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 잠 못 이루는 밤

깊은 밤, 잠이 든 승연이 몸을 뒤척인다.

젖혀진 이불 사이로 팬티만 입은 그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탄탄한 가슴 위로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반사되어 반짝였고 가무잡잡한 복근은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천천히 아래위로 미세하게 들썩였다. 그리고 그의 긴 다리는 마치 종마의 그것처럼 근육질을 자랑하며 당장이라도 침대에서 내려와 껑충껑충 어디론가 달려 나갈 것만 같은데…

하지만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이다.

살짝 입까지 벌린 채 깊은 잠에 빠져있는 아름다운 그의 얼굴 안, 짙은 속눈썹 아래 감겨있는 두 눈은 잔뜩 찡그리고 있다.

악몽을 꾸는 것이다.

침대 옆 협탁 위엔 조각상이 놓여있다.

황금색 뿔을 가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인 사슴. 고개를 숙인 채 살짝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사슴의 얼굴은 검은색 형체뿐이라 녀석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꿈속에서 승연은 여섯 살이다.

아직 유치원에도 들어가기 전이고 비록 생모는 일찍 돌아가시고 없지만, 유모의 보살핌과 가정교사의 지도아래 한글과 구구단은 물론 기초적인 영어 회화까지 가능했다. 하지만 식탁에 앉아있는 어린 승연은 똘똘한 모습과는 달리 무척 불안한 모습이었다.

두 명의 이복형들과 한 명의 이복누이 그리고 아버지는 엄마라고 부르라 했지만, 그가 없을 때 엄마라고 불렀다간 사정없이 뺨을 때리는 이명자 여사님.

하루 두 번. 주말 같은 때는 하루 세 번, 이 네 사람과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것이 어린 승연에겐 가장 힘든 숙제였다.

운이 좋은 날은 아버지가 늦게 출근하여 아침도 같이 먹고 저녁도 일찍 들어와 같이 먹는다면 그날은 별 탈 없이 하루가 지나가겠지만 그런 날은 극히 드물었다. 항상 아버진 새벽 일찍 출근하셨고 저녁 늦게 들어오셨다.

그러면 그들은 식사 시간 내내 어린 승연을 괴롭혔다.

밥을 한 톨이라도 남기면 때렸고 반찬은 늘 앞에 있는 것만 먹어야 했으며 그 밖에도 아무 이유 없이 승연은 혼이 나고 매를 맞아야 했다.

왜? 왜 유독 식사 시간에 그렇게 어린 승연을 괴롭혔을까?

‘밥 먹을 땐 개도 때리지 않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이성을 잃고 짐승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식사 시간이었다.

첩의 자식인 승연이 싫어도 민 회장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한집안 식구로 지내는 그들도 밥 먹을 때만큼은 어김없이 그 속마음을 표현하곤 했다.

이십 년도 지난 그 날의 일들이 악몽을 통해 생생하게 재연된다.

갑자기 누군가 승연에게 말을 걸어왔다.

커다란 식탁 맨 끝에 앉은 승연은 그들의 대화를 정확히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렇지 꼬맹아?” 하고 물으면 대답을 해야 했고 “네.”

대답을 하면 피식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옆에 앉은 동훈 형의 손바닥이 사정없이 뒤통수를 내리쳤다.

“병신아 뭐가 ‘네’야?”

그리고 또 웃음.

어린 승연도 이미 익숙한지라 뒤통수를 맞고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묵묵히 계속 밥을 떠먹는다.

그런데 지금 꿈속에서의 상황은 조금 더 심각했다.

“뭐가 ‘네’냐고.”

“네?”

뭔가 동훈이 기분 나쁜 일이 있었던 거다. 밥 먹기 전 하고 있던 게임이 잘 안 풀렸거나 아니면 그냥 밥맛이 없거나.

“이 새끼가 넌 ‘네’ 밖에 몰라?”

-퍽!

이번에 뒤통수는 풀스윙이었다. 덕분에 승연의 입안에 있던 밥알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이, 더러워서 정말!”

