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프롤로그

지난밤 고민하느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플로리아가 벤치에 앉아 루치아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카데미는 새 학기의 시작으로 분주했고 학생들은 활기찬 분위기를 풍기며 삼삼오오 어울려 아카데미 교정을 걸어갔다. 그 모습을 훑어보는 그녀의 표정이 자못 비장해 보였다.

잠시 후 루치아노가 헐레벌떡 뛰어와 가쁜 숨을 골랐다. 그가 채 숨을 고르기도 전에 플로리아의 입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초조했기에 용기가 사라지기 전에 본론을 꺼낸 것이다.

“루치, 내 가짜 연인이 되어 줘.”

긴장했던 그의 근육이 순간 나른하게 풀렸다. 아침부터 플로리아의 연락을 받고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했던 게 무색한 순간이었다.

“하! 고슴도치, 다짜고짜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그가 황당하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고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나 보지. 난 똥줄이 탄단 말이다. 하지만 속내를 다 뒤집어 그에게 보여줄 순 없었다. 뻔뻔하다는 말에 열이 올랐지만 플로리아는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다시 용기를 냈다.

“어처구니없는 제안이라는 거 알아. 하지만 난 지금 아주 절실해.”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그 도도하고 무심한 플로리아 조이가 할 제안은 아닌 거 같단 말이지.”

훤칠한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그는 플로리아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었다. 곧은 눈길로 자신을 응시하는 루치아노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사소한 동작 하나마저도 빛이 나 보이며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압도적인 그의 존재감 때문에 그에게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다 들었으면서 진짜 이러기야? 네가 필요해. 정확히는 너와의 접촉이.”

플로리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하고 있지만 숨겨둔 감정 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시리도록 아려왔다. 이런 제안이 살 떨리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걸까?

“진짜 연인이 아니라 진짜인 척하는 가짜 연인이 되어 달라는 말이군.”

“그래. 오죽하면 이러겠냐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이 최선이야.”

그러니 나와 가짜 연애하자고 제발. 루치, 너 나 좋아하잖아. 아니 좋아했잖아. 그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지만 플로리아는 속내를 꾹꾹 눌러 참았다.

“일 년 전에도 이런 대화를 한 것 같은데. 그나저나 그 머리통은 필요할 땐 이기적으로 잘도 돌아가는군.”

그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비아냥거렸다. 날카로운 지적에 플로리아의 낯이 또다시 뜨거워졌다.

“변명은 하지 않을게. 이기적이라 생각해도 어쩔 수 없어.”

루치아노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난감한 기색을 띠었다.

“플로리아 조이, 너는 네가 이용하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아.”

“이용하다니 내가 양아치 같다. 나도 알만큼은 알거든?”

“글쎄, 과연 그럴까?”

“너는 내 친구야. 동시에 꼴 보기 싫은 나의 강력한 라이벌이기도 하지.”

“꼴 보기 싫은? 듣기 좀 거북하네.”

“불행하게도 우리 아버지 조이 백작이 제일 싫어하는 가문의 아들이기도 해.”

“제일? 아찔하다.”

“황녀 엘리자베스가 너의 배필이 되기를 어른들은 바라고 계시지.”

“말 그대로 어른들의 어처구니없는 생각일 뿐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친구지. 그것도 아주 친한 친구.”

그리고 너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비록 표현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녀는 루치아노를 겨울 내내 그리워했고 진심으로 그를 다시 만나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절대 이 감정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친구니까 무조건 너의 부탁을 들어달라?”

“응, 친구란 그런 존재잖아. 들어 줄 거지?”

“그럼 내 마음은? 네가 준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다는 것엔 신경도 안 쓰지, 넌.”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완벽한 남자가 상처 입은 표정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그, 그랬어? 그렇다면 진심으로 미안해.”

그의 고백을 한 방에 뻥 하고 찬 일을 말하는 거라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나를 감당할 수 없다면서 거절해놓고 이제 와서 가짜 연인 행세를 해달라니. 어떻게 하면 그런 엉터리 생각을 할 수가 있지?”

“루치, 오해하지 마.”

“오해? 도대체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네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도 되는 장난감?”

