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2)

“못 올라가시겠습니까?”

“옷이 이래서 아무래도 힘들겠습니다.”

재윤의 등을 밟고 담장을 넘으려던 시연은 거추장스러운 옷 때문에 번번이 미끄러졌다. 몇 번을 시도해도 결과는 똑같았다. 조금 전 겪었던 충격적인 일에 맥이 탁 풀려버렸던 터라 더욱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밟고 있던 재윤의 등에서 내려온 시연은 높기만 한 담장을 고개를 들고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었다.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내리는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시연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어째서 거기에 올라가 계시는 겁니까?”

시연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훌쩍 담장 위에 올라선 재윤을 보았다.

“손을 내밀어 보십시오.”

담장 위에 자리를 잡은 재윤이 시연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말입니까?”

일단 재윤이 시키는 대로 하는 시연이었다. 재윤은 그녀의 팔을 단단히 붙잡더니 위로 들어 올렸다. 어찌나 힘이 센지 시연의 발이 허공에 둥둥 떠올랐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재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던 시연은 담장 위에 발을 걸치려고 노력하였다. 두 사람이 힘을 합친 결과 시연은 담장 위에 올라 있었다.

“이제 제가 먼저 내려가서 잡아드릴 테니 내려오십시오.”

재윤은 잠시 숨도 돌리지 않고 곧바로 담장 아래로 펄쩍 뛰어 내려갔다. 이제 그는 두 팔을 벌린 자세로 시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 하고 계십니까? 얼른 내려오십시오.”

서두른다고 서둘렀으나 해가 이미 서산 아래로 기울고 있었다. 꾸물거릴 시긴이 없었다.

“혹 무서운 것입니까?”

조급한 마음에 그녀가 두려워서 망설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였다. 재윤은 머뭇거리는 시연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붉은 노을 탓인지는 몰라도 자신을 쳐다보는 재윤의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검은 눈동자는 맑고 영롱하게 빛이 났다. 살짝 일그러진 진한 눈썹에 이상하게도 가슴이 뛰었다. 열릴 듯 말 듯 하다가 열린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중저음의 목소리는 시연의 얼굴을 화르르 달아오르게 하였다.

‘어쩐지 저 품에 안기는 게 부끄럽단 말이야.’

재윤에게 처음 안기는 것도 아니면서 괜스레 쑥스러웠다. 그래서 시연이 망설이고 있단 걸 모르는 재윤은 그녀를 향해 더욱 손을 뻗었다. 곧, 그 손이 시연의 허리를 감싸려 하고 있었다.

“제, 제가 알아서 내려가겠습니다.”

커다랗게 뛰는 심장 소리를 재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여 스스로 내려가려 담장을 짚던 순간의 일이었다.

오늘따라 여러 사람이 드나들며 밟고 누른 탓에 금이 가 있던 기왓장이 작은 힘에도 쨍그랑 소리를 내며 부서져 버렸다. 그로 인해 시연의 몸이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며 균형이 무너졌다. 이미 아래로 내려서려고 몸을 움직이기도 했던 참이라 그녀는 바닥으로 속절없이 추락하였다.

그때, 재윤이 잽싸게 시연의 허리를 팔로 감쌌다. 그녀를 품에 꼭 안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으십니까?”

담장 위에서 떨어진 시연보다 외려 재윤이 더 놀란 상황이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품 안의 시연을 내려다보았다.

“덕분에 괜찮습니다.”

“손, 손 한 번 줘 보시겠습니까?”

그 말에 따라 시연이 담장을 짚었던 손을 내밀었다. 재윤은 자그마한 시연의 손을 꼼꼼히도 살폈다. 다행히 어디 한 군데 다친 곳이 없다는 확인이 끝나고 나서야 그녀는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아버지도 한잔하세요.”

“이 녀석이.”

“오늘같이 기분 좋은 날 안 하면 언제 합니까. 자, 소자의 술 받으세요.”

