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분명, 좀 전까지 소란스러웠는데. 카페 안이 너무 조용해졌다. 여신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그 많던 손님들이 어느새 다 빠져나간 줄 알았다. 여전히 빈 테이블 하나 보이지 않고 손님들은 수다를 떨며 음료와 디저트를 즐기고 있었다. 카페 안은 좀 전까지 흐르던 부드러운 경음악으로 충만해 있을 뿐. 그래, 소음은 그대로인데 다만, 여신의 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까.

“뭐? 다시… 말해 줄래?”

“다시 말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그냥, 우리 끝내자고. 이쯤에서. 그래야 너도, 나도 서로가 편할 테니… 앗!”

부들부들 떨리는 여신의 손엔 빈 컵이 들려 있었다. 방금 컵 안에 가득 담겨있던 물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에게로 옮겨간 탓이다. 컵 속의 물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작은 주먹이나마 힘껏 휘둘렀을 텐데.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거다. 사람의 주먹 대신 수소분자들의 세례를 맞을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이기만, 넌 오늘 운이 아주 좋은 줄 알아야 한다.

“야! 이게 무슨 짓이야?”

이기만의 얼굴은 물 범벅이 되어있었다. 오만상 찌푸린 낯으로 테이블 위의 티슈로 젖은 얼굴을 닦느라 여념이 없었다. 뭔가 구시렁대듯, 욕을 지껄이는 듯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하얗게 질린 여신에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에잇, 이게 뭐야. 이 재킷 해외 직구로 어제 받은 건데. 얼룩지게 생겼잖아.”

급기야, 안주머니에서 자기 손수건을 꺼내 정성스럽게 아주 꼼꼼하게 물기를 닦고 있는 기만을 보자, 여신은 기도 안 차서 헛웃음만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야! 이기만 너, 정말 최악이다. 지금 그 옷이 그렇게 중요하냐? 3년 사귄 여자 친구한테 넌 조금도 미안한 마음은 없는 거니? 이 나쁜 이놈아.”

“왜, 욕을. 어차피 너도 나 용서해 줄 마음 없을 것 아냐. 안 그래? 그러니까 우리 헤어지는 게 맞잖아. 그렇다고 물을 끼얹냐?”

“물 맞은 게 다행인 줄 알아. 내 앞에 염산이 없었던 게 행운인 줄 알아.”

간간이 둘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뭐라 수군대는 카페 안의 손님들이 보였다. 여신은 울지 않으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빨이 살갗을 뚫을 만큼 점점 힘이 가해지더니, 결국 입안으로 비릿한 피 맛이 맴돌았다.

‘내가 저놈 때문에 기어이 피를 보는구나.’

저 좋다고 쫓아다닐 땐 언제고. 싫다는 사람 어렵게 마음 열어줬더니, 등 뒤에서 아는 후배랑 바람을 피우고 다녔다. 급기야 며칠 전엔 그 둘이 모텔서 나오는 걸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세상에 절대 없다.

“설마, 기만이. 그럴 리가……!”

“아녜요, 선배. 제가 똑똑히 봤다니까요. 분명 선배 남자 친구랑 그 애였어요.”

저녁 가벼운 술자리에서 둘을 서로 소개를 해준 적이 있었지만, 수개월 동안 둘이 몰래 연락을 주고받고, 따로 만남을 이어가는 줄 미처 몰랐었다. 절대 변하지 않을 줄 알았던 남자 친구와 믿었던 후배한테서 동시다발로 등 뒤에서 칼침을 맞았다. 그리고 지금.

많이 아프다!

“너, 이런 식으로 날 기만하는구나. 사람이 자기 이름대로 산다던데. 그래, 이름값 하느라 애썼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선 여신은 자신을 향한 불쾌한 시선들에 잠시 움츠러들었다. 카페 안의 뭇시선들이 일제히 그녀를 바라보며 각자 자기만의 상상력을 동원할 테지. 상관없다.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일으킨 건 미안했지만.

“나중에 딴말 없을 거지. 그 애 찾아간다든지.”