아직은 쌀쌀한 바람에 루치아노의 불꽃같은 붉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플로리아는 바짝 긴장한 채 속으로 숨을 몰아쉬며 뛰는 가슴을 달랬다.

“왜 이리 삐딱하게 굴어. 아니라는 거 잘 알잖아. 물론 그렇게 말하는 네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 이해씩이나?”

“비꼬지 마, 루치. 나는 엄청 심각하니까.”

그가 기분 나빠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좋아한다는 고백을 단칼에 쳐 낸 주제에 이제 와서 가짜 연인을 제안하는 그녀가 얼마나 가증스럽겠는가. 하지만 마법 수업을 받은 결과 자신은 루치아노가 없이는 꼬인 마나를 고칠 수도, 마법 공부를 계속할 수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이 지긋지긋한 저체온증 때문이었다.

# 2 시험의 결과

1월 펠레 아카데미 입학 한 달 전.

플로리아 조이는 아버지의 집무실 소파에 앉아 초조하게 손톱을 쥐어뜯었다. 그녀는 극심한 두려움을 느끼며 막시무스 조이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 조이 백작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방금까지도 훑어 내리던 서신을 책상 위에 내동댕이쳤다.

편지는 마치 그녀를 비난하는 것처럼 탁 소리를 내며 책상 위로 떨어졌다. 플로리아는 12월 초에 펠레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을 치렀고 그 결과는 지금 내동댕이쳐진 편지 속에 또렷이 쓰여 있었다.

“차석을 했구나. 플로리아 조이.”

“죄송합니다.”

“수석을 하지 못할 바에는 아카데미에 갈 필요도 없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

아버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터지기 일보 직전의 화산처럼 그의 얼굴이 실망과 분노로 시뻘게졌다. 플로리아의 심장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펠레 아카데미에 차석으로 합격한 것도 대단한 일이었지만 조이 백작에게는 수석 이외에 다른 것은 아무 가치도 없어 보였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수석은 루치아노 플레임이 했더구나.”

“…….”

“입이 눌러 붙기라도 한 것이냐? 그 잘난 입으로 변명이라도 해보아라.”

“루치아노 플레임은 명석한 두뇌를 가진 뛰어난 인재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제 머리로 그런 공자를 따라잡기가….”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늘어놓는 것이냐! 모든 일은 노력 여하에 달렸다고 그렇게 당부를 했건만. 네가 한심하게 잠이나 자며 버린 시간에 공부를 더 했다면 다른 결과를 가져왔겠지.”

“노력했어요. 잠도 덜 자고 최선을 다해서 했….”

“닥쳐라! 네가 라인하르트의 반만 닮았어도 이렇게 분통이 터지지는 않을 것이다. 네 오라비는 수석 합격 통지서를 안겨줬었다. 게다가 4년 내내 수석을 놓친 적도 없는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오빠가 죽은 지 벌써 삼 년이나 지났다. 오빠 대신 느닷없이 가문의 후계자가 되어버린 플로리아는 아버지의 감시하에 살벌하고 혹독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긴 시간이 흘렀지만 오빠의 망령은 여전히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럼 뭐해요! 오빠는 죽었어요. 아버지 자식은 이제 못난 저 하나 남았다고요!”

“괘씸한 것 같으니! 내 자랑스러운 아들의 죽음을 입에 올리지 마라.”

“외면한다고 오빠가 살아 돌아오나요? 이제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저는 오빠가 아니에요. 아무리 노력해도 저는 라인하르트 조이가 될 수 없다고요!”

죽은 오빠와 자신을 비교하며 멸시하는 아버지의 눈초리를 참지 못해 내뱉은 말은 아버지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 네가 고삐가 풀려도 단단히 풀렸구나. 고삐 풀린 망아지는 교육을 받아야 하는 법이지. 당장 내 방으로 따라와라!”

“아버지!”

플로리아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치솟았다. 그녀는 공포에 휩싸인 채 아버지를 불렀다. 비명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올까 봐 벌벌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혹시라도 이런 결과를 얻게 될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밤을 새워가며 공부했다. 하지만 루치아노 플레임이란 산을 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걸까.

