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네가 박차이야?”

“……누구, 세요?”

짝!

궁금해하는 내 얼굴로 날아든 건, 낯선 여자의 무지막지한 손이었다.

“내 남자한테서 당장 떨어져!”

여자는 분노와 질투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 여자는 날 알고 있었다. 대체 저 여자는 누구며, 내 남자라고 말하는 그는 누구란 말인가!

“인애야!”

나의 궁금함에 답이라도 하듯,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조, 조 대리님?”

조재욱이었다. 그는 나를 본체만체하며 인애라고 부르는 여자를, 그것도 내가 보는 앞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내가 그와 은밀하게 사내 연애를 시작한 지 고작 두 달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

“미안해.”

재욱은 동그란 안경을 손끝으로 치켜 올리며 영혼 없이 말했다. 건조한 사과였다. 그는 애초부터 표정이란 게 없었다. 그 얼굴은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유학 간다고 헤어지자는 것도, 다 거짓말이었어요?”

“너한테 상처 주기 싫어서 그랬어.”

그의 뻔뻔한 변명에 화보다 뜨거운 눈물이 먼저 차올랐다.

“처음부터 양다리였던 거예요?”

“양다리였던 적 없어. 그녀 외엔 아무도 사랑한 적 없으니까.”

너무도 당당한 그의 표정에 차이의 심장이 훅하고 발등 위로 떨어졌다. 그녀의 세상 중심이었던 사랑에 그렇게 또 사망 선고가 떨어졌다.

“그럼 전 뭐였어요?”

사랑이 아니면 뭐였냐고요!

“미안.”

차이는 바보 같은 질문에 등신 같은 답을 내놓으리란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진 걸 곧바로 후회했다.

***

야근을 하던 날 밤. 무슨 이유에선지 재욱의 얼굴은 굉장히 슬퍼보였다. 그는 차이의 어깨와 입술을 빌린 일로 얼떨결에 동료 이상의 관계가 되었지만, 그뿐이었다. 인애와 다투고 차이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이용한 날이, 차이에겐 그와의 1일이었다.

“미안.”

재욱은 차이의 입술을 빌린 그날처럼 헤어질 때도 같은 말을 했다.

“뭐가요?”

“그냥…….”

“좋아하는 건 미안한 게 아니에요.”

그놈의 속도 모르고 차이는 좋아서 얼굴을 붉혔다. 입사하던 날부터 줄곧 재욱을 마음에 두고 있던 차이에게 그와의 입맞춤은 굉장한 일이었다. 짝사랑하던 남자와의 입맞춤은 고백 같은 것이었다. 그 고백은 곧 사랑이 되었고 애틋한 연인 사이가 되었으며, 결혼할 사이로 발전하리라 생각했었다.

“우리 만나는 거, 회사 사람들한텐 비밀이야.”

재욱은 적당히 만나다가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 헤어질 생각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차이는 일회용 장난감에 불과했다. 그의 속을 알 리 없었던 차이는 사내에서 즐기는 비밀연애마저 짜릿하고 로맨틱했다.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갓 들어온 신입이 그의 여자가 되었다는 건, 질투의 먹잇감이 되어 물어뜯기기에 그만이었다.

“여우 같은 년!”

일 잘해, 능력 있어, 부지런하고 거기다 자상하기까지 한 그를 눈독 들이는 여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비밀연애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았다. 차이는 그와 함께 야근하는 일이 잦았고 자연스레 회사에서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았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없는 일을 만들어 재욱과 함께 밤을 새우던 날이었다. 새벽이 되자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누워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소파 붙일까?”

맞은편 소파에 누워있던 그는 곧 짐승의 본능을 끄집어냈다.

“네?”

“그러다 떨어질까 봐서 그러지.”

그가 차이를 걱정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아, 아니요. 괜찮아요.”

“왜? 내가 무서워?”

감정의 선만 넘지 않겠다는 거였지 본능에는 충실하고 싶은, 사심 가득한 말이었다.

“그, 그게 아니라. 누가 들어올까 봐, 신경 쓰여서요.”

“이 새벽에 누가 온다고 그래?”

차이의 불길한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헉!”

그녀의 사수인 이경미가 새벽같이 출근하는 바람에 두 사람의 관계가 들통나고 말았다.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은 공기보다 빠르게 퍼져나갔다. 비밀연애를 한 것뿐인데 차이는 마치 불륜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여직원들 사이에서 이상한 낙인이 찍힌 것도 그때부터였다.

