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여자, 정임''''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마음과 마음을 헤집고'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소백산 한쪽을 들어 올린 포옹,'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빈 찻집에서 시집을 펴들고 혼자 앉은 정임의 눈길은 시 ‘겨울 사랑’이 펼쳐진 페이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머물러 있었다.'“정임아!”'문을 열고 들어서는 수정에게 정임은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언니.”'가까이 다가온 수정이 시집을 슬쩍 넘겨다보곤 말했다.'“또 그 시 들여다보고 있었어? 네 덕분에 나도 이젠 아예 외워 버리겠다.”'미소 지으며 정임이 제법 봉긋하게 부른 수정의 배를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수정이 밉지 않게 투덜거렸다.'“이런 화창한 가을날에 겨울 사랑이 뭐니, 겨울 사랑이. 이런 날엔 있지, 이런 노래를 들어줘야 하는 거야.”'수정이 경쾌한 손놀림으로 오디오의 플레이 버튼을 꾹 누르자, 신계행의 노래 ‘가을 사랑’이 흘러나왔다. 정임은 미소를 지었다.'“이 노래도 오늘 같은 날씨엔 좀 그런데 뭐. 단풍도 낙엽도 아직 멀었잖아.”'“얘, 그래도 난 가을이 되면 꼭 이 노래가 듣고 싶더라. 그래야, 진짜 가을 느낌이 나는 것 같고 말이야.”'“그럼 언니나 실컷 들어. 나는 그만 일어날 테니.”'“왜, 가려고? 국수 삶아 줄게, 먹고 가라.”'“아니, 됐어. 아침도 느지막하게 먹었는걸. 별로 생각 없어. 언니가 내 거까지 다 먹어 줘.”'“흥, 나만 살찌라고? 알았다, 알았어. 아무리 먹여도 살도 안 찌는 주제에.”'“미안해, 언니.”'“미안하란 얘긴 아니고. 진짜 갈 거야? 나 혼자 심심한데.”'“심심하긴 뭐가. 좀 있음 풋풋한 대학생들 들이닥칠 텐데. 언니가 좋아하는 그 음대생도.”'“좋아하긴. 어린 것이 귀여워서 예쁘게 봐주는 거지.”'“어린 것? 그러는 언니는 마흔 살쯤 됐고?”'쿡쿡 웃어 대는 정임에게 수정이 살짝 눈을 흘겼다.'“아기는 잘 큰대? 건강하고?”'정임은 방금 병원에 검진을 다녀온 수정에게 아기의 안부를 물었다. 물기 마른 커피잔들을 제자리로 올려 얹으며 수정이 씩씩하게 대답했다.'“그럼. 아주 잘 놀고 있대. 예쁘게.”'“예쁘게?”'“응, 예쁘게.”'“요즘은 그런 거 잘 안 가르쳐 준다며, 언니가 물어본 거야?”'“궁금해서. 그 인간 닮은 아들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아주 잘 됐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