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밖으로 나오고 보니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른 새벽이라 그런 것일까. 터벅거리며 골목을 벗어날 즈음엔 옷깃을 파고드는 한기에 살갗이 아플 지경이었다. 올해는 가을이 없다더니 그 말이 맞는 듯했다.' 절로 몸을 옹송그리게 만드는 바람에 어깨를 있는 대로 움츠린 다흰의 등 뒤에서 진서가 걸음을 멈추었다. 깁스에 걸린 소매를 빼내려는 그를 돌아보며 다흰이 짧게 내뱉었다.' “됐어.”' “추워.”' 다흰은 여전히 소맷부리에 눈길을 둔 채 점퍼를 벗어내는 그를 쳐다보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이미 달라진 관계에서 예전을 기억하는 일이 무용하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아팠던 것일까. 스멀거리며 기어오르려는 어리석은 미련을 짓누를 수 있을 만큼 냉정해질 수 있는 건, 지난 사흘 동안 게워낸 눈물 때문이리라. 갈기갈기 찢겨진 가슴이 쏟아낸 핏빛 울음 때문이리라.' 눈앞에 서 있는 진서가 이전의 그가 아니듯 자신 역시 그에게 있어 전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다흰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입어.”' “고마워.”' “…….”' 한 줌의 부유물도 섞이지 않은 맹물 같은 다흰의 목소리가 가슴 밑동에 자리한 그의 안타까움을 자극했다. 더러는 어린아이와 같은 환한 웃음을, 더러는 잔뜩 심술이 오른 표정을 짓던 다흰이 그리워지는 것 같았다. 어떤 감정의 동요도 드러나지 않은 무표정한 그녀의 모습이 낯설다 못해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차 안 가져왔니?”' 점퍼를 걸치고도 어깨를 움츠린 다흰이 물어오자, 그는 대답 대신 한쪽 팔을 내밀었다.' 집 안에서 몸에 지니고 나온 온기가 바닥이 났는지 갈수록 호흡을 자극하는 바람이 짜릿하게 느껴졌다.' 새벽 기운에 동화된 입김이 차갑게 콧등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다흰은 손끝을 비볐다.' “많이 춥지?”' “그러네.”' 더는 되물을 여지조차 없게 만드는 간단한 마침표가 자신들의 현재를 그려내는 것 같았다. 침묵과 다를 바 없는 머쓱한 대화. ‘왜’라는 이유를 따져 묻기엔 이미 너무 먼 길을 와버린 것 같은 씁쓸함에 진서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간간이 눈에 들어오는 가로등을 제외하곤 시위가 어둠뿐인 길 위에서 진서는 지나가는 택시를 향해 손을 들었다. 차갑게 가슴을 후비고 들어오는 찬바람 속에서 아침을 기다리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화장기가 없기 때문인지 창백하게 느껴지는 다흰의 입술이 점점 푸른빛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진서는 도로로 내려가 노란 등을 밝히고 달려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