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물러가지 않은 더위가 뾰족한 새의 부리처럼 머리를 쪼여왔다. 따끔대는 정수리를 손으로 긁적거리며, 진서는 손목에 차고 있는 만화시계를 들여다봤다.'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벌써 이십 분째 저러고 있다니. 진서는 원피스 끝단에 달린 분홍색 프릴이 끌리는 것도 모르고 문방구 앞에 진열된 인형 옷을 들여다보는 여자아이의 뒤통수를 존경스런 눈빛으로 바라봤다.' 뜨거운 햇살도 그랬지만 같은 자리에 무료하게 서 있어야 하는 따분함이 진서로 하여금 주머니를 뒤지게 만들었다. 쩔렁이는 소리와 함께 백 원짜리 동전 세 개가 손에 쥐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학교 올 때 천 원짜리 한 장이라도 가져오는 건데.’' 천원을 들여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면, 저금통에 들어 있는 돈이 줄어드는 것 따위는 조금도 아까울 것 같지 않았다. 돈도 없다면서 이 옷 저 옷 죄다 들춰보는 저 아이의 가슴 속엔 뭐가 들었을까.' 괜스레 잔돈뿐인 제 주머니에 짜증이 난 진서가 허공을 향해 헛발질을 할 즈음, 바닥에서 공처럼 둥근 머리가 불쑥 올라왔다.' “가자.”' 한두 번 겪는 일은 아니지만 매번 어처구니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체 어떻게 된 애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할 줄을 몰랐다. 미안하다는 것이 어떤 건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애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았다.' 그것도 나이 때문인가. 진서는 벌써 일곱 달째 자신을 형편없는 신세로 몰아넣은 여자아이의 할머니가 새삼 원망스러웠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로 어찌된 일인지 얼굴도 모르는 어떤 노인을 원망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상한 할머니야.’' 집으로 돌아가 엄마가 준비해 둔 시원한 식혜를 마시고 싶은 기대를 늦추게 만든 노인을 원망하며, 진서는 태연한 얼굴로 앞서 걷기 시작한 여자아이의 뒤를 쫓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몇 발자국쯤 걸었을까.' 진서의 눈에 들어온 건 땅 위에 끌려가는 여자아이의 가방이었다. 보일 듯 말 듯 먼지를 일으키며 땅에 질질 끌리고 있는. 짤막한 팔과 땅바닥 사이에 놓인 간격이 가방의 높이를 감당하기엔 더없이 짧았다.' ‘쟤네 엄마도 그렇지, 바닥이 닳아서 버린 가방이 벌써 네 개째라며 아직도 끈을 안 잘라주나.’' “우리 다흰이는 학교 들어가고 나서 벌써 가방을 세 개나 바꿨지 뭐예요. 초인종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예요. 질질 가방 끄는 소리가 들리고 나면 영락없이 초인종 소리가 들리거든요, 호호호. 다음번엔 가죽을 대주던가 해야겠어요, 호호호.”' 진서는 자신의 집에 놀러온 여자아이의 엄마가 더할 수 없이 재미있다는 듯 늘어놓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건 순 모함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