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기서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친구들이 지금 내 몰골을 본다면 아예 배꼽 떼어놓고 웃어대느라 난리 블루스를 추겠군. 그나마 변장을 하고 와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날 알아보는 사람도 한둘이 아닐 텐데. 으으, 생각 만해도 끔찍하군. 좋아, 될 수 있는 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최대한으로 조심하는 거야!’'그녀는 잡지책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는 두껍고 촌스러운 고동색 플라스틱 안경 속에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주위를 살폈다.'황금 같은 토요일 오후 2시!'선남선녀가 마주 앉아 맞선을 보는 모습들은 정말이지 가관이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바꿔보려는 그들의 노력이 가상해 보일 정도였다. 눈과 귀를 가려도 뻔히 그들의 대화가 손에 잡혔다. 통성명을 하고, 호구조사를 나온 동사무소 직원들이라도 된 것처럼 가족사항을 물어보고, 취미˙여가활동을 물어보면서도 표정은 마치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억지로 어색함을 모면하고자 하는 그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훤히 보였다. 많은 커플들의 표정 연기를 보고 있자니 그녀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흡!'혼자 키득키득 웃고 있던 그녀는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들처럼 그녀도 연기를 해야 하는 초라한 신세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계집애! 뭐 자기는 연애결혼하고야 말겠다고? 그럼, 안 본다고 끝까지 버틸 것이지. 하긴 아버지가 꽤나 완고하고 무서우니까. 이해가 되긴 되네.’'현숙 대신 선 봐달라는 애처로운 목소리가 아직도 귓속에서 앵앵거려 더 튀어 나오려는 불평을 꿀꺽 삼켰다. 친구 좋다는 게 뭐겠는가. 서로 아쉬울 때 돕는 게 친구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꿈틀대는 후회라는 놈의 머리통을 지그시 눌러버렸다.'그런데 그런 그녀를 무시하고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상대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본 모습을 감추느라 투자한 분장시간들을 생각하면 화가 났다. 그녀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십 분만 더 기다려준다. 현숙일 위해 그 정도의 센스는 보여주지!’'마음은 그렇게 먹었지만, 초침이 움직일수록 답답함도 늘어났다. 그 답답함이 의자에 얌전히 붙어놨던 엉덩이를 자꾸만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인내의 한계를 느껴 시간을 확인하니 작정했던 십 분하고도 훨씬 넘은 시각이었다. 그녀는 이만 자리를 뜨기로 최종결정을 내리며 심호흡을 했다. 선을 보는 자리에도 약속시간을 안 지키는 남자를 삼십 분 동안이나 기다려주었으니 그녀로서는 충분히 할 도리를 했다. '그녀는 시커멓게 타버린 속을 가라앉히려고 마지막으로 물 잔을 비웠다. 빈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후 핸드백을 집어 들며 일단 고개부터 숙였다. 혼자 멀뚱히 앉아 있다가 나가는 자신이 바람맞은 여자처럼 보일게 분명했다. 맞선 대타에 바람맞은 신세라니 비록 한심한 처지이긴 하나 그녀는 사람들에게 그런 처량한 신세로 낙인을 찍히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면상조차 보지 못한 남자에 대한 분노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다독였다. 구두코에 시선을 박은 채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카운터를 막 지날 때였다. 현숙의 이름이 귓속으로 쏘옥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