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해를 넘기면 평생 독수공방…?!

사각… 사각… 사각….

조용한 회사 회의실 안에 사각사각 연필 깎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ASMR처럼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소리에 취해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는 수희.

규칙적인 패턴으로 아련히 퍼져가던 그 소리가 갑자기 멈추는 듯싶더니 귓전을 때리는 또 다른 익숙한 소리.

“오수희, 나랑 사귈래?”

“아니.”

“와, 대박. 이번에는 진짜 0.1초도 안 걸려서 대답했어. 이제는 전혀 망설임이 없구나?”

짝짝짝.

제준은 연필과 커터 칼을 회의 테이블에 던지면서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

에라, 이 미친놈…. 수희는 이제 대꾸하기도 귀찮아 마음속으로만 되뇔 뿐이다.

황제준.

수희와 동갑내기이자 대학 동창이자 회사 동료이자… 친구인 남자.

잊을 만하면 사귀자는 말로 수희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남자.

180㎝가 훌쩍 넘는 키에 소년같이 말간 얼굴을 하고는 맨날 황당한 장난이나 쳐대는 남자.

“야… 너 이번이 아홉 번째야. 한 번만 더 고백하면 나랑 진짜 사귀어야 하는 거 알지?”

수희는 그런 그를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그럼 사귀면 되는 거지, 뭐.”

제준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지만 수희가 진짜 사귈 마음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가 무디기 짝이 없는 이 여사친에게 은근히 마음이 가기 시작한 것은 이 회사에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하지만 처음 사귀자는 말을 꺼냈을 때 제준은 바로 눈치 챘던 거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표정을 보아, 수희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그래서 제준은 재빨리 장난인 것처럼 태세를 전환하고 말았다.

수희와 어색한 남녀 사이로 지내느니 편안한 친구로 지내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게 그의 판단.

그 후로 제준의 마음은 정리가 된 듯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장난으로 바뀐 사귀자는 말은 아홉 번째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이번에도 수희는 꽤 단호한 어조로 딱 잘라 말했다.

“한 번 강조하지만 난 사내 연애는 절대 안 한다.”

“니가 뭐 다른 연애는 하냐?”

오수희.

여태껏 다섯 명도 안 되는 남자들과 썸이든 연애든 한 달을 채 넘긴 적이 없는, 모태 솔로이자 연애 숙맥이자 연애에 시큰둥한 여자.

애교 1도 없음, 일이 우선, 밀당 피곤함, 연애하면 왜 난리들인지 이해 불가. 남친보다 친구가 더 편한 여자.

“어쨌든 사내 연애는 절대 안 한다고…. 직장에서는 일을 해야지. 내가 완전 싫어하는 게 사내 연애야! 너, 내가 이것 땜에 얼마나 피 봤는지 말해 줬잖아!!”

수희와 제준이 다니는 디원하우징은 건축 인테리어 전문 회사다.

별도 법인 건축사무소 외 기획디자인팀, 시공팀, 경영관리팀이 있고, 수희는 기획디자인팀, 제준은 시공팀 팀장을 맡고 있다.

3년 전 시공팀으로 이 회사에 입사한 제준은 정말로 귀가 닳도록 들었다. 제준이 오고 나서 얼마 안 가 회사를 떠나버린 시공팀 팀장과 대표님의 불타는 사랑 이야기를.

지금도 회사 내에서 금기시되고 있는, 아무도 불러서는 안 되는 그 이름, 전 시공팀 팀장 김 모 씨.

회사 설립 초기부터 입사한 수희는 그 두 사람의 지나친 사랑과 증오에 매번 골머리를 앓아야 했는데, 그 후로는 사내 연애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떨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한 번만 더 사귀자고 말하면 니가 이 회사 그만둬야 해.”

즉, 수희는 제준이 열 번째 고백한다고 해도 사내 연애를 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으니 저와 사귀려면 회사를 그만두라는 무시무시한 논리를 펼치는 중이었다.

수희가 하도 단호하게 나오니 아무리 장난으로 한 말이라 해도 제준은 자존심이 살짝 상했다.

