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오빠의 취향

오빠가 만나는 여자는 대부분 정해진 부류였다.

무용과 재학생, 아나운서 지망생.

보통은 6개월에서 1년 주기로 만나다 헤어지는데 여자 친구가 없는 공백 기간은 한 달을 넘기지 않았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큰 키에 잘생긴 외모 이런 건 당연히 장착되어 있고 대대손손 잘살던 집안에 명문대 교수 아버지, 아버지가 계신 그 명문대의 학생회장 출신으로 지금은 국내 최대 로펌의 최연소 변호사인 그야말로 반박 불가 잘난 남자다.

그 잘난 남자를 수년째 따라다니고 있는 나는 안타깝게도 대표적인 평범녀 중 하나다.

평범한 외모에 아니, 그보다는 조금 더 예쁘단 말을 듣는 정도의 얼굴에 그냥저냥 먹고 살 만한 집안 환경, 중위권 성적의 학생들이 가는 대학의 3학년에 재학 중인 그냥그냥 평범한 여학생이다.

그나마 평범하지 않은 건 친구 중 유일하게 아직 모쏠이라는 특별함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나를 이렇게 모쏠의 구렁텅이에 처박게 한 저 잘난 남자를 내가 어떻게 발견했느냐?

그렇다.

나 같은 평범녀가 저 잘난 남자를 알게 되는 건 성인이 된 후로는 기대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왜냐면, 저런 남자들은 평범녀를 잘 상대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연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고, 어르신. 어서 오셔요.”

우리 아빠가 어르신이라고 부르던 분.

바로 이 일대 몇몇 빌딩의 건물주 이자 내 지독한 짝사랑의 할아버지.

우리 아빠의 식당이 입점해 있는 8층 높이의 건물에는 이 건물만 돌아도 하루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상가가 입점해 있었다.

우리의 건물주께서는 일주일에 서너 번은 2층에 있는 아빠의 식당에서 점심을 드셨는데 그중 하루는 꼭 손주의 손을 잡고 오셨었다.

보통은 찌개나 냉면 등을 드셨지만 손주와 함께 오는 점심이면 꼭 우리 가게에서 제일 비싼 소갈비를 드셨었다.

그래서일까?

우리 아빠는 그 집 손주를 어찌나 칭찬하셨었는지….

전교 1등을 도맡아 한다더라, 운동도 잘하고 친구도 많아 학생회장이 됐다더라, 인물도 좋고 어쩌고저쩌고….

그 얘기를 하도 들어서 그런 것인지 뭔지 아니 뭐 객관적으로도 잘생긴 오빠라서 그렇겠지만 아홉 살 내 눈에 비친 오빠는 왕자님, 아니 아이돌을 보듯 멋있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안녕? 오빠.”

“오빠?”

“네. 저보다 네 살 많은 오빠라고 하던데요? 아빠가. 이름이 승훈이라고 하던데… 이승훈 맞죠?”

“그래, 우리 승훈이보다 네 살이 어리니까 아홉 살이로구나? 고 녀석, 아버지를 닮아 아주 싹싹하구나!”

내가 옆에서 아무리 재잘거려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오빠와는 다르게 건물주 할아버지께서는 이런 나를 귀엽다며 함께 자리에 앉혀 고기를 먹이셨다.

“효니야! 아이코 죄송합니다. 얘가 워낙에 붙임이 좋아서 낄 때 안 낄 때를 안 가리고…….”

“아니야, 말수 적은 사내 녀석이랑 둘이 밥 먹기가 적적하던 참인데, 조잘조잘 옆에서 아주 재미있게 해주는구나, 신경 쓰지 말고 자네는 일 보게.”

처음에는 나를 나무라던 아빠도 고깃집 딸답게 혼자서 2인분은 해치우는 나를 보고는 다음번 방문 때는 아예 내 그릇까지 세 개를 세팅해 놓으셨다.

“네 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다던데요?”

“허허. 그래? 승훈아, 요 꼬마 녀석이 아주 너한테 관심이 많은 모양이야.”

내가 사춘기가 지나고 나서만 오빠를 알았더라도 그리 푼수를 떨지는 않았을 텐데…. 뭣 모르는 어린 나이에 오빠를 만나 아주 대차게 들이댔었다.