맞은편에 있던 이복누이 민유진이 ‘탁’하고 밥숟갈을 놓으며 말했고 여사님의 ‘시끄럽다’는 말 한마디에 승연은 밥 먹다 말고 손을 들고 냉장고 앞에 서 있어야 했다.

“애새끼가 말귀를 못 알아들어. 계속 ‘네’ ‘네’ 거리잖아요.”

동훈의 변명에 여사님이 한마디 했다.

“지 애미 닮아 그렇지 뭐.”

“엄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쟤 엄마가 어쨌는데?”

민유진의 말에 여사가 대답했다.

“쟤 애미가 그렇게 내 말을 못 알아들었거든. 내가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도 이 남자 저 넘자 끌어들이더니 결국 그렇게 된 거 아니야.”

민유진은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큰형인 민동관은 투덜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도 참… 아침부터 재수 없게”

어린 승연은 이때만 해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지만 이와 똑같은 상황은 계속 반복됐고 결국 이십 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악몽이 되어 그의 꿈을 통해 재연되고 있었다.

곤히 자는 줄 알았던 승연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스르르…

승연이 상체를 일으키는가 싶더니 그는 앉은 자세로 고개를 숙인 채 서럽게, 아주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흐흐 흑흑….”

**

일본 교토의 한 료칸.

승연이 서울 자신의 집에서 울고 있는 그 시간, 보나는 일본의 한 온천장에 와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보나는 배신철이란 남자를 사랑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그를 뒷바라지했고 결혼을 약속했다.

똑똑한 그는 사법고시에 붙었고 2년의 연수원 과정을 마친 후 검사로 부임했다. 하지만 그 후,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그는 서서히 변해갔다.

워낙 바쁜 사람이라 게다가 늘 법전과 씨름하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기에 그의 히스테리를 받아주는 것이 습관이 되어 그의 마음이 떠나간 것도 보나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의 변심을 알게 된 건 오래된 친구 혜미를 통해서였다.

양혜미, 중학생 때부터 친구였던 그는 어느 날 밤 보나의 집에 찾아와선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다.

“나, 너한테 죽을죄를 졌어.”

“혜미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 신철 씨 사랑해. 신철 씨도 나를 사랑한다고 했고.”

갑자기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사고가 정지되어버린다.

보나는 동그란 안경 너머 쌍꺼풀진 맑은 눈을 끔뻑거릴 뿐이었다.

“그런데… 흑흑.”

갑자기 혜미는 울먹이며 말했다.

“그 자식이 나랑 헤어지자네. 그러니까 그 자식이 너랑 나… 둘 다 갖고 논 거야.”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보나는 콩닥거리는 가슴에 핏기라곤 다 빠진 백지장 같은 얼굴로 혜미를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 지금 니가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너가 날 먼저 갖고 논 거지.”

엉엉 울던 혜미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보나를 쳐다보았다.

평소의 순하디 순한 보나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그래. 내가 죽일 년이야. 알아. 나 너한테 맞아 죽어도 싸. 보나야, 차라리 날 때려줘. 나 너한테 맞을게.”

보나의 기억은 여기까지였다.

혜미는 당연히 한 대도 맞지 않았고 다만 이날 보나는 혜미에게 이후로 뭐라고 말했는지. 어떻게 돌려보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혜미 뿐만 아니라 신철에 관해서도 말이다. 기억은 마구 뒤엉킨 채 불쑥불쑥 떠오르는 영상과 전화 통화 내용 같은 단편적인 것들만 보나의 머릿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신철도 혜미도 ‘미안하다’는 말, 특히 ‘죽을죄를 지었다’는 말을 반복했는데.

그들은 쉽게 죽음을 말했지만 정작 삶의 의욕을 빼앗긴 채 식음을 전폐한 것은 보나였다.

“그럼 죽어.”

신철과 마지막 만난 날, 카페에서 또 그 말을 꺼내자 보나는 참지 못하고 불쑥 말해버렸다.