끝까지 여신의 상처받은 마음 따윈 아랑곳없는 이기적인 놈. 그의 앞에 대고 침을 뱉어주지 못한 게 한스러웠다. 자칫 울음소리라도 터져 나올까 봐 그녀의 어금니엔 저도 감당하지 못할 악력이 들어갔다. 달달 떨리는 아래턱의 미동이 안쓰러워 보일 정도로.

‘그래, 부모 복 없는 년이 무슨 남자 복이 있을까.’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여신의 머릿속을 잠식해 들어갔다. 스스로 운명을 탓하던지, 팔자 타령하는 건 하지 않기로 수없이 맹세했었는데. 저도 모르게 복잡한 마음을 비집고 기어이 나와선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깃거리며 자기를 훔쳐보는 듯했다. 여신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저 발길이 닿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좀 전, 보란 듯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먼저 카페를 나오긴 했지만, 딱히 정해진 목적지는 없었다.

터덜터덜, 터덜터덜.

두 다리에 힘이 빠져서 걷는 것이 느려졌다. 걷는 동안 발도 한번 삐끗했다. 살짝 현기증도 나고 바닥이 너울너울 춤을 추는 듯도 했다. 어디 가서 이 불편한 심신을 잠시나마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 거기로 가자.’

무의식중에 이끈 그녀의 발걸음은 역시나 예외가 없었다. 시내에서 제법 큰 대형서점이 가까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시내에 나갈 때면 어김없이 한 번쯤은 들르는 곳이었다. 요즘 아무리 온라인 서점이 대세라지만, 유형의 책들이 백화점의 액세서리처럼 진열된 곳을 둘러보는 재미는 아무래도 건물의 형태를 갖춘 서점보다 못하다. 모임이 있거나 만날 때면 일부러 시내로 방향을 잡기도 했었다. 아주 잠깐의 틈을 내어서라도 꼭 서점에 들러보고 싶었다.

출판사에 근무하는 여신의 직업 특성상, 책을 둘러본다는 일은 업무의 연장선이라며 그녀의 친한 친구들이 만류하거나 핀잔할 줄 때도 있었다. 잠시라도 책과 좀 동떨어져 세상을 바라보라면서. 하지만, 그녀의 삶은 책과 함께 영글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생을 책에 파묻혀 살다시피 하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가 계셨고, 결국 여신이 택한 일도 책을 만드는 곳이었으니까. 책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재미에 맛 들인 이상, 그녀의 유일한 위안처도 결국 여기, 책들이 가득한 서점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와중에 또 서점에 들렀어. 이런 기분일 때도…….’

토요일 오후라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서점 안을 제법 메우고 있었다. 여신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가장 눈에 띄는 진열대로 향했다. 자신이 근무하는 출판사에서 일주일 전에 출간된 신간이 그녀를 보며 방긋 미소 짓는 듯했다.

금테라도 둘렀는지 어쩜, 책이 저렇게 잘나 보이는지. 뭔가에 이끌리듯, 좀 전까지 죽을상을 하고 있던 여신의 슬픈 눈매가 봄 햇살에 겨울 눈 녹듯 스르르 풀렸다. 역시 책 밖에 위안 삼을 게 없다는 듯이 그녀의 손이 덥석 그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비밀의 방 / 청운>

베일에 싸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또 문단에 큰일을 낸 셈이다. 출간하는 대로 어떻게 이처럼 인기몰이를 할 수 있는 건지. 신기하면서도 의심스러웠다. 이 세계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 본 적도 있었다.

‘얼마나 잘난 얼굴이길래.’

출판사에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편집장이 삼고초려 끝에 지금의 출판사와 이번 책의 출간계약을 맺었다고 들었다. 이메일, SNS, 문자, 전화로만 모든 일이 이뤄졌다. 사는 곳도 서울이 아니라고만 들었다.

비밀 많으면 오래 못 산다던데……. 여신은 비밀 많은 작가의 책을 펼쳐 들고 천천히 눈에 담아 나갔다. 출간 작업을 하면서 몇 번을 들여다봤지만, 직접 시장에 나와서 완성품을 들고 또 한 명의 독자로서 읽는 경험은 그 맛이 다르다.

‘역시, 재밌어.’

저 혼자 피식 웃다가, 양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쓰다가, 다시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몰입감은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겠지만. 지금 여신의 눈물은 책 내용 때문만은 분명 아녔다.