물론, 오빠는 내가 그러든 말든 관심도 없었기에 별로 창피할 것도 없었다.

나는 오빠에게 그냥 병풍이나 가로수 같은 존재일 뿐이었으니까.

그리하여 나의 끈질긴 구애는 그로부터 1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계속됐다.

“보내면 읽긴 읽냐?”

“읽으니까 보내지, 1 표시는 없어지더라고.”

“그럼 답장은? 안 오지?”

“와. 한 일곱 번 보내면 한 번 오는 꼴로?”

“야, 넌 자존심도 없냐? 그 정도면 그냥 개무시하는 거네. 그 짓을 왜 하고 앉았냐?”

“사랑에 자존심이 어딨어?”

“내가 너 상처 받을까 봐 대놓고는 말 못 했는데 솔직히 너… 네가 그 오빠한테 댈 바가 된다고 생각하냐?”

“또 뭔 소리 하려고!”

“야, 그 오빠가 만난 여자들 다 쭉쭉빵빵에 잘나가는 애들이라며? 끼리끼리라고 그런 애들만 상대하는 사람이 우리 같은 애들 만날 거 같냐?”

“취향은 변할 수도 있지!”

“꿈 깨, 이 기지배야! 네가 그 오빠 취향으로 보이는 날은 술 마시고 적적한 밤에 딱히 누구 부르기도 귀찮을 때 눈앞에 네가 딱 있으면! 그때 취향이라고 타협하는 거겠지!”

“그럼 술 좀 사달라고 해볼까? 사주긴 하려나?”

“어우, 진짜 못산다 못살아!”

대학 친구 소희가 진저리를 치며 저만치 앞서 걷는다.

사실 내가 오빠를 좋아한다며 하는 이 짓은 딱히 무언가를 바라고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오빠와의 연애나 결혼 같은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목적이랄 것도 없이 그저 안 하면 허전한 오래된 습관이나 마찬가지라고 할까?

그러니 나의 모쏠 기간 동안 열 손가락을 넘게 바뀐 오빠의 여친들을 보면서도 질투라는 것을 느끼지도 않고 변함없이 이 길을 묵묵히 걸어올 수 있었을지도.

아니, 사실 질투도 뭐가 있는 사이에서나 하는 거지 내가 오빠한테 그 정도의 비중이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어쨌든 오늘도 나의 이 뻔뻔한 들이댐은 굿모닝 문자에 이어 오빠의 끼니를 물어보고 마침내 오빠의 회사 정문이 가장 잘 보이는 카페에 자리 잡고 앉아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라도 한번 해볼까 싶어 시간을 축내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커피 마실 데가 그렇게 없어서 여기까지 와서 마셔?”

“왜 왔어? 금방 갈 거라니까.”

“네가 말하는 그 금방이 평균 세 시간은 되니까.”

오준호.

우리 아빠의 식당이 있는 건물. 그러니까 승훈 오빠의 할아버지 소유 그 건물에 있는 PC방 사장님의 아들이자 나의 십년지기.

지난 10년 동안 나의 절친으로 지내면서 내가 하는 짝사랑의 실태를 근거리에서 지켜봐 왔다.

그러니 내가 지금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는 말 안 해도 알고 있을 것.

그래도 뭐 민망하거나 창피할 것도 없다.

우리는 그런 사이니까.

“야, 너는 옷 좀 사 입어. 어떻게 맨날 볼 때마다 그 옷이야?”

“이거 새로 사고 처음 입은 건데?”

항상 같은 스타일. 후드티에 운동복 바지.

새 옷인데도 새 옷 같지도 않은.

객관적으로 보자면 준호의 외모는 꽤 준수한 편이었다.

일단 키가 크고 어릴 때부터 수영을 해왔기에 어깨도 넓고 신체 조건 자체가 좋았다.

여드름이나 잡티도 없이 피부도 좋았고 쌍꺼풀 없이 큰 눈에 높은 콧대는 요즘 여자들이 좋아하는 취향에 부합할 만했다.

그런데도 저 녀석이 여태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 해본 건 분명히 이유가 있었다.

내 결론은 너무 후줄근했기 때문이다.

