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힘차게 걷던 주화가 불현듯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 닿을 듯 울창하게 자란 나무가 푸른 하늘을 가리고 보여주지 않았다. 때마침 불어온 따스한 가을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갔다. 덕분에 주화가 보고 싶어 하던 푸른 하늘이 손바닥만 하게 보였다가 사라졌다.

“아쉬워라.”

금방 사라져버린 쪽빛 푸른 하늘이 눈에 아른거려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기다리면 다시 하늘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온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주화는 원하는 걸 더는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쉬움이 듬뿍 담긴 한숨과 함께 걸음을 옮기려 고개를 내렸을 그때였다.

집채만 한 크기의 멧돼지 한 마리가 멀지 않은 비탈길 위에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주화를 발견하진 못하였는지, 그녀에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하지.’

몸이 돌처럼 뻣뻣하게 굳고, 등허리에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린 나머지 도망을 쳐야 한다는 사실마저도 생각나지 않았다.

‘제발 이대로 조용히 지나가라.’

주화가 속으로 간절하게 바라였다. 차라리 두려움으로 몸이 움직일 수 없게 되어버린 게 다행일지도 몰랐다.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주화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위험천만한 상황이 끝이 날지도 몰랐다.

그러나 상황은 주화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멧돼지는 점차 주화를 향해 가까워졌고, 이내 시선이 마주쳤다.

“꿀꺽.”

저도 모르게 입안으로 가득 고인 침을 삼켰다. 그 소리에 멧돼지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며 주화는 울고만 싶었다.

휘청이지 않기 위해 치맛자락을 더욱 꽉 움켜쥐어야만 했다. 간신히 버티고선 주화의 눈동자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어디에도 안전한 도피처는 없었다. 절망스러운 상황이었다.

여기서 이렇게 쉽게 목숨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최악의 상황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주화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암담한 생각을 떨쳐내려 하였다. 그러면서 일촉즉발의 위기가 사라졌으면 하고 바라보았다.

역시나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런 주화의 행동이 멧돼지를 더욱 자극하기만 한 것 같았다. 곧 자신을 향해 돌진할 듯한 성난 멧돼지만이 눈앞에 있었다. 조금 전보다 눈빛이 더욱 사나워진 건 주화의 착각이 아니었다.

더는 이러한 대치 상황 속에 있을 수 없었던 주화는 슬쩍 뒷걸음을 놓았다. 처음 몇 걸음은 좋았다. 이렇게 천천히 거리를 벌리다 보면, 무에 다른 수가 생길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그러나 희망은 주화 곁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툭.”

발밑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채 걸음을 옮기던 주화가 하필이면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밟고 말았다. 밑창을 타고 이질감이 느껴졌을 때라도 걸음을 멈추었더라면,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미 때가 늦은 후였다.

무시무시한 콧김을 뿜어내며 멧돼지가 고개를 움직였다. 그러더니 이내 곧장 주화를 향해 엄청난 기세로 돌진을 하였다. 멧돼지가 지나간 자리는 땅이 움푹 파였다. 심지어 땅이 울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으악!”

주화가 단말마와 같은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가 멧돼지를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고, 달리는 속도를 더욱 빠르게 하였다.

아찔한 상황에 다리가 덜덜 떨렸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보려 하였으나, 이미 몸의 기운이 쓱 빠져나간 다음이었다. 코앞에 놓인 멧돼지의 섬뜩한 엄니에 놀라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쓰러지듯 넘어지고 말았다.

“아!!!”

불에 달군 쇠꼬챙이가 손등을 스쳐 지나간 듯한 통증에 주화의 입에서는 고통에 찬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앞쪽에서 커다란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창졸간에 벌어진 일에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끝이 덜덜 떨렸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주화의 앞에 섰다. 검은 그림자가 그녀의 작고 연약한 몸을 뒤덮었다.

“괜찮으십니까?”

머리 위로 떨어진 물음에 고개를 들자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가진 사내가 주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귀한 신분의 사내의 찬란한 아름다운 외모에 주화의 말문이 막혀버린 나머지 그의 물음에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피가 납니다.”