“미친 거 아냐? 회사가 무슨 여인숙인 줄 아나?”

“혼자 순진한 척 다하더니, 뒤로 호박씨 까는 것 좀 봐.”

그날 이후로 차이에겐 사생활이 난잡하고 행실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꼬리표가 붙었다. 그저 질투 때문에 그런다, 웃고 넘기면 될 일이었지만 막상 그 시선들을 마주하고 있자니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때부터 회사 생활은 고역이었다.

‘내가 선배와 사귀는 게 잘못된 건가?’

마치 남의 남자를 가로챈 것처럼 눈총 세례를 받으며 욕받이가 된 것 같았다. 시기와 질투를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힘든 회사 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재욱의 미소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밀연애가 공개연애로 전환되자 차이를 대하는 그의 태도도 확연히 달라졌다.

‘재, 재욱 씨…….’

시선을 마주하거나, 함께 야근하는 일도, 퇴근 후 만나자는 무언의 약속도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에 애가 타는 건, 차이 혼자였다.

‘내가 더 미움받을까 봐, 내가 걱정돼서 그런 걸 거야.’

차이는 자신을 사무적으로 대하는 재욱의 태도를 그렇게 이해하며 외로운 사랑을 이어갔다.

“인애야, 사랑해.”

재욱이 잔뜩 취한 밤, 울먹이던 그의 입에서 차이가 아니라 낯선 여자의 이름을 들었다. 술김에 실언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차이의 머릿속에서 그 이름은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네? 유, 유부녀라고요?”

뜻밖에도 이태형 부장에게서 들은 재욱의 첫사랑 얘기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몰랐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긴데.”

재욱이 유부녀가 된 첫사랑과 죽고 못 사는 관계라는 걸, 신입이었던 차이만 몰랐다. 지옥의 문이 열린 것도 그때부터였다. 차이는 그와 만나면서 두 사람이 아니라 세 사람과 함께 있는 것 같은 생각에 잠 못 들고 흘려보낸 밤들이 많았다. 얼굴도 모르는 그의 첫사랑에게 질투와 분노를 느끼는 일은 지치지도 않았다. 몰래 그의 핸드폰에서 찾아낸 첫사랑에게 전화도 했었다.

「여보세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여자의 목소리에도 차이는 분노가 일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욕이라도 실컷 하고 끊을까도 생각해 봤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혼자 하는 질투가 자신을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하게 만드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신이 내 남자의 첫사랑이라고? 유부녀라면서?’

차이의 지독한 의심의 끝엔 인애라는 재욱의 첫사랑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네가 박차이야?”

출근길. 회사 앞에서 차이의 뺨을 때린 것도 인애였고, 재욱에게 헤어지라 강요한 것도 그녀였다. 화가 치밀수록 어이없는 웃음이 툭툭 내뱉는 날숨에 섞여 나왔다.

‘내가 이런 놈이랑 결혼까지 생각했던 거야?’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곱씹을수록 쓴웃음이 베어 나왔다. 첫사랑을 못 잊어 환장한 놈을 그렇게 사랑했다는 사실이 치욕스러웠다.

‘미친 새끼!’

처음부터 뺨을 때린 사람이 인애란 걸 알았다면 억울하게 맞고만 있진 않았을 것이다. 유부남을 만난 것도 불륜도 아닌데, 그녀가 맞을 이유도 그런 개소릴 들을 이유도 없었다. 백번 양보해 억지 죄목을 붙이자면, 첫사랑 유부녀를 잊지 못하는 찌질남을 사랑한 죄, 그뿐이었다.

‘날 갖고 논 거야?’

배신감에 속이 뒤틀렸지만 그것도 그때뿐이었다. 그 빌어먹을 놈의 미련이라는 게 사람을 바보 멍청이로 만들었다. 배신감보다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컸던 이유다.

‘빌어먹을!’

조재욱의 첫사랑은 그가 무서운 중2병을 앓고 있을 때부터였다. 옆집 누나에 대한 호기심은 자연스레 성인이 되면서 집착으로 이어졌다. 그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했고, 인애는 순진한 연하남을 물고 놔주질 않았다. 사랑은 싫고 평생 연애 상대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 어정쩡한 관계를 계속 유지해 왔던 거였다. 재욱은 맹목적인 사랑이었고, 인애는 그 관계를 즐길 뿐이었다.

“첫사랑 내연남이라며?”