키가 187이나 되면 뭐 하나? 저리 입고 다니니 그냥 헐랭이같이 보이는 것을.

근육질 몸매가 있으면 뭐 하나? 종일 피시방에 박혀서 게임만 하고 있으니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을.

“나가자.”

“뭐하게?”

“저녁이나 먹자.”

“이따 가게 가서 먹어.”

“오늘은 여기 근처에서 먹자.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우리 사이에 무슨 다른 데서 밥을 먹어. 그냥 아빠 가게 가서 밥 먹고 준호네 가게 가서 게임이나 하는 거지.

“야, 넌 돈도 안 벌면서 무슨 돈 쓸 생각을 해? 맨날 그렇게 있지 말고 차라리 일을 해.”

“무슨 일?”

“모델?”

“뭐?”

그렇다. 준호는 백수다.

수영 국가 대표를 꿈꾸며 학창 시절을 전부 운동만 하며 보냈지만, 뜻밖의 허리 부상으로 수영을 포기해야만 했고 공부는 담쌓고 주먹질만 하고 다니더니 대학도 포기, 직업도 미정, 결국은 종일 피시방에서 죽치고 있는 백수가 되었다.

“너 키 크잖아! 모델 한번 도전해 봐!”

“내가 무슨 모델을 해? 키 크면 다 모델하게?”

“아니야. 내가 객관적으로 볼 때 니 얼굴이 요즘 유행하는 얼굴이야. 내가 잡지 많이 보잖아. 잡지 모델들 보면 다 너처럼 생겼어. 무쌍에 코만 높은 얼굴! 암튼 너도 좀 꾸미면 얼추 느낌 날 거 같은데?”

“이 집 커피에 뭐 타는 거 아냐?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나가자. 빨리!”

“잠깐만. 30분만 더 있다 가자.”

“어차피 안 나와! 여기 변호사들 다 야밤은 돼야 퇴근한다던데 기다려 봐야 헛수고라고.”

“아니…… 커피가 남았잖아.”

준호와 승훈 오빠는 서로의 존재 정도는 아는 사이다.

나야 워낙에 오빠에게 들러붙어 왔으니 존재감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건물주의 손자와 임차인의 아들이 친분을 쌓을 계기야 별로 없으니까….

그나마 나로 인해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 정도.

“미련 떨지 말고 빨리 나와.”

준호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려는 순간 주변을 암흑으로 만드는 후광을 비추며 오빠가 나타났다.

이마가 드러나게 올린 머리, 검정 슬랙스에 흰 셔츠를 입은 군더더기 없는 저 모습. 오빠는 오늘도 멋있구나!

“오빠다!”

“어?”

“잠깐만 기다려! 나 인사만 하고 올게.”

한심하다고 생각을 하든 말든 상관없다.

나는 뻔뻔하니까.

준호를 카페에 남겨 두고 다급하게 오빠가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그사이 오빠가 가버릴까 봐 너무 급하게 뛰어가다 내 발에 내가 걸려 넘어질 뻔한 우스운 꼴이 됐지만, 다행히 그 모습은 오빠에게 보이지 않았다.

“승훈 오빠!”

“어. 웬일이야?”

당연히 반갑지도 그렇다고 놀라지도 않은 무감한 표정이지만 그런 얼굴이라도 볼 수 있으니 오늘의 기다림은 성공적이다.

“아, 여기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가… 아 이렇게 또 만나네요. 오빠 잘 지냈어요?”

“매일 연락하면서 새삼스럽게 무슨 안부를 물어봐.”

“에이. 물어만 봤지 대답을 못 들었잖아요.”

“보다시피.”

틈이 없다. 틈이 없어.

빈틈을 좀 내줘야 비집고 들어갈 텐데…….

“지금 퇴근하는 거예요?”

“응.”

“그럼 지금 집에 가는 거예요?”

“아니.”

하! 또 단답형.

어렵다 정말….

이럴 땐 그냥 솔직하게 정면 돌파가 답이다.

“오빠! 안 바쁠 땐 답장 좀 해주면 안 돼요?”

“바빠!”

그럼 그렇지.

기대도 안 했다.

“서효니!”