문득 처음 고백했을 때 당황하면서 눈썹을 찡그리던 수희의 표정이 다시 떠올랐지만 제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싱글거리며 대꾸했다.

“그건 싫은데. 난 이 회사가 좋은데… 일도 딱 내 적성에 맞는데….”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작작 하고 연필이나 마저 깎아.”

우웅, 우웅….

수희가 제준을 한창 타박하고 있을 때, 마침 제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제준은 발신자를 힐끗 보더니 바로 핸드폰을 꺼버리고 말았다.

노유라.

제준의 전 여친, 여기도 미친 X, 한 번 전화를 시작하면 수십 통씩 미친 듯이 해대는 집착녀.

유라의 전화임을 눈치 챈 수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게다가 너 같이 전 여친한테 매일매일 전화 오는 남자를 누가 좋다고 하겠니?”

이 회사에 처음 입사한 날에도, 처음 수희와 단둘이 밥을 먹었던 날에도, 처음 수희에게 사귀자고 한 날에도, 그리고 아홉 번째 사귀자고 한 오늘도 유라가 전화를 했다.

매번 수희 앞에서 제준을 실없는 남자로 만들어 버리는 유라.

아무리 뻔뻔한 제준이라도 이럴 때는 말문이 막혀 제대로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서지원 대표가 들어왔다.

“두 사람 오래 기다렸어? 내가 좀 늦었지. 미안, 전화 좀 받느라고….”

“아니에요. 대표님.”

서지원 대표.

수희가 사내 연애를 질색하게 된 원인 제공자이자 디원하우징의 대표, 서른여덟 살 골드미스, 연애 문제만 빼면 능력 있고 호탕하고 나름 좋은 여자.

오늘은 기분이 꽤 좋은지 활기찬 표정으로 지원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자, 이번에 들어갈 카페 건 같이 볼까?”

“네, 위치는 서현동 로데오 거리 쪽이구요….”

수희가 미리 준비한 기획안을 펼치면서 세 사람은 회의 모드로 돌입했다.

**

퇴근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회사를 나오는 수희 앞에 갑자기 엄마가 불쑥 등장했다.

“잉? 엄마? 회사 앞에는 웬일이야?”

“잔말 말고 얼른 타기나 해.”

“아, 어디 가는데~?!”

엄마는 타고 온 택시에 어이없어하는 딸내미를 억지로 밀어 넣었다.

사실 수희는 엄마가 어디로 갈지 짐작이 갔다.

요즘 엄마가 푹 빠져 있는 것. 바로 점이다.

첫째 딸 수아는 서른둘, 둘째 딸 수희는 스물아홉. 두 딸내미 모두 연애에도 관심 없고 남친도 없는 답답한 상황.

멀리 지방에서 동물병원을 하는 언니는 사정거리 밖이지만 아직 독립하지 못한 아홉수 둘째 딸이라도 어찌해 보려는 엄마의 마음.

택시에서 내린 수희는 그 애타는 마음도 모르고 입이 뭣처럼 튀어나온 채 엄마에게 떠밀려 점집으로 들어갔다.

산신령인지 귀신인지 모를 괴기스러운 그림을 배경으로 떡하니 버티고 앉은 점쟁이 앞에 수희는 마치 감옥에 끌려간 죄수처럼 무릎을 꿇었다.

“이 딸년이 전에 말한 두 목석 중 하나여?”

쪼글쪼글한 얼굴에 회색 쪽머리의 점쟁이 할머니가 수희를 빤히 쳐다보며 씩 웃는다.

“네네, 한번 잘 좀 봐주세요.”

“자자!! 어디 보자… 어디 보자… 뭐가 보이나….”

딸랑딸랑딸랑….

점쟁이가 못마땅한 표정을 하는 수희의 머리에다 대고 방울을 정신없이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뭐야, 이 어이없는 시츄에이션은…? 완전 사이비 같은데?’

처음 접하는 점집의 기이한 풍경에 수희는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은 입을 꾹 다물고 얌전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 방울을 흔들어 대던 할머니가 갑자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렇지, 그렇지! 우리 신령님께서 이제야 말씀을 하시는구먼!!”