승주는 싫다는 권명길의 잔에 가득 술을 따랐다. 그리고 자신은 술병째로 입으로 가져갔다.

“캬, 술맛 좋다. 아니 그렇습니까, 아버지.”

“그만두어라.”

“왜요? 소자가 따라주는 술은 맛이 없습니까?”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구나.”

술주정을 부리는 승주의 모습에 권명길은 질색하였다. 그러나 지켜보는 시선들이 많아 억지로 입가를 길게 늘이고 있었다. 그는 오직 자신과 가까이 있는 승주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그러자 승주가 듣기 싫다는 것처럼 일부러 손가락으로 귀를 후벼팠다. 그 모습이 권명길을 화나게 하리란 걸 잘 알고서 하는 행동이었다. 그는 권명길의 분노를 자신에게로 끌어내려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재윤에 대해선 잊을 터였다.

더는 참지 못한 권명길이 귀한 손님들이 있단 사실도 잊은 채로 승주에게 한마디 하려던 순간이었다. 승주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가까이 앉아 있던 우의정 윤석환에게 갔다. 그걸 본 권명길의 이마에 핏대가 섰으나 승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상 대감께서 제 잔을 한 잔 받아주시겠습니까?”

“한 잔 따라보게.”

수염을 만지며 승주의 추태를 지켜보던 윤석환은 꽤 흥미로운 전개라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술잔에 가득 따라진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승주를 향해 내려놓았다.

“내 잔도 한 잔 받겠는가?”

“영광이죠.”

승주가 두 손으로 잔을 들었다.

“술을 꽤 좋아하는 모양인데, 어떤 술을 가장 좋아하는가?”

“술이라면 아무거나 다 좋습니다.”

승주가 씩,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그리고 술잔을 비웠다. 흥이 오른 그는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며 방 안을 돌아다녔다. 권명길이 이를 악물고 그만두라고 말하였으나, 그는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급기야 그는 비좁은 방을 벗어나 앞뜰로 나갔다.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찬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누볐다. 내키는 대로 손으로 음식들을 집어 먹었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술병을 들고 병나발을 불었다.

때마침 시간이 늦어 귀가하려던 아녀자를 발견하고는 다가가 어깨에 무람없이 팔을 얹었다. 여인이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승주는 팔을 치우지 않았다.

“어딜 가십니까? 잔치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놓아주시지요.”

“왜 이렇게 까칠하게 나오십니까. 그러지 말고 저랑 술 한잔하시는 거 어떠십니까?”

추태를 부리던 승주의 고개가 찰싹 소리와 함께 한쪽으로 돌아갔다. 더는 가문을 창피하게 만드는 승주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던 권명길이 승주의 뺨을 때린 것이었다.

“술을 마시려면 곱게 마실 것이지. 이 좋은 날 이 무슨 추태더냐.”

“에이, 술맛 떨어져.”

“뭐라? 지금 뭐라고 하였느냐?”

승주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권명길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묘한 증오심이 담겨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승주에게 잡혀 있던 여인은 슬그머니 도망을 쳤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는 걸 그만두지 않았다.

“아버지께서는 소자가 하는 건 뭐든 마음에 안 드시죠?”

내내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말이 술기운을 핑계로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느닷없는 승주의 말에 놀라는지 권명길이 살짝 움찔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서늘한 시선으로 승주를 쳐다보기만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그냥 철없는 놈의 치기 어린 행동이라며, 웃어넘길 수 있는 일에도 발끈하신 거 아닙니까.”

“치기 어린 행동이라 하였느냐?”

아직도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모르는 승주에게 권명길은 더더욱 화가 나는 듯하였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였다. 당장이라도 배 속에서부터 끌어 올린 고함을 지르려고 그는 준비 중이었다.

