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크루즈에서

플레임호에 일하는 직원만도 수십 명에 달했다. 인력관리 매니저인 마피아는 이번 크루즈 여행에 도우미로 고용된 임시직 직원만을 불러서 서로 소개를 했다. 루치아노 말대로 도우미들은 전부 다 남자들이었다.

아담, 챔피언, 초콜릿, 머핀, 마카롱, 이글, 드래곤, 유니콘.

도우미들의 이름은 사람 이름부터 달콤한 디저트와 동물 이름까지 다양했다. 소개가 끝나고 자유로운 휴식 시간이 되자 사내들이 스스럼없이 수다를 떨었다. 그중 드래곤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남자가 플로리아의 옆에 바짝 가까이 다가와서 그녀를 뜯어보았다.

“만나서 반갑다. 고슴도치. 너 정말 귀엽게 생겼다?”

처음부터 반말하는 것이 비위에 거슬렸지만, 자신보다는 나이가 서너 살은 더 들어 보여 플로리아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얼굴에 젖살이 아직도 안 빠져서 그런지 계집애처럼 예쁘다.”

그는 첫 만남에 무례할 정도로 플로리아에게 호감을 드러냈다. 나 지금 여자 아니고 남자인데 왜 이리 집적대는 거지? 그녀가 속으로 기겁했다. 그는 위협적일 만큼 큰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작은 사내가 취향인 걸까? 플로리아가 몸을 뒤로 물리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너무 무례하신 거 아닙니까?”

“뭘 그렇게 까칠하게 굴어.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 형님에게 잘 보이면 귀여워해 줄 텐데.”

느끼한 사내의 말에 플로리아가 미간을 구겼다. 아침에 체크인 카운터에서 팁을 주며 놀러 오라던 누님부터 이 우락부락한 사내까지. 오늘 왜 이러지? 쓸데없이 인기가 많아도 아주 피곤하구나.

“귀여워해 주실 필요 없습니다. 여기 일하러 왔지, 놀러 온 거 아닙니다.”

“톡톡 쏘니까 더 관심이 가는데?”

드래곤이 손을 내밀어서 플로리아의 얼굴을 만졌다. 마치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은 느낌에 그녀가 소리를 빽 질렀고 루치아노가 사내의 손을 낚아챘다.

“초면에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갑자기 억센 힘에 손이 잡히자 사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넌 뭐야? 네가 얘 보호자야? 웬 과민반응이야? 볼이 계집애처럼 야들해서 한번 만져본 것뿐인데….”

“네. 맞습니다. 내가 보호자예요. 그러니 쓸데없는 관심은 꺼주십시오. 문제를 일으키시면 매니저님께 고발하겠습니다.”

루치아노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냉소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사내는 루치아노의 기세에 한풀 꺾인 것 같았다. 수컷들은 몸짓이 작은 사내는 얕본다더니 내가 그 경우인가 봐. 루치아노에게는 꼼짝도 못 하는 사내가 자신은 만만하게 보고 덤빈 것을 생각하니 플로리아는 자존심이 상했다. 젠장! 근육을 키우는 물약도 사 올 걸 그랬다. 플로리아가 속으로 툴툴거렸다.

크루즈에서의 첫날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그들은 식당에서 설거지를 도왔고 오후에는 파티룸에 불려가 파티를 준비했다. 승객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는 없는지 여객선의 안전장치를 검사했으며 구명조끼를 비롯한 안전기구의 개수와 성능도 조사했다.

저녁 식사 시간에는 부족한 인력 대신에 식당에서 승객들을 안내했고 각종 편의시설의 위생 상태와 안전을 파악했다. 다행히도 밤 근무가 없어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객실로 돌아왔다. 처음으로 하는 고된 노동에 그녀의 다리가 퉁퉁 부어 버렸다. 손으로 다리를 두드리는 그녀를 루치아노가 유심히 바라보았다.

