가 결국은 나를….”

“예상하셨다면 말이 더 쉬워지겠군요. 당신의 겉모습에 속았다면 내가 이 칼을 맞았겠지요.”

“우리 공주에게 손끝이라도 댔다가는 백골이 되어서라도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왕의 말은 뒤이어지지 못했다. 왕의 심장을 향해 검이 관통했다. 붉은 핏자국이 튀어 오름과 함께 왕의 침소를 밝히고 있던 촛불이 힘없이 꺼진다.

***

유난히도 맑은 날이었다. 다만 어제 꿈이 좋지 않았다. 홍화는 어제 꾼 흉몽이 다만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 짓기 위해 어머니의 침소로 발길을 옮겼다. 평소 같으면 호위병들이 늘어져 있을 궁 안에 호위가 보이지 않았다. 연회를 할 때면 더 호위가 삼엄해지는데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홍화는 불길한 기운을 느끼며 걸음을 빨리했다.

“갑작스러운 일에 비께서도 놀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런 일이.”

“호위가 느슨해진 틈을 타 창문으로 들어온 것으로 추측됩니다.”

어머니의 울음소리와 류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뜻 듣기에 류기가 어머니를 위로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홍화는 침소로 들어가지 않고 문 옆에 있는 기둥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차입니다. 비께서라도 정신을 차리시지 않는다면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마음을 바로 잡으소서.”

“류기가 있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희미하지만 류기가 건네는 차를 어머니가 받아들었다. 어머니가 차를 한 모금 삼킨 뒤 돌연 어머니가 몸을 떨며 찻잔을 떨어뜨렸다. 찻잔이 깨지는 소리에 몸을 움츠렸다.

“비께는 그저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남편을 잘못 둔 죄밖에 그대에게는 죄가 없으니.”

“류기, 그게 무슨.”

크헉. 향유국의 왕비이자 홍화의 어머니는 그대로 의자에서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홍화는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손을 떨며 그 자리에 굳은 듯이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류기는 침착한 걸음으로 미닫이문을 열기 위해 손을 가져다댔다. 류기가 문을 열고 비의 침소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누군가가 홍화의 몸을 감싸 기둥 옆으로 몸을 숨겼다.

‘화령.’

홍화의 몸을 감싼 것은 홍화의 호위무사 화령이었다. 류기가 비의 침소에서 나오자 홍화가 있는 곳의 반대편에서 화려한 은빛 비단 옷을 입고 푸른색 나비가 그려진 부채를 든 남자가 류기에게로 다가왔다.

“뒷일은 알아서 처신하거라.”

“걱정 마십시오. 아랫것들을 시켜 말끔히 정리해둘 테니 다음 일을 생각하십시오.”

류기는 사람이 죽었음에도 느긋한 미소를 짓는 취륜의 얼굴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다 취륜을 스쳐지나갔다.

“비는 전날 밤, 폐하와 함께 독살 당한 것이다. 지금 당장 궁 안의 사람들에게 왕비와 왕의 죽음을 알려라.”

“네, 알겠습니다.”

“모든 일을 진행하는 데에 한 치의 실수도 없어야한다.”

실수가 있다면 나, 취륜이 무슨 수를 써서든 죄 값을 치르게 만들 테니. 온순한 눈웃음과 달리 살벌한 취륜의 언행에 취륜의 뒤를 따른 남자들은 꽁지가 빠져라 각자가 향해야할 곳으로 발을 바삐 움직인다. 취륜은 마지막까지도 주변을 살피고 비의 침소에 들어섰다. 취륜의 손에 의해 미닫이문이 굳게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