3년간 사귄 남친에게 버림받은 것 같은 현실감이 문득, 이 책을 읽는 동안 아주 강하게 인식되었다. 젠장, 이 책이 결국 자신을 울게 만든 거다. 이 책 때문에!

툭, 투둑, 투두둑.

책장을 넘기던 여신의 손이 별안간 멈추고 그녀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들이 순식간에 쏟아졌다. 아까 터졌어야 할 눈물들이 참고 또 참고 있다가 지금에서야 봇물 터지듯 나와 버린 이유가 뭘까.

“닦아요.”

가까이에서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길고 하얀 남자의 손이 불쑥 여신의 눈앞으로 내밀어졌다. 체크무늬 손수건이 그녀가 들고 있던 책 위로 놓였다. 유난히 하얀 손에 여신의 눈길이 머물렀다.

“아, 감사합니다.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을 차마 들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감사의 인사를 해야만 했다. 부끄럼을 무릅쓰고 받아든 손수건으로 여신은 뺨 위로 흐르던 눈물을 훔쳐내기 시작했다. 훌쩍이던 콧물까지 닦으려던 찰나였다.

“그쪽 말고, 책. 닦아요.”

“네? 책… 을 닦으라고……!”

“귀한 책이, 당신 눈물에 다 젖으니까.”

이런, 씨! 순간, 여신은 책보다 못한 존재가 되었다는 또 하나의 자각이 들었다. 종로에서 뺨 맞고 왔더니, 한강에서 화풀이는 못 할망정 위로라도 받으려고 했었는데. 울고 있는 사람 달래주진 못할망정. 뭐? 책을 닦으라고. 자기가 흘린 눈물에 사람보다 귀한 책이 젖는다고.

“아무리 그래도… 응?”

없어졌다. 분명 자기 옆에 남자 사람 하나 있었는데. 그 목소리는? 이 손수건은? 그 하얀 손은……!

“어디 갔지?”

조금 전까지 있었는데. 분명 가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여신은 주위를 둘러봤다. 켜켜이 앞을 가로막고 있던 사람들 틈 사이로 한 남자의 뒤태가 보였다. 제법 큰 키에 넓은 어깨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 저 남자 같은 느낌이다.

“저기, 손수건을 돌려줘야…….”

사라졌다. 아니 증발했나? 아무리 까치발을 들고 사람들 틈을 비집으며 살펴봐도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여신은 다시 자기 손에 들린 손수건을 빤히 쳐다봤다. 남자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손수건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얼른 책 안 닦고 뭐 하니…? 그래, 책 소중하지. 근데, 책아. 울고 있는 나도 소중하단다.

여신은 두 뺨 위에 남아있던 눈물을 마저 닦고, 책장 위에 흥건히 떨어져 젖어 들고 있는 눈물도 닦았다. 눈물 자국이 남아있는 책은 양심상 그녀가 사 올 거지만.

“집에 가자, 귀한 책아.”

가서 넌 내 서고의 또 한 권의 가족이 되고, 난……. 마저 울어야겠다. 감히 내 눈물이 너의 귀한 몸을 얼룩지게 했었다니. 책을 사서 품에 꼭 껴안은 채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손수건의 주인이 남긴 한 마디는 꽤 오랫동안 여신의 뇌리에 남아있는 듯, 좀체 잊히질 않았다.

#1. 누구세요?

“야, 마시자. 마셔. 오늘 같은 날 안 마시면 언제 마시겠냐. 안 그래?”

친구인지 원수인지 쓰린 가슴에 굵은 소금 한 줌 가져와서 뿌려 대고 있었다. 벌써 2시간째. 실연당한 절친을 위로해 준답시고 편의점 술을 종류별로 다 사 들고 왔다. 둘은 여신의 고등학교 친구들이자 유일하게 마음이 통하는 천생배필들이다. 희재와 지운이. 오늘 아주 결판을 내려고 작정한 듯 쳐들어온 불한당이었다.

“여신아, 세상에 널리고 깔린 게 남자란다. 얘 봐라, 지금 우리 앞에 깔려 있잖아?”