“돈 때문에 만나겠지, 저런 놈이 뭐가 아쉬워서 연상의 유부녀를 만나겠어? 안 그래?”

“첫사랑이래잖아.”

직장동료들은 그가 첫사랑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수군댔다. 더러는 내연남인 그의 은밀한 사생활을 동경하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이도 있었다. 금지된 사랑과 막장 드라마는 욕을 하면서도 관심을 끊을 수 없게 만드는, 중독 같은 거였다. 그들 역시 재욱과 인애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한, 불륜을 훔쳐보는 관음증 환자들이었다.

“그 여잔 유부녀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나, 인애랑 결혼할 거야.”

누구랑 뭘 한다고?

하마터면 이성을 잃고 놈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그 뻔뻔한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고 난도질하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차이는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욕을 참느라 혀끝을 잘근 깨물었다. 첫사랑에 미친 놈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정신 줄을 놓았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럼 난, 난 너한테 뭐였니?

따져 묻고 싶었지만 미쳐있는 놈에게 그딴 걸 물어봐야 귀만 더러워질 게 뻔했다.

“곧 이혼한다고 했어.”

재욱이 말한 ‘곧’은 벌써 칠 년째였고, 그는 여전히 인애의 내연남일 뿐이었다.

“바보같이. 그 말을 믿어요?”

멍청한 놈아, 그 말을 칠 년째 믿다니. 너, 바보 아냐?

차이는 재욱에 대한 마음을 끝까지 놓고 싶지 않았다. 더 많이 사랑했다는 이유가 그녀의 발목을 붙들고, 마지막까지 그를 이해하라며 강요했다. 하지만 그것이 개똥만도 못한 오지랖이란 걸 금세 깨달았다.

“사랑하니까.”

사랑?

“너한텐 미안한데, 내가 더 사랑하니까 괜찮아.”

차이는 그를 더 이상 흔들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

차이는 삼 일째 무단결근을 했다. 대낮인데도 어두운 방구석에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혼자 누운 자취방에는 생기라고는 암막 커튼 사이로 겨우 비집고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이 전부였다. 회사에서 걸려온 부재중 전화 외에는 그녀를 찾는 이는 없었다. 혹시나 전화가 고장 난 게 아닐까 확인까지 해 봤지만 기다리는 전화는 오지 않았다.

‘나쁜 새끼.’

발신자표시제한으로 전화를 걸다가도 막상 연결이 되면 다급히 끊었다. 미련한 놈에게 미련이 남아있다는 게 원망스러웠다.

도르르.

이내 차이의 양쪽 눈가로 흐르는 눈물이 마지막 기대마저 지워냈다.

***

“죄송합니다.”

며칠 만에 출근한 차이의 첫인사에도 관심을 가지거나 이유를 묻는 이가 없었다. 당연한 일에 뻔한 이유를 궁금해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그나마 고개를 젓거나 혀를 끌끌대는 정도가 적당한 관심의 표현이었다.

“차이 씨, 나 좀 볼까?”

이태형 부장이 멀뚱하게 서 있던 그녀를 따로 불러냈다.

“이렇게 된 마당에, 둘 중 하나는 관둬야 하지 않겠어?”

그는 대놓고 사직을 권고했다. 둘 중 하나라고는 했지만 말의 뉘앙스에는 분명 차이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지금 저한테 그만두라는 말씀이세요?”

“조 대리는 우리 회사 핵심이라서, 좀 더 껄끄러운 차이 씨가 그래 주면 깔끔하지 않겠어?”

그냥 나가라는 말보다 더 속이 뒤틀리는 권고사직이었다. 재욱의 상사이자 학교 선배인 태형이 그를 싸고도는 건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차이의 등을 떠미는 건 재욱의 입김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조 대리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키시던가요?”

정곡을 찌르자 태형이 찢어진 눈을 힘주어 떴다.

“아, 아니야. 조 대리가 무슨. 난 그저 차이 씨를 생각해서 한 말이라고.”

차이는 평소에도 재욱의 대변인처럼 그의 말을 전달하고 옮기는 태형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재욱이 차이를 만난다는 것도 태형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생각해서 한 말이 아니라, 생각 없이 한 말 같아서요.”

“응?”

“제가 이런 일로 회사를 관두는 일은 없을 겁니다.”

차이의 정색에 태형의 찢어진 눈이 실처럼 가느다래졌다.

