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 나아가기 (2)

“서아 언니가 괜히 너한테 바보라고 하는 게 아니야.”

“뭐래.”

나는 오랜만에 친구 정다정과 술 한 잔 기울이고 있었다. 눙지는 언니 집에 맡기고 설은 그가 돌보겠다고 해서 맡겨두고 나와버렸다.

“이 바보야!”

그녀가 크게 외쳤다. 조용한 이자카야에 내 친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조용히 좀 해.”

나는 안주로 나온 오이를 정다정의 입에 쑤셔 넣었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 명품 가방을 받은 것, 그리고 그가 맞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모두 털어놨다.

“이 자식은 공부도 못하더니 연애도 못 하네.”

오이를 아작 씹어먹으며 그녀는 계속해서 뼈만 때리는 공격을 쏟아부었다. 때리고 또 때렸다.

“내가 그 이야기를 너한테만은 듣고 싶지 않아요.”

“넌, 너는 왜 망설여?”

“몰라서 물어?”

“응. 난 모르겠는데?”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친구가 앞에 놓인 조개탕을 입에 마구 때려 넣었다.

“그 사람은 나를 설이 돌보미 딱 거기까지 보는 것 같고…… 그와 나 사이에는 신분 차이가 존재한다고 할까. 그리고 그 사람 설이 때문이긴 하지만. 진지하게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을 찾고 있기도 하고.”

“계속 말해봐.”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는 투로 말하는 그녀를 흘겨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고백했다가 차이면! 나는 직장을 나와야 해. 이 자식아!”

나는 안되는 이유를 나열하다 급작스럽게 오르는 열에 목소리가 커졌다.

“아. 깜짝이야.”

내가 높인 목소리야 깜짝 놀란 친구가 앞섶에 국물을 흘렸다. 물티슈로 벅벅 문대며 날 바라보는 정다정.

“네 말이 맞기는 하네.”

“그렇지?”

“근데……. 그 사람의 맞선보는 걸 응원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넌 자존심도 없니?”

“내가 언제 응원했어?”

“설이가 좋은 엄마,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며. 그거 요즘 맞선 보는 거 응원한다는 뜻 아니야?”

“아닌데? 그렇게 들려?”

“응.”

아. 맙소사.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나는 단지 설에게 진짜 좋은 부모님이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에 말한 건데, 친구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런 뜻이었다.

“나 진짜 바보네.”

“뭐.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지.”

그녀가 내 앞 비어있는 술잔에 소주를 쪼르르 따랐다. 나는 찰랑찰랑 소주가 담긴 잔을 들어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그래서. 이대로 접을 거야?”

“그래야지.”

“아쉽네. 오랜만에 이서라가 마음을 연 상대가 너무 높이 있네.”

나는 까끌까끌해진 목을 축이려 다시 잔을 들었다.

“설이를 위해서라도 빨리 접어야지. 그렇지.”

나는 술잔을 기울이며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평소 주량보다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술 냄새가 날까 봐 몇 번의 가글을 하고 향수까지 뿌린 후 집으로 들어갔다. 너무 늦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집안의 불은 최소한만 남기고 꺼져있었다.

까치발을 들어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방안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일찍 들어오네요?”

나는 너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이서라 씨?”

내가 주저앉자 그는 재빨리 나에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아. 진짜 깜짝 놀랐잖아요.”

정말 놀라면 화가 난다. 사실 욕이 나올 뻔했다. 다행히 입을 움직이기 직전 이성을 찾았다.

내가 화를 내자 그가 미안해했다.

“아.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괜찮아요?”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그에게 화낼 힘도 없어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비척비척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시원한 물 한 잔 마시고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서라 씨. 요즘 고민 있어요?”

“아, 아니요?”

“그래요?”

“네. 그럼 저는 이만.”

나는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그를 지나쳐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귀신이야 뭐야.”

나는 꼭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불안했다. 내가 들어오는 소리에 잠깐 눈을 뜬 눙지가 그리 서서 뭘 중얼거리냐는 듯 쳐다봤다.

“응. 눙지야. 언니가 미안. 더 자.”

내가 눙지 옆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다시 고개를 박고 잠을 청하는 눙지. 잠을 자는 눙지를 바라보고 있자 술기운이 솔솔 올라왔다.

“그래. 잠이나 자자.”

나는 한숨을 푹 쉬고 잘 준비를 했다.

아침에 겨우 눈을 떠 옷을 갈아입고 설이 등원하기 전 아침을 먹이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설이 준비를 마치고 나와 막 포크로 사과를 집었을 때 그가 말끔하게 차려입은 정장을 입고 나왔다.

그의 몫이 차려진 음식 앞에 앉은 그가 커피를 한 모금 하더니 나를 흘끔 바라봤다.

“오늘 설이 하원은 제가 시키겠습니다.”

“네? 왜요?”

설이 하원 하는 시간은 오후 3시. 일하는 그가 하원 시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설이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 사람이 누구냐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네. 알겠어요. 설아. 오늘은 어린이집 끝나면 삼촌이 데리러 온대. 좋겠다. 그렇지?”