술기운을 모조리 흡입한 듯 발음이 꼬여있는 희재가 덩치 큰 지운을 깔고 앉아 있었다. 술 몇 잔에 휘청거리며 쓰러지듯 누워있는 그에게 장난을 치는 중이었다. 지운은 늘 희재의 밥이었다. 그는 덩치만 컸지 콩알만 한 그녀의 입심에 늘 밀렸다.

“야, 지운이가 뭔 죄냐? 그만 내려와라. 애 숨도 못 쉴라. 넌 그게 문제야. 남자를 너무 깔보는 거.”

여신은 자기 앞에 놓인 술잔을 들고 빙그르르 돌렸다. 오늘은 아무리 마셔도 좀체 취하지 않으려나. 마음 같아선 얼른 취하고 잠이라도 푹 자고 싶은데. 그래야만 어제 있었던 실연의 더러운 기억을 빨리 잊을 것만 같았다. 젠장, 길 가다 개똥을 밟았어도 이보다 기분 더럽진 않을 텐데.

“아아. 나 좀 일으켜 줘. 나 화장실 가고 싶단 말이야… 희재야, 좀!”

희재의 엉덩이에 깔려서 일부러 죽는시늉하는 지운이. 키가 183cm가 넘는 녀석이 키 155cm에 불과한 희재를 무거워할 리 없다. 그는 지금 짝사랑에 깔려서 허우적대고 있을 뿐이다.

“옜다. 다녀오너라. 이 누나가 비켜준다.”

지운은 못 이긴 척 일어서 주는 희재에게서 벗어나 서둘러 볼일을 보러 갔다. 큰 체격의 사내가 콩알만 한 자기 하나 못 이긴다는 짜릿한 쾌감에 그녀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말려 올라갔다.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그녀의 눈길은 친구 이상의 야릇한 눈빛을 담고 있었다. 알딸딸한 술기운이 돌고 있는 여신의 멍한 눈에도 다 비칠 만큼.

“넌, 애가 왜 그러니? 언젠가는 지운이가 너한테 복수하고 말 거야.”

“복수? 무슨 복수. 얜 뜬금없는 소리 하고 있어. 자 마시자.”

여신은 알면서 모른 체하는 희재를 살짝 흘겨보면서 빈 술잔을 다시 내밀었다.

“야,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춤추자. 신나는 음악 틀고.”

술에 한껏 취해 살짝 정신 놓은 희재가 거실의 조명을 바꿨다. 휴대전화의 음악 앱을 열어서 신나는 댄스음악을 틀었다. 블루투스에 연결하자 거실이 쾅쾅 울리도록 소리가 커졌다. 그녀를 말릴 틈도 없었다. 여신은 한번 흥이 나면 멈출 줄 모르는 희재의 행동이 걱정되었다.

“희재야, 음악 소리 좀 낮춰. 지금 밤 9시가 넘었어.”

여신은 음악에 맞춰 흥을 타느라 정신없는 희재를 보며 소리 질렀다. 음악 소리에 묻혀 그녀의 목소리는 모기보다 더 작았다.

‘쟤를 누가 말리나….’

알코올 기운에 여신도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두 눈을 깜박이며 어느새 앉은 채로 리듬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머릿속은 지금 이 시간 이러면 안 되는데 싶다가도 어느덧 알코올에 온몸과 마음을 잠식당한 그녀로선 냉정한 이성적 판단을 하기엔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쾅쾅쾅!

바깥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몇 번은 울렸던 것 같은데. 처음엔 거구의 지운이 화장실 문을 닫고 나오는 줄 알았다.

“지운아, 지운아. 우리 집 문 부서진다고. 좀 살살 닫아.”

여신은 화장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아직 화장실 문은 닫혀 있었고, 지운은 그 안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어디서……?

쾅쾅쾅!

지운의 소리가 아니었다. 여신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때까지 희재는 여전히 댄스 리듬에 흠뻑 취해 있었다. 무아지경에 빠진 채 머리, 허리, 엉덩이까지 마음껏 숨겨진 끼를 발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저럴 거면 클럽에 가자 할 걸 그랬나 봐.

“얘, 희재야. 잠깐만. 조용히 좀 해봐. 무슨 소리 안 들려?”