화통을 삶아 먹은 듯 그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수희는 저절로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신령님께서 뭐라고 하시는데요?”

하지만 수희 옆에 앉은 엄마는 뭐가 그리 궁금한지 할머니의 입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흠~~ 허우대가 좀 있구먼. 키도 훤칠하니 크고 멀쩡하게 잘 생겼구먼.”

“아~~.”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기분 좋으라고 하는 소리 아냐?’

뭐, 시작이 나쁘지는 않은 탓에 수희는 못 미더운 듯 눈을 가늘게 뜨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어디 보자…. 이놈 이거 살짝 또라이네. 속을 알 수 없는 놈인 기라. 그리고 어…? 칼을 들고 있네?”

하지만 바로 다음으로 이어진 할머니의 생뚱맞은 말에 수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속을 알 수 없는 놈? 게다가 칼을 들고 있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

하지만 할머니는 씩 웃으며 덧붙였다.

“역시… 전에도 말했지만 둘째 딸년은 사주에 쇠가 든 남자랑 결국은 되게 되어있어. 지가 불이라 그래. 담금질하는 것처럼 이 또라이를 길들여야 하는 거야.”

칼, 쇠, 불, 담금질, 또라이…?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알 수 없는 할머니의 말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수희 옆에서 엄마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니까 칼을 들었다는 건 직업이 그렇다는 건가요?”

“뭐… 직업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나야 모르지.”

“…….”

“어쨌든 이놈이 얘한테는 최고의 짝이야. 올해 안에 잡아야 해. 놓치면 평생 없어. 그냥 독수공방이제.”

지금껏 할머니가 늘어놓은 알 수 없는 말들 가운데 딱 하나 귀에 꽂히는 단어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독.수.공.방.

이 치명적인 단어는 연애에 시큰둥한 수희마저도 움찔하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내 덤덤하던 수희의 눈빛에 한줄기 묘한 떨림이 스치는 것을 점쟁이는 놓치지 않았다.

“부적 하나 써.”

‘부… 부적??’

“남자들이 딱 달라붙는 부적이야. 페로몬 같은 거야.”

할머니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날린 최종 공격에 정신이 멍해진 수희는 뒤따르는 그녀의 말에 더욱 허걱 하고 말았다.

세상에, 페로몬이라니? 어르신 입에서 저런 말이….

엄마가 살짝 망설이는 듯 보이자 할머니가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딸내미한테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하나 써. 이번에 확실히 붙게 해줄게.”

“아, 네네…. 잘 좀 써주세요.”

“당연하지! 나가서 기다려!”

방을 나오면서 수희는 엄마한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진짜 쓰는 거야?”

“야, 이것아, 그럼 어떡해.”

“아니, 무슨 고시도 아니고 붙긴 뭐가 붙는다는 거야, 나 참….”

수희는 황당하다는 듯 혀를 내두르며 먼저 점집 대문을 나왔다.

하지만 밖에서 엄마를 기다리면서도 저절로 되새기게 되는 말들, 독수공방, 칼, 또라이….

그 와중에 딱 하나 위로가 되는 말은 키 크고 멀쩡하게 생겼다는 말뿐.

“아, 처음에만 좋다 말았네.”

수희는 입을 삐죽 내밀고 중얼거렸다.

**

“뭐, 올해를 넘기면 평생 독수공방?!”

집에 돌아온 엄마는 수희 아빠한테 점집에서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소상하게 얘기하는 중이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잠자코 얘기를 듣던 아빠도 독수공방이라는 단어에는 좀 놀라는 듯했다.

그러나 아빠의 표정은 심각한 것이 아니라 웃음을 참는 표정이었다.

“아니, 수희 아빠, 당신은 지금 딸이 평생 독수공방할지도 모른다는데 웃음이 나와?”

아빠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면서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딸내미의 볼을 톡톡 치며 말했다.

“우리 딸 결혼 안 하면 어때. 아빠랑 살면 되지~.”