“응!”

설이 사과를 입에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꼭 토끼 같아 웃음이 나왔다.

“다른 옷을 입힐까요? 좀 더 신경 쓸 걸 그랬나…….”

“아니요. 충분합니다. 마음 써줘서 고마워요.”

고마운 일도 많은 주세훈 씨. 이것이 내 일인데. 항상 고맙다 진심으로 말해주는 그가 좋았다. 이제 그런 마음도 더는 곱씹으면 안 되겠지.

그와 설이 나가고 나는 눙지 산책을 시켰다. 답답한 마음이 좀 걸으면 괜찮을까 싶었지만 아무리 걸어도 괜찮아지지 않았다. 결국, 더는 걷지 않겠다는 눙지를 안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집으로 들어올 때 장만한 노트북을 켰다.

“어린이 상담 치료…….”

설은 주기적으로 상담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설을 위해서 알아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젯밤 나는 결심했다. 그가 결혼해서 설의 아빠가 된다면, 나는 설의 거주 돌보미를 그만두기로. 설을 위해서는 더 여유 있게 옆에 있어 주고 싶었지만, 그와 그의 옆에 있게 될 여자를 볼 자신이 없었다.

나의 상황을 설명하고 설과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서 조언이 필요했다.

상담 예약을 마치고 내 방에 있는 붙박이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 안에는 그가 선물한 명품 가방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흠집이 날까 두려워 꺼내 볼 때도 잔뜩 긴장했다.

갖고 싶지만, 나에게는 어색한 것. 꼭 명품 가방과 그가 같아 보였다.

나는 시선을 외면했다.

이것저것 없는 일도 만들어서 보내고 있는 하루였다.

“시간 더럽게 안 가네.”

몇 번이고 시간을 확인했지만, 바늘은 거북이처럼 느리게 가고 있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이서라 씨. 지금 당장 병원으로 와 주실 수 있을까요?

세훈의 연락이었다.

“병원이라니요. 설이한테 무슨 일 있어요?”

-설이가 조금 다쳤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서라 씨만 찾네요.

“제가, 제가 지금 바로 갈게요.”

나는 그때부터 빨리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서둘러 전화를 끊고 핸드폰과 지갑만 챙겨 밖으로 나왔다. 택시가 잘 잡히는 큰길까지 내 짧은 다리로 전속력을 다해 뛰었다. 콜택시를 기다릴 여유도 없었다.

“아저씨. 서울 병원 응급실로 가주세요.”

“그, 그래요.”

내가 겨우 잡은 택시를 타고 헉헉거리며 말하자 아저씨가 서둘러 차를 출발시켰다.

급하게 병원 앞에 택시가 멈춰 서고 나는 서둘러 응급실로 향했다.

“여기요. 서라 씨.”

“설이는 괜찮아요?”

누워있는 설의 얼굴에는 상처가 났는지 이마 윗부분 커다란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팔에 깁스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어쩌다가 다친 거예요?”

나는 터질 것 같은 비명을 손으로 막았다.

“아……. 정말 죄송해요. 제가 좀 더 주의해야 했는데…….”

낯선 목소리에 주위를 둘러보니 세훈의 옆에는 낯이 익은 여자가 울먹거리며 서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 설이 계단에서 구른 모양입니다. 계속 서라 씨만 찾다 조금 전 잠들었어요.”

그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이 여자랑 있다가 다쳤다는 사실에 나는 더 화가 났다.

“아이를 볼 때는 항상 신경 쓰셔야죠.”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신경 쓴다고 했는데…….”

“이정은 씨는 그만 돌아가 보세요.”

“아니에요. 설이 입원하는 것만 보고 돌아갈게요.”

입원이라니? 설이 입원까지 해야 할 정도로 다친 건가? 내가 눈이 동그랗게 변하자 그가 바로 입을 열었다.

“입원할 정도로 다친 건 아닌데 아무래도 설이 많이 놀라서요. 오늘 하루 입원해서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네요.”

“네.”

그가 설명한 대로 아이가 많이 놀랐으니 하루쯤 입원해서 경과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잠시만 전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서라 씨. 여기 있어 주세요.”

“알겠어요.”

그는 급하게 핸드폰을 붙들고 응급실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다시 설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네?”

설이만 바라보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이 돌보미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네. 그런데요.”

기분 탓일까. 아까와 조금 다른 목소리와 다른 표정. 확연히 차이 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게 느껴졌다.

“혹시, 미혼이신가요?”

“그걸 왜 제가 말해야 하죠?”

“앞으로 결혼할 남자의 아이를 돌보고 있는데, 제가 몰라야 하나요? 주제넘었나? 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갑자기 변해버린 그녀의 태도에 설이 걱정으로 가득 차 있던 내 머리가 ‘덜커덕’하고 멈춰버렸다.

“이건 좀 걱정돼서 하는 소린데……. 그렇게 일하시면 나중에 다른 곳에서 일하실 때도 좋지 않아요.”