“죽을죄를 졌다며. 그럼 죽어.”

신철도 혜미처럼 화들짝 놀라며 보나를 쳐다보았다.

순하디 순한 보나가 이런 말을 하다니. 무척 놀란 눈치였다.

“너 날　위해 죽을 수 있어? 난 널 위해 죽을 수 있어.”

동그란 안경 너머 퀭한 눈으로 자신을 보며 보나가 그렇게 말하는데 신철은 보나의 태도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저기… 보나야. 너가 왜 죽어? 넌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야지.”

그러면서 신철은 그동안 자신에게 해준 물질적인 도움 잊지 않고 있다며 천천히 갚겠다고 했다. 그 순간 보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치정살인의 주인공들이 이해가 갔다.

그렇게 해서 신철이 사법시험을 합격한 날부터 가자며 2년 넘게 미루고 미뤘던 둘만의 해외여행을 결국 보나 혼자서 떠나게 되었다.

예약한 비행기 표를 취소할까 고민했지만 정말 방구석에 계속 혼자 있다간 돌아버릴 것 같아 보나는 떠났다.

첫 해외여행을 일본으로 정한 것은 단지 신철이 가까운 곳으로 가길 원했기 때문이었고 검색하다 보니 교토의 한 료칸의 무척 아름다운 사진들이 보나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유서 깊은 곳이었다. 단지 흠이 있다면 가격이 꽤 비싸다는 점이지만, 그때만 해도 신철이 부담하겠다고 하여 예약한 것이었다.

교토에 도착한 보나는 예약한 료칸에 가서 사정 얘기를 하며 1인실로 바꿔 달라 했더니 지배인인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는 그대로 그곳에 머무르고 비용은 1인실 비용으로 계산해도 된다고 하셨다.

무척 친절하구나 생각했는데 그것도 있지만, 손님이 없었다.

로비 곳곳에 걸린 사진들을 보니 예전엔 유명 정치인과 문학가들도 묵던 곳인 모양인데 이렇게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이상했다.

음식도 입에 맞았고 온천욕도 좋았으며 낮이면 목적지를 두지 않고 무작정 돌아다니는 산책도 즐거웠다.

하지만 밤이 되면 또 신철과 혜미의 모습이 떠올라 보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

사흘 동안 그곳에 묵은 보나는 나흘째 되는 날 체크아웃을 했다.

종업원이 수속을 하는 동안 보나의 시선은 어느 한 곳을 향해 있었다.

황금색 뿔을 가진 하얀 색 사슴 조각상이었는데 사실 이곳에 들어온 첫날부터 보나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사슴은 바닥에 주저앉은 모습으로 고개를 돌려 위에 있는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얼굴은 형제 없이 온통 흰색이라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무척 쓸쓸해 보이는 것이 자신의 처지 같기도 해서 아무튼 계속 보나의 눈길을 끌었다.

“저거 혹시 파시는 건가요?”

짧은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말하자. 뜻밖에 할아버지 지배인이 유창한 한국어로 대답했다.

“저건 파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 여기 묶으셨던 손님이 두고 간 것이죠.”

그러면서 지배인은 구석 쪽의 벽을 가리켰다.

그곳엔 이곳에 머물렀던 유명 인사들과 자신이 함께 찍은 사진들이 잔뜩 걸려 있었는데 지배인은 그중 한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들이 그분이십니다.”

아주 오래된, 지금보다 훨씬 젊었던 시절의 지배인이 아리따운 두 여성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여성 중 한 명은 만삭이었다. 지배인은 그 여성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분이 조각상의 주인이신데 같이 오신 친구 분이 사고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충격으로 이걸 놓고 가셨지요.”

“아. 네….”

“그분들도 한국분이셨습니다.”

“아, 그래요.”

지배인은 살짝 웃는 얼굴로 보나에게 말했다.

“그런데 저 사슴 상은 왜? 특별히 원하시는 이유라도 있으신지….”