“발 마사지해 줄까?”

헉. 속으로 숨을 들이마신 플로리아가 기겁하며 소리를 빽 질렀다.

“절대 안 돼.”

“깜짝이야. 귀청 떨어지겠네. 소리는 왜 지르지?”

“귀공자가 시종처럼 마사지를 해 준다고 하니까 놀라서 그랬지.”

“우리 아버지는 어머니가 피곤해하시면 종종 직접 마사지해 주시곤 해.”

그거야 부부 사이니까 그러지. 너와 내가 같냐? 이 미친놈아! 플로리아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공작님이 자상하시구나.”

“응, 아버지는 아직도 어머니 해바라기야.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렇게 살고 싶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플로리아인 양 루치아노가 뚫어지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몸 둘 바를 몰라서 그녀가 욕실로 허겁지겁 도망쳤다. 등 뒤에서 유쾌한 루치아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망할 자식! 지금 나를 놀려먹은 거지.

그녀가 욕실에서 씻고 있는 동안에 루치아노가 마법 음향기를 돌려 음악을 틀었다. 감미로운 음악이 조용한 객실에서 흘러나왔다. 하루의 피로를 푸는 데는 목욕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뭉쳤던 어깨가 풀어지며 다리에 부기가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타이 매는 법 알려 줄게, 이리 와.”

씻고 나오자 루치아노가 성큼 다가왔다. 그의 손에 타이가 들려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눈을 휘며 웃었다. 마음을 굳게 먹지 않으면 홀라당 넘어갈 것 같은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루치아노에게서 막 씻고 나온 바디 워시 향이 풍겨왔다. 나에게도 좋은 향기가 날까. 플로리아 살며시 자신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그녀가 얼굴이 상기된 채 시선을 피했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플로리아의 모습이 귀여워서 그가 소리 내 웃었다. 이 자식 뭐가 이리 유쾌하고 재밌는 거야. 아주 입이 귀에 걸리게 생겼다. 루치아노가 자신의 목에 타이를 건 채 설명을 시작했다.

“타이를 목에 두른 뒤 이 양쪽 절개선을 잘 잡아. 그런 다음 한쪽을 먼저 돌려서 최대한 강하게 잡아주고 다른 한쪽도 앞에서 뒤로 돌려 다시 잡아준 다음 이런 식으로 크게 돌려. 그런 다음 가운데에서 빼는 거야. 마지막으로 예쁘게 모양을 잡아주는 거지. 할 수 있겠어?”

“응, 해볼게.”

“내 목에다 매 줘 봐.”

그녀가 타이를 잡고 조심스럽게 루치아노의 목에 둘렀다. 어쩔 수 없이 한발 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입을 야무지게 다물고 그의 목을 바라보며 신중하게 타이를 매는 플로리아를 바라보자 루치아노의 기분이 이상해졌다. 막 목욕을 해서 발갛게 상기된 볼이, 내리깐 기다란 속눈썹이, 귀여운 코가, 도톰한 입술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저 입술에 키스하면 얼마나 달콤할까? 코끝에 그녀의 향기까지 더해지니 심장이 쿵쾅거리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때?”

남의 속도 모르고 열심히 넥타이를 매는 태연한 그녀의 얼굴을 보니 괜히 심술이 났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너 때문에 돌 것 같은데.

“너무 꽉 조였어. 나를 목 졸라 죽일 셈이야?”

“그. 그래? 미안. 어? 잘 안 풀리네?”

타이가 꽉 조였다는 말에 그녀가 그의 턱밑에 매달려서 낑낑거렸다. 자꾸만 두근대는 심장 소리를 그녀에게 들킬 것 같아 루치아노가 플로리아를 화들짝 뒤로 밀쳤다.

“내가 할게.”