루치아노 플레임은 펠레아 제국 명문 세가의 소공자였다. 하필이면 그의 집안은 조이 백작가와는 정적인 가문이었다. 조이 백작 가문은 대대로 귀족파의 선두주자였고 플레임 공작가는 왕정파를 대표하는 가문이었다. 당연히 두 가문의 수장은 사사건건 의회에서 부딪혔고 팽팽하게 대치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이벌 가문의 아들에게 수석 자리를 빼앗겼으니 아버지가 흥분하실 만도 했지만, 도대체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코피를 흘려가며 공부했으나 녀석의 비상한 머리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이 결과로 증명된 셈인데.

“당장 일어나지 못해?”

“최선을 다했어요! 정말이에요. 믿어주세요!”

“못난 놈. 패배자의 변명일 뿐이다.”

조이 백작은 차갑고 냉랭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망연자실한 채 아버지를 바라보는 플로리아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다가올 폭력에 그녀의 가녀린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아버지!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조용히 따라와라. 노력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지.”

따라가지 않으려는 딸의 손목을 움켜쥔 채 조이 백작이 집무실을 나갔다. 플로리아가 발버둥을 쳤지만, 검술로 다져진 아버지의 힘을 당해낼 순 없었다.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플로리아는 아버지에게 질질 끌려갔다. 백작의 방안에 이중으로 잠긴 방 속에서 플로리아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오로지 몰래 불려온 신관만 알았다.

그는 비밀리에 불려와 플로리아의 몸에 난 상처를 깔끔히 치료하고 사라졌다. 그날 밤 플로리아는 고열에 시달렸다. 신음하는 아가씨를 발견한 유모가 백작에게 급히 이 사실을 알렸고 바로 가문의 주치의가 불려왔다. 하지만 주치의는 무기력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다급해진 조이 백작은 제국 내에 명성을 떨치는 명의를 집안으로 불러들였다. 그 명의 덕분에 플로리아의 고열은 잡혔지만, 결국 치명적인 부작용은 면치 못했다. 그녀는 체내에 마나가 꼬이고 체온이 떨어지는 이상 증상 때문에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있어야만 했다.

*

플로리아가 집에서 두문불출하고 연락이 되지 않자 그녀의 절친 세레나가 조이성을 찾아왔다.

“리아 아가씨, 세레나 블랙 아가씨께서 오셨어요.”

유모의 말을 듣자 플로리아가 침대에서 힘없이 일어났다. 며칠 동안 입맛이 없어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더니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녹빛 눈동자 또한 생기 없이 퀭해 보였다.

“일어나기 힘드시면 세레나 아가씨를 이리 모셔올까요?”

“아니, 언제까지 침대에 있을 순 없어. 친구가 왔는데 침대에서 맞이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고.”

“절대로 무리하시면 안 돼요. 힘드시면 바로 저를 부르셔야 합니다. 아셨죠?”

“알았어. 유모 잔소리 때문에 없던 병도 생기겠어.”

내키지 않았지만 친구를 외면할 수도 없었기에 그녀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가씨가 다시 건강하게 일어나시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미소를 지으며 유모 비앙카가 능숙하게 아가씨의 시중을 들었다. 플로리아는 모든 단장을 마치고 천천히 응접실로 내려갔다. 세레나는 아직은 차가운 겨울바람이 들어오는 창밖을 바라보다 그녀를 보고 활짝 웃었다. 세레나의 웨이브 진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그런 친구를 플로리아가 무심한 풀빛 눈으로 바라보았다. 구불구불한 푸른빛이 도는 검은 머리와 푸른 눈동자를 가진 세레나는 블랙 백작 가문의 여식이자 플로리아와는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소꿉친구였다.

“안녕, 리아! 나 안 보고 싶었어? 나는 진짜 보고 싶었는데.”

“나도 보고 싶었어. 조이성에는 어쩐 일이야?”

플로리아의 영혼 없는 목소리에 세레나가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가왔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두 사람은 마음속에 담아놓은 고민도 함께 털어놓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리는 사이였다. 하지만 이제는 도통 플로리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고 세레나는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야만 서로 보는 사이야? 이러면 언니 섭섭하다.”

“연락 없이 왔기에 물어본 거야. 진짜 왜 왔어?”

“보고 싶어서 왔다니까. 하도 연락이 없기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려고.”

“멀쩡히 살아있지. 설마 오빠처럼 느닷없이 죽었을까 봐?”