차이가 출근한 날부터 재욱은 휴가를 신청했다. 마음을 다친 건 차이인데 그녀를 피해 도피한 그의 행동은 최악이었다. 그런 힘든 차이를 위로하는 건 혼자 빙글빙글 도는 의자뿐이었다. 재욱이 자릴 비운 동안, 차이를 대하는 동료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양다리를 걸친 건 그놈이고, 그놈에게 차인 건 나인데. 왜 내가.’

근거 없는 소문은 모두 차이를 향했다.

‘처음부터 첫사랑에 환장한 재욱을 유혹한 게 잘못이었다.’라는 소문은 차이가 ‘대표까지 유혹했다.’로 둔갑했다. 졸지에 갓 들어온 신입을 꽃뱀으로 둔갑시킨 소문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헛소문을 제조할 사람은 딱 한 사람, 이태형이었다.

“개새끼!”

차이는 소문이라면 신물이 났다. 구정물에 더 이상 몸을 담그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더 있다간 소문에 돌려 영혼이 잔인하게 난도질당할 것 같아 사직서를 던졌다. 그게 최선이었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들이닥친다고 했던가.

차이가 사직서를 내던 날, 회사 인근 커피숍에서 낯익은 얼굴 둘을 보았다. 통 창 안으로 선명하게 보이는 두 남녀의 모습은 다시 보아도 아는, 그 연놈들이었다.

“……!”

차이를 엿 먹인 재욱과 인애가 사람들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볼을 비비고 앉았다.

“미친!”

공교롭게도 그때 재욱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기억엔 없던, 너무나도 활짝 핀 얼굴이 차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개새끼!”

그에게 반했던 것도 저 웃음이었는데 이제는 그 얼굴이 돼지처럼 보였다. 헤어진 사람에 대한 조금의 배려도 없는 놈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반갑게 손을 흔드는 게 정상은 아니지 싶었다.

‘지금 잘 가라고 손 흔드는 거야?’

차이는 해맑게 손을 흔드는 그의 손목을 댕강 부러트리고 싶었다.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는 저 면상에 따귀를 갈기고 싶어 손바닥이 근질거렸다. 그의 손짓에 인애가 뒤늦게 고갤 돌렸다.

“훗!”

인애의 한쪽 입 꼬리가 올라가는 걸, 차이가 놓칠 리 없었다. 상간녀에게 남편을 뺏긴 것 같은 착각이 차이의 심장에 불을 놓았다.

“저것들이!”

당장 커피숍으로 뛰어 들어가 똥물이라도 퍼부을까?

아니면, 둘의 머리채를 잡고 따귀를 갈기며 잡도리라도 해?

지나가는 사람들 다 들을 수 있게 둘의 관계를 확 까발려?

커피숍 통 창 앞에 서서 자신이 당한 만큼 되갚아주는 상상을 했지만 그게 다였다. 차이에겐 그 상상을 현실로 끄집어낼 용기가 없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거야.’

핑계는 그럴싸했지만 이제 와서 푸닥거리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꼴만 더 우습게 되는 짓이었다.

짝! 짝!

그 후로 차이는 밤마다 인애의 따귀를 때리는 악몽에 시달렸다. 때려도 시원찮은 감정이 깨고 나면 이스트를 넣은 반죽처럼 부풀었다 꺼지길 반복했다. 자신을 비웃던 인애의 얼굴이 밤마다 귀신처럼 나타나 차이를 괴롭혔다.

「차이 씨. 회사 관뒀다며?」

악몽에 시달리던 어느 날. 광고기획사 대표인 진상진의 전화를 받은 건, 회사를 관둔 지 일주일 만이었다. 한 달이라도 쉬면서 마음을 털어내려던 차이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전화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개인적으로 연락할 친분도 없는 거래처 사장의 연락이 차이를 불편하게 했다.

「이 부장이 그러던데?」

“아뇨,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냐고요.”

「아, 그것도 이 부장한테 물었지.」

태형이 상진에게 어떤 말을 했을지, 짐작이 갔다. 굳이 묻지 않아도,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주절주절 신나서 늘어놨을 게 뻔했다. 더군다나 상진과 함께 진행하던 일이라면 제대로 마무리해 주고 나온 터라 이런 전화를 받을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근데, 무슨 일이신지….”

「나랑 같이 일하는 건 어때?」

거래처 사장이긴 해도 처음부터 계속 말이 반 토막인 건 계속 귀에 거슬렸다. 하긴 그는 나이가 적으나 많으나 혀가 반 토막이었다. 나름 친근함의 표시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