“무슨 소리죠?”

“고용인에게 주제넘게 말하는 거요. 적어도 선을 지켜야죠.”

“지금 무슨…….”

그때 세훈이 돌아왔다.

“조금 뒤 설이 병실로 옮긴다고 하네요.”

“아. 다행이네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이제야 조금 안심이 되네요.”

그녀가 또 한 번 바뀌었다. 경극 배우처럼 얼굴의 가면이 순식간에 변하다니. 신기하기도,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다.

내가 제정신으로 돌아오기도 전, 신속한 일 처리로 설은 금방 병실로 옮길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재력의 힘을 느낀 순간이었다.

설의 병실은 V.I.P 병실로 호텔 룸 뺨치는 인테리어로 사람을 기죽였다.

설이 병실로 옮기고 그의 맞선녀가 본인은 이만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오늘 너무 걱정 많으셨죠? 죄송해요. 설이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그녀의 변화에 아직도 적응을 못 하고 버벅대자 그녀는 애처롭게 표정을 지은 뒤 병실을 빠져나갔다.

꼭 내가 그녀의 인사를 무시한 것만 같았다.

그가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잠시 병실을 비웠다. 나는 설의 옆에 앉아 설을 지켜보며 조금 전 있었던 일을 곱씹었다.

“저거 완전 이중인격 아니야?”

나는 급격하게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식히고 있는데 그가 돌아왔다.

“주세훈 씨.”

“네? 네.”

“설이 정확히 어떻게 다친 거예요?”

내가 묻자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꺼냈다.

“식사하고 나오는 길에 제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넘어져서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

“그럼 왜 다쳤는지 모른다는 거예요?”

나는 큰 목소리가 나오려는 것을 자는 설을 보고 간신히 참았다.

“이정은 씨가 설이 무얼 잡으려 하다 붙잡을 새도 없이 넘어져서 다쳤다고 하더군요.”

“지금 그 말을 믿어요?”

“네?”

그가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아니에요.”

이건 감정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이렇게 몰아갈 것은 아니었다.

“거짓말은 아닐 겁니다. 그때 같이 있던 이정은 씨의 친구분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더군요.”

“친구들이요?”

“레스토랑 앞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어디서 이상한 냄새 나지 않아요?

구린 냄새가 솔솔 풍겼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코를 막아 구린 냄새를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냄새에 근원을 찾아볼 것인가.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잠들었던 설이 눈을 떴다.

“아파……. 흐응. 터리 아파. 턴탱님…….”

설이 눈을 뜨자마자 아프다며 훌쩍이기 시작했다.

“설아. 선생님 여기 있어. 많이 아파?”

설은 나를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아. 의사 선생님 모시고 올게. 잠깐만 기다려.”

그가 설이 아프다고 하자 허둥지둥 병실을 나가려 했다.

“아니야. 의타 턴탱님 아니야. 아앙. 의타 턴탱님 오지 말라고 해. 엉엉”

설은 의사 선생님 이야기가 나오자 더욱 크게 울기 시작했다.

“아, 알았어. 설아. 의사 선생님 오지 말라고 할게. 그렇죠? 삼촌?”

나는 그에게 한쪽 눈을 찡그리며 대답을 종용했고 그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눈짓을 알아챘을까? 다행히 그는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응. 의사 선생님 안 올 거야. 오지 말라고 하자.”

설이 그제야 울음을 그치고 훌쩍이며 나를 불렀다.

“턴탱님. 터리 아파. 터리 아파요.”

“설아. 선생님 여기 있어. 많이 아파?”

나는 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며 설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쓸어올려 주었다. 그 모습을 보던 그가 눈치껏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

“응. 터리 아야 했어. 여기 팔이 아파.”

설은 부러진 팔을 가리키며 훌쩍였다.

“설아. 설이 아프니까 선생님도 마음이 아프다. 선생님이 뭘 해줘야 설이 조금이라도 덜 아플까?”

나는 정말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아이가 다쳐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생각보다 너무 괴로웠다. 나도 이런데 그는 얼마나 놀라고 마음이 아팠을까.

“흥……. 터리, 어부바 해주테요.”

설은 단 한 번도 나에게 어부바를 해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안아준 적은 많았어도 어부바를 한 적은 없었다.

“설아. 팔 아야 하잖아. 괜찮아?”

“응. 터리 어부바.”

나는 설을 부축해 침대에 앉히고 설이 업히게 좋게 등을 대 앉았다.

“설아. 다친 팔 아프지 않게 조심해. 알았지?”

그냥 고개만 끄덕였는지 소리 없이 설이 내 등에 달라붙어 목에 팔을 둘렀다.

“읏차.”

처음 만났을 때 보다 무거워진 설을 업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가 의사 선생님을 모시고 올 수도 있어 나는 밖에 나가지 않고 넓은 병실을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아픈 것인지, 다친 것이 서러운 것인지. 설은 내 등에 고개를 묻고 훌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