세레나가 심드렁하게 말을 내뱉는 절친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든 것이 예전 같지가 않았다. 표정, 말투, 몸짓까지 모든 것이 무뚝뚝하게 변한 이 아이가 자신이 아는 플로리아가 맞는 건지. 그녀의 오빠 라인하르트 조이가 죽은 뒤로 플로리아는 완전히 달라졌다. 달라진 것은 비단 플로리아뿐만이 아니었다.

이 집안 전체가 이상해졌다. 백작 부인은 우울증에 시달렸고 조이 백작은 웃음을 잃어버렸으니. 분위기는 어찌나 살벌한지 플로리아를 보러 올 때마다 눈치가 보였다. 플로리아만 아니라면 백작가에 발길을 끊었을지도 몰랐다.

“이제 다 나았어? 완전히 회복된 거야?”

“응. 많이 좋아졌어. 이제 어지럽지도 않은걸.”

사실은 체내에 꼬인 마나 때문에 체온 조절이 되지 않아 저체온증을 앓고 있었다. 설상가상 마나가 날마다 줄어들어 마법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었지만 구질구질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친구가 자신의 불행을 알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오빠가 죽고 아버지에게 매를 맞아도 무심한 세상은 여전히 상관없다는 듯이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사실을 알게 되면 원인이 무엇인지 파고들다가 결국 아버지의 폭력이 드러날 수도 있었기에. 그건 결국 제 얼굴에 침 뱉기였다.

“다행이다. 걱정했잖아.”

“이래 봬도 보기보다 강골이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참, 리아, 축하해. 차석했다는 소식 들었어. 네 성적이 월등히 우수한 바람에 나만 혼났지 뭐야. 똑같이 공부했는데 내 성적은 왜 그 모양이냐고 부모님에게 구박을 좀 당했지.”

세레나가 웃으며 장난스럽게 투정을 부렸다.

“세상 모든 부모는 비슷하구나. 나도 수석 못 했다고 아버지께 한 소리 들었는데.”

“정말? 루치아노 플레임이 수석인 걸 아시면서도 뭐라고 하신 거야?”

플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에 대한 말을 했을 뿐인데 자기도 모르게 솜털이 곤두섰다.

“백작님 욕심이 하늘을 찌르네. 차석도 정말 대단한 거야. 절대 기죽으면 안 돼. 루치아노 플레임은 뛰어나다고 정평이 나있는 공자라고.”

“맞아,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그런 우수한 소년을 어떻게 이기겠어.”

“못 이길 것도 없지. 하지만 그러면 인생이 너무 재미없잖아. 그러니 이길 생각을 할 게 아니라 어떻게 아카데미 생활을 즐길까 그 생각을 하자고. 우리 청춘은 이제 시작이니까!”

“하지만 수석을 하지 않으면 다음 학기에 등록금과 용돈을 끊어버린다고 협박하셨단 말이야.”

“뭐? 정말 그렇게까지 말씀하셨어?”

“수석을 하지 못할 바에는 때려치우라고 했다니까. 그래서 돌아버릴 것 같아.”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차석을 한 일로 아버지께 맞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말을 하면 자신의 치부를 까발리는 일이었다. 명성이 자자한 조이 백작이 자식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말을 도대체 어디 가서 한단 말인가. 하지만 반드시 수석을 해야 하는 자신의 입장 정도는 말해도 되겠지. 세레나의 푸른 눈이 안쓰럽다는 듯이 플로리아를 응시했다. 감정이입이 된 세레나는 얼굴을 상기시키며 열변을 토했다.

“백작님 너무 하신다. 펠레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위해 네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데. 차석도 양에 안 차서 수석을 하라니. 그럼 너는 아카데미에 입학하면 미친 듯이 공부만 해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렇지. 수석을 따라잡으려면 그래야겠지.”

“어떡하니, 고생문이 열렸네.”

“아무래도 망한 것 같지?”

“어떡해? 그래서 기분은 괜찮아?”

“그럭저럭…, 뭐 어쩌겠어. 아무튼 걱정해 줘서 고마워, 셀.”

플로리아가 공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억눌린 감정을 끄집어내어 친구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혼자 잘 참고 견디면 될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