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사무실 그 남자, 달콤해

“누구세요?”

“뭐?”

제대하고 나오자마자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새벽 1시에 집 초인종을 눌렀다.

한데 생전 처음 본 여자가 문을 열어줬다.

“누구시냐고요?”

주상은 여자의 위아래를 훑었다. 후드티에 딱 붙은 레깅스라니. 딱 봐도 완벽한 에스라인, 완전 내 스타일이다. 허벅지는 탄탄한 보였고 대충 묶은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인데도 엄청난 미인이다. 어디서 본 얼굴 같기도 하고, 헤헤 이쁘다!

하지만 이 여자는.

“네 누나다, 이 화상아.”

순간 이 여자가 내 목에 팔을 휘감더니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으악.”

“제대했으면 곧장 집으로 쳐올 것이 어딜 싸돌아다녀?”

“아아, 잠시만요, 이거 놔 보세요. 누구라고요? 아아.”

“이 자식이 디질라고.”

자칭 누나라는 사람한테 개처럼 질질 끌려 와 부엌에 오고서야 겨우 풀려났다.

무슨 여자가 힘이 저렇게 센지.

고개를 까딱까딱 돌리며 식탁을 보니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가득했다.

“앉아!”

누나라니? 나한테 누나는 이주나 한 사람밖에 없는데. 움찔하며 더욱 경계했다.

그사이 자칭 누나는 가스레인지 위에 놓인 식어 버린 불고기를 데웠다.

“저 자식 먹이겠다고 아침부터 요란을 떤 내가 병신이다.”

말투 보니 누나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아 맞다! 얼마 전 엄마가 면회 와서 말했지.

[누나 살 많이 빠졌어!]

그래도 그렇지.

“진짜, 누나야?”

“뭐래? 이 집에서 너한테 음식 해주는 사람이 엄마랑 나 말고 누가 있어?”

오마이갓, 나 군대가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날씬한 누나를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유아기적 누나 사진만 봐도 오동통하다. 말 그대로 소아 비만.

그래서 이 상황이 낯설다.

내가 아는 우리 누나는 키 165에 몸무게 82킬로, 지금의 누나는 키 165에 49킬로? 도대체 얼마를 뺀 겨? 못 잡아도 30킬로는 넘게 뺀 거 같은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 넓은 줄만 알던 누나가.

“하아, 참.”

길 가다가 만나면 절대 못 알아보겠다.

“늦으면 늦는다고 전화했으면 무작정 안 기다리지!”

“.....”

“야, 전화는 왜 또 안 받아? 디질라고.”

저 말투, 빼박 우리 누나다.

주나가 데운 불고기를 접시에 담아 돌아서자 주상은 일부러 누나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이목구비 봐라. 그러고 보니 슈퍼 모델 참가자 출신인 사촌 누나랑 비슷하게 생긴 것도 같다. 아니 더 이쁘다.

“뭐? 왜?”

“낯설어서요?”

“먹어라.”

“넵!”

“넵이 뭐냐? 안 어울리게?”

아니이, 적응 안 되는 걸 어쩌라고? 암만 봐도 딴 사람인데.

“맛있게 먹어.”

“넵! 아아니 응.”

이미 술을 깼고 배도 부르지만 누나 성격에 안 먹으면 처맞을까 봐 일단 젓가락을 들었다.

지금 누나의 모습은 다시 봐도 아무리 봐도 꼼꼼히 봐도 적응 안 되고 낯설다.

5일 후.

누나에게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누나 애인역을 하란 말이지?”

“어, 9개월 전에 나 찬 새끼 내일 만나기로 했거든. 나와서 애인 역 좀 해줘,”

“그거 해주면 나한테 뭐 해줄 건데?”

“뭘 원하는데?”

“새 핸드폰 사줘. 지금 거 너무 후져.”

“핸드폰 같은 소리 하네.”

“싫으면 다른 사람 알아보든가.”

주나는 주상의 위아래로 훑으며 생각했다.

내 동생이지만 어디 가서 절대 빠지는 외모는 아니다.

물론 우리 회사에 저만큼의 비주얼을 가진 인간이 둘씩이나 있지만, 어차피 부탁할 상황도 아니고 나이로 보나, 키로 보나, 얼굴로 보나, 비주얼로 보나 경민이 그 자식보다 백배 낫다.

아니 그 이상이지. 게다가 군대 갔다 온 지 얼마 안 돼 피지컬도 최고의 상태이다.

한마디로 퍼펙트하지. 딱 하나 걸리는 거 군인 티 나는 저 짧은 머리.

“좋아.”

“진짜지? 앗싸, 안 그래도 복학 전에 알바해서 사려고 했는데.”

“내일 오후 5시에 가을바람 카페로 준비 제대로 해와.”

“왜 하필 5시야?!”

“왜에?”

“3시에 교수님 만나야 하는데.”

“안 돼! 핸드폰 안 받고 싶어?”

“알았어. 어떡하든 시간 맞춰 볼게.”

“옷은 있어? 제대로 차려입고 나와야 할 거 아냐?”

“없지.”

주상은 능글맞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암튼.”

주나는 바로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주상에게 줬다.

“자.”

“엇! 오올 카드를 넘기네!”

“딱 옷만 사라. 딴 거 사다 걸리면 디진다.”

“신발도.”

“알았어, 알았어.”

주상이 기뻐하니 주나도 피식 웃었다.