그 순간 승주의 시야에 고개를 끄덕이는 강찬이 들어왔다. 시연이 오면 신호를 주기로 미리 약조해놓았고, 그 신호를 방금 강찬이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하아, 올 거면 조금만 더 일찍 오지.’

그렇지 않아도 냉랭하던 두 부자 사이의 관계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승주가 마른침을 삼키며 무겁게 두 눈을 감았다. 권명길에게 맞은 부위가 얼얼하였다. 혓바닥으로 볼 안쪽을 쓸던 승주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대감, 그만두세요. 아직 어린아이가 아닙니까. 뭘 몰라서 그런 것이니 대감께서 용서하세요.”

두 사람을 지켜보는 눈들이 많았다. 하여 잠자코 있던 정 씨가 달래는 듯한 어조로 권명길을 향해 다가섰다. 하지만 승주가 권명길의 심기를 더욱 자극한 지금 그녀가 나선 건 계산된 행동이었다.

“승주야, 오늘 네가 술이 과한 것 같구나. 이만 방으로 돌아가 보는 게 어떻겠느냐?”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정 씨는 승주를 방으로 보냈다. 겉으로는 아비의 화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가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속내는 가족들 일에서 승주를 제외하는 것이었다.

문득 서러움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쳤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금은 그 예상이 빗나가길 바라였다. 한데 어쩜 이렇게 조금도 다르지 않은지. 승주는 씁쓸한 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승주의 난동에 까맣게 잊고 있던 재윤이 떠오른 권명길이었다.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재윤을 불러오라 하인에게 일렀다. 시연의 아비인 김영흠 없이라도 오늘이 지나기 전에 혼례식을 치러야 남은 체면이라도 챙길 듯해서였다.

“그것이…….”

“재윤이 그놈도 술독에 빠지기라도 한 것이냐?”

머뭇거리는 하인에게 권명길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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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하겠습니다.”

시연은 서툰 솜씨로 바느질을 하는 재윤의 손에서 바늘을 가져가려 하였다.

“이러다 바늘에 손가락이 찔리겠습니다. 혹 제가 아프길 바라는 것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시연은 답답해서 그런다며 가슴을 작게 콩콩 두드렸다.

“이리 주십시오. 제가 하면 금방 합니다.”

“두 번째 계약 조항 잊으셨습니까?”

“그걸 어찌 잊겠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이었는지 한번 말씀해보십시오.”

시연에게 그렇게 말한 재윤은 그동안에도 서툰 손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의복을 다려달라는 조항이었습니다.”

“그것 외에 하라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바느질은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라며 재윤은 고집을 부렸다. 이러다 하늘에 남아 있던 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릴까 애타는 시연의 마음을 그는 알지 못하는 듯하였다.

“이러다 혼례식을 치르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재윤이 힐끗 창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바깥에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권명길은 이렇게 많은 손님을 불러놓고 그냥 가라고 할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그의 체면이 걸린 일이기에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늘 자신과 시연이 혼인토록 할 것이 분명하였다.

확신에 찬 재윤과 달리 시연은 햇발이 짧아져 갈수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재윤의 바느질 속도가 느린 것도 그녀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대체 뭘 하고 있길래 방 안에 틀어박혀 온종일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냐!”

하다못해 김영흠이라도 설득하고 있어야 할 재윤이었다. 늘 자신을 흡족하게 하던 아들이 여인 하나에 미쳐 허우적대는 꼴이 눈꼴 사나웠던 권명길의 말투는 곱지 않았다.

허락도 없이 벌컥 문을 열던 권명길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를 따라서 재미난 구경을 하러 왔던 몇몇 사람들이 시연의 활옷을 고치는 재윤을 보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자네 아들이 급했던 모양일세.”

영의정으로 자신 못지않은 권세를 자랑하는 곽정이 권명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재밌다는 듯한 어조로 말하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신랑 신부가 재미를 좀 볼 수 있게 물러나 주자며 데리고 나갔다.