갑자기 뒤로 밀린 플로리아가 뻘쭘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다고 밀 필요까진 없잖아. 처음이라 서툴러서 그런 건데. 얼굴이 상기되어 넥타이를 푸는 루치아노를 보니 화가 난 것 같았다. 에이, 속 좁은 자식. 목 좀 졸렸다고 그냥 삐지냐?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야?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자꾸 해봐야 느는 거지.”

“누가 뭐래?”

“네가 키가 커서 그렇잖아. 침대에 앉아서 다시 해 보면 안 돼?”

“네가 너무 작은 거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루치아노는 살며시 침대에 앉았다. 두 사람의 눈높이가 맞으니 두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에메랄드빛 눈이 낮에 보았던 바다를 연상시켰다. 루치아노가 자신의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자 이번에는 플로리아가 벌떡 일어나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가 너무 피곤한 거 같아서 눈이 막 감겨. 타이는 내가 혼자 연습할게. 자야겠어.”

“이렇게 갑자기?”

“응. 너어어어무 피곤해. 이렇게 갑자기 잠이 오네. 그리고 빨리 자야 그 분홍 달도 볼 수 있잖아. 오늘 한밤중에 분홍 달이 뜬다고 하지 않았어?”

“응, 맞아, 깊게 잠들면 달을 볼 수가 없어.”

“그, 그러니까. 빨리 자야지. 지금 타이 연습할 때가 아니야. 나 먼저 잘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가 침대로 돌진했다. 밤새 내 목에 타이 연습을 한다고 해도 대주고 있을 텐데…. 입 밖에 내지 못한 말은 마음속에서만 맴돌았다. 갑자기 달콤한 고문 같은 시간이 끝나버렸다. 루치아노의 가슴에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

“고슴도치, 일어나. 눈 뜰 시간이야.”

분명히 분홍 달을 보기로 약속했건만 아무리 깨워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하긴 사내 복장을 하고 헐레벌떡 뛰어다녔으니 피곤한 것도 당연했다. 언제 귀족 영애가 이런 종류의 고된 일을 해봤겠냐고. 하지만 어제 분홍색으로 밝게 빛나는 달을 보고 싶으니 반드시 깨우라고 그녀가 부탁했는데.

“나 깨워 줘야 해. 못 일어나면 침대에서 밀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깨워. 알았지? 분홍 달을 반드시 보고 말 테니까”

잠들기 전에 그녀가 했던 말이 생각나자 루치아노는 망설였다. 이렇게 생겼구나! 깊은 잠에 빠진 그녀는 더 어려 보였다. 그 드래곤이라는 개자식이 만지고 싶을 정도로 뽀송뽀송한 볼,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더워서 이불을 걷어차 낸 그녀의 잠옷 사이로 살짝 보이는 뽀얀 맨살의 윤곽. 그저 보기만 했을 뿐인데 갑자기 얼굴에 열이 올랐다.

자신의 감정변화에 당황해서 그가 헛기침을 했다. 그저 바라만 봤는데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원흉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고슴도치 너무 무방비하잖아. 내가 너를 덮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하지만 그녀가 원치 않으면 손가락 하나 건들지 못할 거란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루치아노는 마음을 다잡고 플로리아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고슴도치, 일어나. 이제 일어나지 않으면 침대에서 던져버린다.”

그녀가 꼼짝도 하지 않자 그가 그녀를 안아서 들어 올렸다. 플로리아는 잠결에 누군가가 자신을 잡아 흔드는 것을 느꼈지만, 너무 피곤하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이리 괴롭히는 거지라고 생각할 때 갑자기 몸이 들리자 플로리아가 눈을 번쩍 떴다.

“무슨 짓이야?”

깜짝 놀라서 그녀가 몸에 힘을 주자 두 사람은 그대로 침대로 넘어졌다.

“앗.”

엉겁결에 루치아노는 침대 위에 눕게 되었고 플로리아가 그를 내리눌렀다.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너 상습범이야. 이 자세 상당히 좋아해. 체술학 시간에 툭하면 나를 덮치더니 아직도 그 버릇을 못 고쳤네.”