사내가 주화의 손등을 안타까운 듯 미간을 찡그리고 잠시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소맷자락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등에 조심스러운 손길로 묶어 주었다.

“여기서 혼자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사내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화살을 맞고 쓰러진 멧돼지를 보며 주화에게 물었다. 사냥을 따라온 아녀자들은 대개 모여서 단풍 구경을 하거나, 한가로이 차를 마시고 있는 걸로 알았다. 그런데 여인 혼자 흔한 호위 무사 하나 없이 동떨어진 곳에 있는 이유가 궁금하였다.

입술에 풀을 발라놓기라도 한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주화는 억지로 입술을 비틀었다. 그런데도 한마디 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답이 없자 고개를 돌리던 사내가 어깨를 덜덜 떠는 주화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대답하기 힘드시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사내는 주화의 어깨를 살며시 두드리며 달래주었다. 아직도 겁에 질린 그녀가 무척 안타깝게 여겨졌다.

“덕분에 대단한 녀석을 잡았습니다. 이 정도면 범을 잡지 못해도 아바마마를 기쁘게 해줄 수 있을 듯합니다.”

하염없이 들썩이던 주화의 어깨의 떨림이 어느 정도 잦아들자, 사내가 기쁜 듯한 어투로 말하였다. 주화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작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때였다. 주화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있을 땐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어디선가 우르르 몰려왔다. 그리고 쓰러진 커다란 멧돼지와 다친 주화, 그리고 이 나라 세자 이율을 발견하고는 다들 경악과 놀람을 금치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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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건 낭자 몫입니다.”

율이 손바닥만 한 크기의 주머니를 주화에게 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궁금하면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알려줄 생각은 없단 것처럼 율이 빙긋이 웃으며 눈짓으로 주머니를 가리켰다. 주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율이 준 주머니를 열어 안을 보았다.

“이, 이게 대체 무엇입니까?”

붉은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상아색의 기다란 물건에 주화가 기겁하며 물었다.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율이 주화의 손바닥에 있던 멧돼지의 엄니를 가져갔다. 그리고 허공에 들고 찬찬히 살펴보다가 도로 주화에게 주었다.

주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싫다는 뜻을 완곡히 내비쳤다.

“제 작은 선물입니다. 본래는 아바마마를 드리려고 하였으나, 낭자의 도움으로 잡은 녀석이니 성의는 표시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율이 받아달란 듯 간곡한 눈빛으로 주화를 쳐다보았다. 덜컥 마음이 약해졌던 주화가 율이 내민 멧돼지의 엄니를 받았다.

“아무쪼록 손등에 상처는 잘 아무길 바랍니다.”

할 말을 마친 율은 예를 갖추어 주화에게 인사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제야 고맙다는 말을 지금껏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한 주화가 그의 소맷자락을 무람없이 덥석 잡았다.

“제게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율이 무언가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주화를 내려다보았다.

순간, 쑥스러운 마음에 주화의 얼굴이 붉게 물든 노을처럼 변하였다. 그러곤 아무것도 아니란 듯, 하고 싶었던 말을 입안에 담아두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의원에 특별히 말해 댁으로 의원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더는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았던 율이 아쉬움이 짙게 밴 발걸음을 떼었을 때였다.

“고……맙습니다, 세자저하.”

주화가 겨우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수줍음에 움츠러들어 어깨가 당장이라도 사라질 듯하였다.

멈칫하였던 율의 입가에 꽃처럼 화사한 웃음이 활짝 피었다.

#2.

담장마다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절정에 이른 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봄 향기 가득한 바람이 살랑이며 불어와 방 안에 넓게 퍼졌다.

그러나 주화의 마음은 을씨년스러운 기운으로 가득하였다. 화창한 날과 달리 비가 내리는 그녀의 가슴은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에 머물러 있었다.

주화가 멍한 시선으로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별궁을 찾았다.

“형수님께선 뭘 하고 있으신가?”

상객(上客)의 물음에 상궁이 아연실색하였다.

“대군마마, 형수님이라니요. 그리 말씀하시면 아니 되옵나이다.”