**

조그맣게 남아 있던 햇살마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세상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그때, 화르르 불타오른 불길 하나가 있었다. 점점 커진 불길은 온 집안을 대낮같이 환하게 밝혔다.

온종일 남의 집 방구석에 틀어박혀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김영흠마저도 밖으로 나왔다. 기나긴 기다림도 아깝지 않을 만큼 신부는 아름답고 신랑은 늠름하였다.

달맞이꽃처럼 활짝 피어난 고운 여인은 수모의 부축에 따라 절을 올렸다. 그 모습을 모두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예정보다 훨씬 늦어진 혼례식에 못마땅함이 그득하였던 권명길조차 시연의 단아한 기품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모습에 어깨를 으쓱하며 만족감을 드러내었다. 부러움이 담긴 사람들의 시선은 그의 불만을 빠르게 사라지게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시연은 재윤의 아내가 되었다. 하늘엔 해가 아닌 달이 떠올라 있었지만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특별함으로 꽉 찬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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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 방으로 들어온 두 사람을 반기는 건 좀 전에는 보이지 않던 비단 금침이었다. 방 한가운데 곱게 깔린 그것을 본 순간 시연의 얼굴이 잘 익은 석류처럼 달아올랐다. 살짝 고개를 아래로 숙인 그녀는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내 방문을 닫은 재윤이 가볍게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쌌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를 데리고 방 깊숙한 곳으로 걸어갔다.

“피곤하시지요.”

혼례식 하나만으로 벅찬 일정이었다. 한데 예기치 않은 상황의 연속은 두 사람의 진을 쏙 빼놓았다.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려버렸다. 잔잔한 재윤의 음성엔 지친 기색이 완연하였다.

시연은 대답할 기운도 없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해가 간다는 듯 재윤이 그녀의 작고 여린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주었다.

“이리 와 보십시오. 우선 옷부터 벗겨 드리겠습니다.”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숨을 돌린 재윤이 꺼낸 말에 시연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그녀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그걸 발견한 재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입고 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

시연의 잇새 사이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미 서로의 벗은 몸도 다 본 사이에 뭘 그리 당황하십니까.”

이어진 재윤의 말에 시연은 벌렸던 입술을 꾹 다물며 심각한 얼굴을 하였다. 괜스레 그가 밉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아까는 아무것도 못 봤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시연이 퉁명스럽게 톡 쏘아붙인 후에 두 팔로 가슴을 가렸다.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그녀는 쓱 엉덩이를 돌려 등을 보이고 앉았다.

“긴장한 것 같아 풀라고 해본 농담입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 같던데요.”

그렇게 대꾸하며 시연이 아랫입술을 삐쭉였다.

“정말 농담입니다. 맹세코 전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믿어도 되는 것입니까?”

시연이 고개만 살짝 돌려 재윤을 보며 물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 심장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니라고 해도 믿을 수밖에 없잖습니까.”

“그래서 싫으십니까?”

그건 아니라는 듯 시연이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이리 오십시오. 온종일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고 이리저리 뛰어다니셨으니, 얼마나 고되십니까.”

재윤은 시연이 연이어 찾아온 시련에서 자유롭길 바라였다. 그러기 위해선 거추장스러운 옷부터 어떻게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하였다.

시연의 살결에 조금도 닿지 않으려는 듯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주의를 기울이는 진지한 모습에 시연의 시선은 재윤의 얼굴 위에 한참이나 머물렀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쳤다.

자석에 이끌린 듯 맞닿은 시선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방 안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말았다.

시연은 점차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러다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시선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한편으로는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였다. 재윤의 깊고 잔잔한 눈동자 속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때, 쿵 하는 커다란 소리가 나더니 방문이 활짝 열렸다.

“어머나!”

소스라치게 놀란 시연은 어깨를 자잘하게 떨었다. 재윤은 본능적으로 시연의 앞을 지키듯 막아섰다. 그리고 시선을 방문에 두었다가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