루치아노가 혼미해진 정신을 부여잡은 채 장난스럽게 이죽거렸다.

“그러니까 왜 자는 사람을 들고 난리야?”

“네가 깨지 않으면 들어서 던지라고 그랬잖아. 그래서 막 던지려던 참이었지.”

“내 참. 자다가 그럼 내동댕이쳐질 운명이었던 거야? 내가?”

“그렇지. 막 그러려고 너를 들었는데 네가 나를 덮친 거지.”

“덮친 게 아니고 놀라서 중심을 잃은 거지. 그나저나 분홍 달을 볼 시간이 된 거야? 잠깐 눈을 붙인 거 같은데.”

“지금쯤 분홍 달이 멋지게 떠올랐을걸.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지?”

화들짝 놀라서 그제야 플로리아가 자세를 고쳤다.

“너 얼굴이 분홍색 달처럼 빨개졌어. 이러다가 달 되는 거 아니야?”

“놀리지 마. 분홍 달이라니 정말 신기하다.”

“일생에 한 번이나 두 번밖에 볼 수 없는 아주 희귀한 달이야. 안 보고 지나가기는 너무 아쉬워. 그래서 깨웠어. 아주 특별한 달을 보는 특별한 밤이라서.”

“특별한 밤?”

“분홍빛 보름달이 뜨는 특별한 밤에 소원을 빌면 펠레 여신이 들어준데. 특히 연인이 동시에 사랑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해.”

“사랑을 이루어 준단 말이야? 진짜로?”

“그렇다니까. 솔로들은 탈출을 기원하고 커플이면 사랑이 이루어지길 기원하고 짝사랑이면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길 기원하고 아무튼 분홍 달은 사랑의 달이야.”

“그럼, 우리도 빌어야지.”

“당연하지. 그래서 내가 너를 깨운 거잖아. 나가자.”

두 사람은 발코니로 나갔다. 밤하늘에 정말로 불그스름한 달이 떠 있었다. 어떻게 저런 빛깔의 달이 뜰 수가 있지? 보기만 해도 신기했다.

“진짜. 희한하다. 도대체 달 색깔이 왜 저래?”

“사랑에 빠진 달이 연인에게 고백하기 전에 색깔이 바뀌었다는 말도 있고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어떤 이야기가 맞는지는 아무도 몰라. 여신 펠레가 사랑에 빠졌다는 말이 제일 신빙성이 있어.”

분홍 달이 너무 예쁘고 신기해서 두 사람은 말없이 한참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자꾸 보니 달이 우리 배를 따라오는 것 같아.”

“착시 현상이야. 하지만 뱃길 여행에 무서워하지 말라고 환하게 비춰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네. 자, 이제 소원을 빌자.”

두 사람은 잠시 분홍빛 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 루치아노가 눈을 뜨니 플로리아가 여전히 양손을 꼭 쥔 채로 소원을 빌고 있었다. 욕심 많은 고슴도치가 분홍 달에게 빌 게 많은 모양이었다.

“무엇을 빌었어?”

루치아노가 궁금한 얼굴로 플로리아를 응시했다.

“딱 네 가지 소원을 빌었어. 그중 하나라도 여신 펠레가 들어주면 좋겠다.”

“흠. 네 가지라, 알 것도 같은데?”

“내 소원인데 네가 어떻게 알아?”

“고슴도치 소원이야 뻔하지 뭐. 아카데미 무사히 졸업하기?”

“와. 귀신! 하나 맞췄어.”

“또 맞출 수 있을 것 같은데? 엄마가 건강해지기 아니야?”

플로리아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이 자식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잖아.

“내 속이 그렇게 빤히 들여다 보이냐?”

“세 번째는 생명의 손이 돌아오게 해 주세요.”

“기가 막혀. 내가 이렇게 다 읽히는 여자였다니.”