“뭐 어떤가. 엄밀히 따지면 영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궐 안에서는 지켜야 하는 법도가 있습니다.”

“난 이리 부르는 게 더 친근감이 들어서 좋네.”

“하오나…….”

“뭐 하는가? 어서 내가 왔다고 형수님에게 고하지 않고.”

이 나라의 세자 율의 동생인 송현대군, 이태경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거두며 제법 위엄 어린 목소리로 말하였다.

나이는 어려도 왕자의 신분이었다. 감히 명령을 어떻게 거역하겠는가. 머뭇거리던 상궁은 하는 수 없이 목청을 돋우며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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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사이 평안하셨습니까?”

“송현대군 덕분에 편히 보냈습니다.”

“그새 제 이름을 잊어버리신 겁니까?”

태경은 주화가 ‘송현대군’이라 부른 게 못내 서운하단 듯 팔짱을 끼며 휙,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당황한 주화가 얼른 허공에 손을 내저으며 기억하고 있다 말하였다.

“그렇다면 말씀해보십시오. 제 이름이 무엇입니까?”

“태경, 이태경이 아닙니까.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태경이라 부르십시오.”

“궐의 법도가…….”

“하여튼 곽 상궁은 제 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단박에 거절하려는 주화의 말을 중간에서 자른 태경이 등까지 돌려 닫힌 방문을 보았다. 정확히는 방문 너머에 있는 곽 상궁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그녀가 주화에게 조금 전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법도 운운하며 태경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도록 한 게 분명하였다.

“곽 상궁이 그래야 한다고 했습니까?”

눈 끝에 힘을 주며 태경이 주화에게 물었다.

“제가 그러고 싶지 않아서 그럽니다.”

“전 형수님이 이름을 부르는 걸 듣고 싶습니다.”

“또 형수님이라 하십니다.”

“형님이 그래도 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세자저하께서 그리 말씀을 하셨다고 해도 그리 부르시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듣기라도 하면 궐에 난리가 날 겁니다.”

“형수님 앞에서만 이리 부르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습관이란 무서운 법입니다. 제 앞에서 그리 불러 버릇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말이 잘못 나올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지금부터라도 절 형수님이라 부르지 않도록 하셔야 합니다.”

제법 단호한 주화의 태도에 태경이 입술을 삐쭉이며 불만스러워하였다. 그러다 언제 토라졌냐는 듯 싱긋 눈웃음을 지으며, 주화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형수님.”

주화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두 손 두 발 다 들었단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임금이 직접 나선다면 또 모를까. 태경이 고집을 쉽사리 꺾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아는 탓이었다.

“왜 그리 낯간지럽게 부르십니까?”

그가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 아양을 떨어댈 때면 곤란한 일을 부탁해오곤 하였다. 한 번은 마음이 약해져 뭐든 말해보라고 했다가 온종일 별궁 안을 뛰어다니며 숨바꼭질을 해야 했다. 더는 못 찾겠다고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주화가 찾아주기 전까지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시는 태경의 청을 들어주지 말겠다고 매번 다짐해도 순박한 표정에 번번이 무너졌다. 오늘은 기필코 넘어가지 않으리라 했던 다짐이 무색하게도 주화는 어느새 태경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달콤한 약과가 드시고 싶지 않으십니까?”

“제가 알기론 중전마마께서 약과를 못 먹게 한 것으로 아는데요.”

“전 안 먹을 겁니다. 형수님께서 드시는 것만 바라볼 겁니다.”

“그 약조 지키실 수 있으십니까?”

미심쩍다는 듯 눈꼬리를 길게 늘이며 주화가 태경을 쳐다보았다. 이제 고작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약조였다. 아무리 왕자라고는 해도 아직 약조의 무게감을 알기엔 어리다고 생각하였다. 어린아이의 참을성이 과연 얼마나 길겠는가. 그런데도 주화는 또다시 태경을 믿어 보려 하였다.

눈치가 빠른 태경은 주화가 슬슬 넘어오고 있다는 걸 파악하였다. 그래서 그는 절 믿어도 좋다는 듯 가슴을 펴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