희재는 여신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린 채 상체를 비틀어댔다. 여신이 참다못해 희재의 휴대전화를 빼앗아 음악을 중지시켰다.

쾅쾅쾅!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누굴까. 이 밤에.

“누구세요?”

여신은 자신의 몰골을 점검하지도 않은 채 현관문을 열었다. 웬 낯선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키가 몹시 크고, 어깨가 넓은, 아주…, 잘생긴 남자였다. 술기운에 알딸딸한 그녀의 두 눈에도 남자의 외모는 빛나고 있었다. 저런 남자가 왜, 지금, 이 시각에 그녀의 현관 앞에 서 있는 걸까. 남자가 여신의 현관 앞에 서 있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3시간 전.

**

한수는 오랜만에 이모할머니 댁을 방문했다. 서울 변두리 작은 아파트 주차장. 그는 차를 주차하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엘리베이터 안에 막 들어선 순간, 어디선가 고함이 들렸다.

“어, 어. 잠시만요. 엘리베이터 좀 잡아 주세요.”

젊은 여자가 양손에 찢어질 듯한 마트 봉지를 들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헉헉거리는 자세가 제법 복날 견공 같았다. 작은 체구로 뭘 저리 많이 사 들고 오는 것인지.

“7층 좀 눌러 주실래요?”

“…….”

“뭐 해요? 어서 7층 좀.”

여자는 턱짓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가리켰다. 한수는 내키지 않았지만 귀한 손가락을 움직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6층 가시나 봐요? 가만있자, 6층이면, 멋쟁이 할머니 사시는데.”

여자는 한수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기분 나쁜 시선이었다. 처음 보는 여자의 끈적이는 낯선 시선이 자신의 몸 위에 달라붙는 것처럼 왠지 찝찝했다. 초면에 사람을 저렇게 훑어 내리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방문 오셨어요? 친척 분? 아님…, 자제분?”

한국 사람들은 정이 많다. 주변 사람들에 관한 관심도 어느 정도껏이어야 한다. 쓸데없는 정은 오지랖이라 지칭된다. 지금 이 여자처럼. 한수 여자의 궁금증을 해소해줄 의무와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의 무덤덤한 시선은 어느새 그녀에게서 불빛으로 반짝이는 번호판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띵!

6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옆에 서 있는 여자는 그때까지 자신을 빤히 살펴보고 있었다. 여전히 자신의 질문에 듣고 싶은 대답을 기다리면서.

“그럼.”

한수는 그 여자를 향해 고개만 살짝 기울인 채 인사를 했다. 이모할머니를 잘 아는 여자인 듯해서 예의상 너무 모른 체할 순 없었다. 인내심을 최대한 끌어올린 그의 인사는 다시 그녀의 그다음 행동에 견인차가 되고 말았다.

“들어가세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힘과 동시의 여자의 밝고 경쾌한 인사말이 들려왔다. 한수는 오늘, 지구 최강 오지랖을 만난 듯했다.

딩동딩동.

“어서 오렴. 한수 네가 어쩐 일이냐?”

“건강은 좀 어떠세요? 어머니께서 걱정을 많이 하세요. 전해드릴 것도 있고 해서.”

한수는 오랜만에 방문하는 이모할머니의 집을 천천히 둘러 봤다. 실내가 본인의 성품대로 소박하면서도 단아했다. 많은 연세에도 홀로 지내시는 것이 신경 쓰였다. 워낙 주위에 신세를 지기 싫어하는 탓에 그의 어머니도 늘 안타까움을 내비치고 있었다.

“나야. 늘 그렇지 뭐. 그나저나 넌 바쁜 애가 일부러 시간을 낸 거야? 기특하게도.”

“오랜만에 서울 다녀갈 일이 있어서요. 그리고 당연히 와 봐야죠. 이모할머니는 제게 외할머니나 다름없으신 걸요.”

“그러니? 아무튼, 고맙다. 이렇게 네 얼굴도 보고. 저녁 먹고 가렴.”

한수는 어머니가 싸주신 음식들을 주방으로 가지고 갔다. 거실에 열어둔 창문으로 시원한 초여름 바람이 불어 들어오고 있었다. 모처럼 서울로 올라와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그의 대단한 착각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