“아니, 당신 그게 말이야, 방구야? 나중에 다 늙어서 딸 발목 잡을 일 있어? 그리고 자기는 연애하고 결혼하고 실컷 재미 다 보고는, 딸한테는 왜 결혼하지 말라는 거야, 응? 나중에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엄마가 아빠에게 속사포처럼 잔소리를 잔뜩 늘어놓았다.

“아니, 결혼하지 말라는 게 아니고~ 결혼 안 해도 된다는 거지. 요즘 여자들도 다 직업 가지고 멋지게 사는데, 결혼이 꼭 필요한가?”

“그래도 연애도 해보고, 결혼도 해야지. 안 그러면 무슨 재미가 있고, 인생에 뭐가 남아요?”

엄마는 동의할 수 없다는 듯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나랑 결혼해서 그런 거야. 수희 보고 그렇게 결혼하라고 닦달하는 거 보면 나랑 사는 게 좋긴 좋은가 봐?”

아빠가 엄마의 허리에 팔을 두르자, 엄마는 괜히 좋으면서 아빠를 밀쳤다.

“아, 왜 이래요, 진짜!”

‘아… 진심 엄마 아빠가 제일 짜증난다.’

묵묵히 밥을 먹던 수희는 가느다랗게 실눈을 뜬 채 사랑싸움을 하는 부모님을 흘겨보았다.

‘아무리 딸이라지만 모태 솔로인 내 앞에서 저렇게 서슴없이 애정행각을 일삼다니…. 저 애정행각을 매일 봐야 하는 내 신세가 서럽구나. 진짜 집을 나가든지 해야지, 원….’

“어쨌든 너 그 부적….”

“아, 됐어.”

수희가 탁 하고 밥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제야 부모님이 눈치를 본다.

거실로 가서 뚱한 표정으로 TV를 켜는 수희를 보며 엄마가 민망한 듯 덧붙였다.

“아유 참, 저것이 요즘 왜 저리 까칠해.”

“당신이 자꾸 부담 주니까 저러는 거 아냐. 근데 부적도 쓴 거야?”

“아니, 그럼 평생 혼자 산다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한댔는데… 잘 때 지갑에 몰래 넣어 둬야겠어요.”

엄마는 마치 수희 보고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거실에다 대고 말을 이었다.

“다 들리거든!!”

“호호, 들었어? 그럼 지금 지갑 안쪽에 넣어놓을게. 비싸게 준 거니까 버리면 절대 안 된다~.”

수희가 버럭 역정을 내자 엄마는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고는 얼른 방에 들어가서 수희 지갑에 부적을 넣었다.

‘으이그….’

그러나 수희도 독수공방이란 말이 어쩐지 찜찜했기 때문에 엄마가 하는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자려고 침대에 누운 수희는 엄마가 지갑에 넣어둔 부적을 괜스레 한번 꺼내 보았다.

“페로몬이라니….”

아무리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그냥 종이 쪼가리처럼 보일 뿐인데….

“결혼 못 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왜 다들 난리인 거야. 츠암~ 나.”

자기도 독수공방이라는 말에 움찔해 놓고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큰소리를 떵떵 치는 수희.

하지만 페로몬 역할을 한다는 이 부적, 은근히 기대되기도 한다.

“나도 이참에 연애다운 연애 한번 해 봐?”

그러고 보니 자신이 길들여야 한다는 칼을 든 또라이가 누굴까 궁금하기도 하다.

그때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 진동.

“아, 깜짝이야….”

아는 동생인 혜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언니, 자?]

[아직… 왜?]

[점집 간 건 어떻게 됐어?]

[그게 궁금하니? 니 팔자도 아닌데.]

[당연히 궁금하지. 난 언니 인생이 내 인생보다 더 궁금하거든.]

“아니, 이것이 진짜….”

혜리의 말에 수희는 약간 기가 막혔다.

윤혜리.

수희 대학 후배이자 친구 같은 사이, 조금 얄밉지만 나름 귀여운 동생, 수희와는 정반대 성격.

혜리는 수희보다 두 살이 어린데도, 어찌 된 일인지 두 사람은 동기들보다 더 사이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