저만치서 나를 부르는 준호의 목소리.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준호가 보이자 이제야 핸드폰에서 고개를 들어 이쪽을 제대로 봐주는 오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관심 없는 눈빛의 승훈 오빠와 어쩐지 경계심이 묻어나는 준호의 시선이 아주 잠시 서로에게 머물렀다.

둘 다 서로를 알고 있으면서 왜 인사들을 안 해?

남자들 세계에서는 먼저 인사하는 게 대단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도 되나 보지?

그 순간 준호가 멀뚱히 서 있는 내 어깨에 팔을 걸치고 헤드록을 하듯 나를 잡아끌었다.

“가자.”

“갑자기 잡아끌면 어떡해? 인사도 못 했잖아!”

준호가 돌려세운 탓에 가는 오빠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 한 게 아쉬워 원망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봤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준호가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고 섰다.

“인사를 하나 안 하나 어차피 알지도 못해.”

“뭔 소리야?”

“저 사람 너 쳐다도 안 보던데 뭐. 옆에서 뭐라고 말해도 눈길 한번 안 주던데 인사를 했는지 안 했는지 신경이나 쓰겠어?”

“내 기분이 다르잖아! 할 말도 더 있었는데….”

“무슨 말?”

오빠에게 여자 친구가 없는 이 시기야말로 내가 들이대기에 더없이 편한 상황이다.

아무리 혼자서 하는 짝사랑이라도 상도덕이 있는데 임자 있는 사람에게 들이대는 건 양심상 허락이 안 되지.

그러니 지금 같은 연애 공백기를 틈타, 다가오는 내 생일을 핑계로 같이 영화를 봐 달라는 부탁, 아니 애원을 할 참이었다.

구질구질 없어 보인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이 관계의 을이니까.

그런데 오준호의 등장으로 시도도 못 해보고 끝장났다.

시도했어도 별거 없었겠지만 거절을 당하더라도 말이나 꺼내 봤다면 내 마음이 이리 억울하진 않았을 텐데.

말해 봐야 뭐 하나….

“됐어. 알 거 없어. 근데 너… 승훈 오빠 알면서 왜 인사도 안 해?”

“인사를 왜 해?”

“왜 하긴? 아는 사람을 봤으면 인사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그 당연한 걸 저 사람은 왜 안 하는데?”

“그야… 너보다 형이잖아? 나이 어린 네가 먼저 안 하니까….”

“나이가 몇 살이나 많다고… 웃어른 대접해 드리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저 사람 전에 가게 근처에서 마주쳤을 때 먼저 인사했는데도 무시했어.”

“그래서 삐져서 안 한 거야?”

내가 놀리듯 웃으며 장난을 치자 준호도 따라 웃었다.

“그래. 삐졌다!”

“덩치는 산만해서. 어울리지 않게 삐진 척을 하고 그래. 그런 거 너랑 완전 안 어울리거든.”

“나는… 저 사람 별로야!”

“뭐? 왜?”

“너한테 하는 것만 봐도 맘에 안 들어. 사람이 말을 하면 아무리 관심이 없어도 눈이라도 마주치고 듣는 척이라도 좀 하던가. 너 저 사람이랑 있을 때 멀리서 보면 무슨 설문 조사하는 리서처 같아 보여.”

“‘도를 아십니까’처럼은 안 보여서 다행이네.”

“그렇게 보이기도 해…… 넌 저 사람이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왜? 능력 있고 잘생겨서? 아니지, 어릴 때부터 좋아했으니까 능력은 아니고 부잣집 아들이라서?”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건가?

눈이 있는 생명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사실을 정말 이렇게 무구한 얼굴로 물어오니 내가 더 당황스럽다.

“멋있잖아!”

잠깐 말이 없던 준호가 꺼낸 말은 의외였다.

“멋지긴 하네, 오늘 보니까.”

“어?”

“저렇게 슈트 입고 번듯한 회사에서 나오는 모습. 네 눈에 근사해 보일만 하다고.”

표정이 사뭇 진지해서 왠지 어색해졌다.

“야. 가자! 아빠 가게 가서 밥 먹고…….”

“아니. 오늘은 다른 데서 먹자.”

이런 사소한 일로 고집을 부리지 않는 준호가 오늘은 왜인지 두 번이나 주장을 굽히지 않아 토 달지 않고 그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