“온실에서 나에게 말했잖아. 능력을 되찾게 도와달라고.”

“맙소사.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이제 그만해. 꼭 귀신에게 홀린 것 같아.”

“그러니 까불지 마. 너는 뛰어봤자 이 루치아노 님 손바닥 안이니까. 어때 내 능력이. 놀랍지? 존경스럽지?”

“딱 일 분 전까지는 존경스러웠어. 하지만 네 입이 나불대는 순간 그 존경심은 날아갔고.”

“하하, 빨리도 사라졌네. 마지막 하나는 뭘까?”

“절대로 말 안 할 거야. 궁금해서 죽어버리라고.”

“고슴도치. 정말 유치하군.”

네 번째 소원을 루치아노가 안다고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유치해도 할 수 없어. 너의 소원은 뭐였어? 무엇을 빌었지?”

“알면 깜짝 놀라서 경기할지도 몰라. 그러니 내 소원도 비밀이야.”

“치사하다. 내 소원은 다 말해놓고.”

플로리아가 자신을 좋아하게 해주세요. 이것이 루치아노의 소원이었다. 실제로 그는 요즘 매일 플로리아의 꿈을 꾸었다. 깨어있을 때는 이성으로 자제할 수 있는 감정이 무의식에서는 봉인이 풀려버렸다. 그는 꿈속에서 그녀에게 키스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플로리아의 네 번째 소원은 루치아노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해 주세요, 였다. 두 사람의 상반된 소원에 여신 펠레만 골치가 아프게 생겼다. 발코니에서 뜻 깊은 시간을 보내고 두 사람은 다시 객실로 들어왔다. 빨리 자지 않으면 내일 일하는 데 지장이 있기에 그들은 억지로 침대에 누워서 눈을 붙였다.

*

슈퍼 플레임 호는 펠레 아일랜드를 향해서 순항을 계속했다. 일주일의 항해 동안 다행히도 황자와 플로리아는 부딪힐 일이 없었다. 하지만 항해 일주일째 되는 날 드디어 일이 터졌다. 황족과 고위 귀족만 출입할 수 있는 특급 칵테일 바에서 도우미를 요청한 것이다.

도도한 자태의 엘리자베스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은 채 레오나르도를 타박했다.

“오라버니, 도대체 언제 플레임 공자를 불러줄 거야?”

“왜 따라와서 귀찮게 굴까? 황족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다니. 너는 사랑 앞에서 염치가 없구나.”

“염치? 그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오라버니가 언제부터 염치를 따지는 사람이었지? 사랑에 염치가 어디 있어?”

“왜 이리 입이 거칠지? 동생아! 품위를 지켜라. 너는 이 나라의 황녀야. 그렇게 입을 함부로 놀리니 황태자와 황후가 우리를 무시하는 거 아니냐?”

한참 사춘기 황녀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분명했다. 갈수록 입이 걸어지며 안하무인이 되어 가는 여동생 때문에 레오나르도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예예, 품위에 살고 품위에 죽는 황자 전하. 어서 플레임 공자를 불러주시죠.”

“보채지 마라. 아무리 황녀라도 들이대는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는 별로 없다. 숙녀라면 기다릴 줄 알아야지.”

“정말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이야. 요즘 적극적인 여자가 대세라는 것을 모르는 구세대 황족 같으니. 오라버니는 나이도 어린데 꼭 황제 폐하와 같은 소리만 해. 하여튼 구려.”

엘리자베스가 신랄하게 레오나르도를 비난했다.

“구려? 어디서 이상한 말은 배워가지고! 플레임을 부르려고 했는데 구린내 나는 오라버니는 서운해서 마음이 바뀌려 하네.”

“오라버니, 품위와 위신을 중요하게 여기시니 참으로 진정한 황족이십니다.”

엘리자베스가 장난스럽게 태세를 바꾸자 극명한 변화에 황자가 혀를 내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