보나는 당황스러웠다.

“아니요. 특별한 이유는 없고요. 그냥 여기 지나갈 때마다 자꾸 눈에 띄어서. 파는 거면 갖고 싶어서요.”

“아, 그러세요.”

지배인은 잠시 뭔가 생각하는 얼굴이더니 이내 얼굴을 들고는 말했다.

“그럼 그냥 가져가시지요.”

“네?”

보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그냥 주신다고요?”

“네.”

지배인은 미소 짓는 얼굴로 말했다.

“그냥 드리겠습니다.”

“왜? 왜요?”

보나가 묻자 갑자기 지배인은 슬픈 표정이 되었다.

“조각상의 주인을 벌써 이십 년도 넘게 기다렸지만, 다시 이곳을 방문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면 이곳도 영업을 중단하게 되니까요.”

어쩐지 손님이 없다 했더니… 보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곳인데.

“어차피 골동품 점에 헐값에 처분해야 합니다. 원하시는 것 같으니 그냥 드리겠습니다.”

보나는 지배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우면서도 이 아름다운 곳이 없어진다고 하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지배인이 건네주는 하얀 사슴 상을 받으며 보나는 몇 번이고 고개 숙여 감사의 표시를 했다.

**

"너 죽은 줄 알고 생사확인 차 찾아왔다"

"그래 여행은 잘 갔다 왔어?"

상미와 기혁, 보나의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셋은 모두 같은 보육원 출신으로 초, 중, 고등학교도 같이 나왔고 사실상 친자매, 친남매와 다름이 없다. 하지만 상미와 기혁은 연인 사이였다. 고2 때부터 그렇게 됐는데, 처음엔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누구보다 부러운 커플이 됐다.

“응. 잘 갔다 왔어.”

보나는 교토에서 기념으로 사 온 작은 기념품을 선물했다.

상미와 기혁은 마치 자기들 집처럼 익숙하게 불판을 꺼내고 술상 준비를 하고는 들고 온 삼겹살을 굽기 시작했다.

“야 유보나. 기혁이가 신철이 걔 완전 아작을 내줬단다.”

“뭐?”

믿어지지 않았다. 신철은 기혁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덩치도 호리호리한 기혁보다 10킬로는 더 나갈 것이다. 무엇보다 기혁은 어릴 적부터 누구와 싸우면 울고 돌아오는 아이였다.

“싸웠다고? 둘이서? 아니 왜?”

정말 그렇다면 이 무슨 어린애 같은 짓이란 말인가!

기혁은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모르겠어. 나도 말하다 보니까 흥분해서. 그런데 그 자식 정말 나쁜 자식이더라. 내 덩치에 아작은 무슨… 그냥 홧김에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가더라. 검사니까 당장 고소를 하든 맘대로 하라고 했지. 그럼 나도 내가 다니는 신문사에 기사 올릴 거라고. 그랬더니 아무 말 못 하더라고.”

상미가 끼어들었다.

“야, 야! 그 부분을 자세히 말해야지. 너가 그랬다며. 가난한 직장여성에게 혼인빙자 고시 뒷바라지시킨 후 검사되자 차버려. 그렇게 기사 뽑는다고. 그랬더니 배신철 그 인간 얼굴이 하얗게 변하더란다. 킥킥킥. 안 그랬겠냐? 서초동 법원 앞 스타벅스에서 사람들 많은데 그렇게 떠들어댔으니? 큭큭큭”

보나는 웃지 않았다.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 그래?”

상미는 통쾌한지 신이 났지만 보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헛헛한 느낌만 더할 뿐 이었다.

보나가 말없이 소주잔을 비우자 어색한 기분을 없애려 상미가 TV를 틀었다.

“야! 너네 회사 나온다.”

고개를 돌려보니 TV 화면 아래, 커다란 자막으로 ‘민흥전자 천안공장 노사협상 결렬’

이라는 문구가 선명했고 마이크를 쥐고 있는 기자의 멘트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