사실, 동생이 제대하면 옷 한 벌 해줄 예정이었는데 이참에 잘됐다 싶었다.

하루가 지나고 드디어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주나는 어제 백화점 가서 비싼 돈을 주고 산 원피스를 끄집어냈다.

흰색과 붉은색이 적절하게 가미되어 옷만으로도 충분히 섹시한데 입으면 강렬하면서도 몸매가 돋보이는 그런 옷이다.

원피스를 입고 액세서리를 착용한 다음 화장까지 완벽하게 하고 미용실로 향했다.

적어도 그 자식이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보다 훨씬 예쁘고 최대한 완벽하게 보여야 한다.

미용실에 들어서자마자 담당 미용사에게 딱 한마디만 주문했다.

“언니, 저 오늘 9개월 전에 저 찬 놈 만나러 가거든요? 최고로 예쁘게 해주세요.”

“어머 어떡해. 알았어요.”

경순 씨가 그랬다. 미용실에서 최고의 서비스를 받는 방법이 찬 놈 만나러 간다고 말하는 거라고.

나를 찬 놈 이름은 김경민, 이 자식이 9개월 전에 20킬로만 빼면 다시 만나 주겠다는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했었다.

물론 난 그 말을 믿었고 독하게 살을 뺐다. 근데 알고 보니 그 자식은 그 당시에도 지금도 이미 딴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그 양다리.

“나쁜 새끼! 내가 지한테 얼마나 잘했는데.”

몇 달 전 퇴근하고 집으로 가다 경민이 어떤 년의 허리 두르고 지나가는 것을 봤다.

그날은 정말 지옥이었다.

충격받아서 그 자식의 뒤를 따라가다 교통사고로 죽을 뻔했다.

지금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듣기로는 현재 만나는 여자랑 사이가 안 좋다고 한다.

해서 지금이 딱 복수하기 좋은 상황이다.

이번에 나가면 아주 작살을 낸다. 내가.

지금 시간은 오후 4시 50분. 카페에 도착했지만, 바로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주상에게 톡을 보냈다.

[어디야?]

[교수님 심부름 왔다가 늦어져서 지금 출발하니까 조금만 시간 끌어!]

이 자식이 진짜.

[핸드폰 받고 싶으면! 최대한 빨리 와라.]

[알겠습니다. 물주님.]

거울을 꺼내 다시 한번 외모 상태를 점검했다. 상큼하고, 청순하고, 매력 터지고.

다시 한번 향수 뿌리고 자신감 업하고 도도하게 카페에 들어섰다.

들어오면서 둘러보니 경민은 창가 쪽으로 앉아 있다가 가게 문이 열리자 돌아봤다.

바로 상큼하게 웃으며 아주 매력적인 걸음걸이로 경민에게 다가갔다.

경민은 34킬로나 빠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와, 이쁘다.”

주나가 웃으면서 다가오니 경민은 눈을 떼지 못하고 따라 웃었다.

주나는 바로 앞에 도착해 아주 다정하게 말했다.

“경민아.”

“네?”

“뭐야? 네라니!”

경민은 어리둥절했다. 생판 처음 본 여자가 나에게 알은체한다.

바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나를 스캔하고는.

“누구세요?”

하다 설마 이주나?

“오마이갓!”

이목구비를 보니 살 빠진 주나인 것도 같아서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주나?”

“뭐야 김경민. 그래, 나 이주나.”

경민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우아.”

살찐 사람은 긁지 않은 복권이라더니 이주나! 제대로 복권 당첨이네!

“어, 주나야 반갑다. 진짜 오랜만이다.”

“우리 9개월 만이지?”

“그런가? 다리 아프겠다 앉아.”

“응.”

주나는 경민의 앞자리에 앉으며 일부러 우아하게 긴 다리를 꼬았다.

마치 샤론 스톤이 원초적 본능에서 그랬던 것처럼.

경민의 눈은 본능적으로 주나의 쫙 뻗은 다리를 훑었다.

캬아, 완벽한 보디라인 보소.

“살이 너무 빠져서 못 알아봤어. 도대체 얼마나 뺀 거야?”

“한 34킬로? 애 하나 들어냈지 뭐.”

“그러네, 놀랍다. 어 뭐 마실래?”

“녹차.”

“어, 그래! 잠시만 기다려.”

경민이 주문하기 위해 카운터로 가자 주나는 바로 주상에게 톡을 보냈다.

[언제 와? 디진다.]

[택시 탔는데 차가 밀려. 최대한 빨리 갈게.]

그저 한숨 나왔다.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자식.

주문을 끝낸 경민이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주나는 상큼 터지게 웃었고 그 미소에 경민의 심장도 덩달아 터졌다.

세상에 웃는 모습도 천사잖아. 우리 주나 최고다.

주나는 경민이 자리에 앉자마자 넌지시 물었다.

“혹시 만나는 사람은 있어?”

“없지이, 알잖아, 나한테 너뿐인 거.”

이런 미친 자식을 봤나?

내가 다 알거든? 어디서 멍멍이 소리야?

주나는 애써 환하게 웃었다.

“진짜!”

“넌? 설마 나 두고 바람피우는 거 아니지? 그럼 나 너무 슬프다.”

“뭐라는 거야. 김경민 우리 헤어졌잖아.”

“우리가 왜 헤어져? 내가 말했지? 너 20킬로 빼면 언제든지 오라고. 난 네가 살 빼고 다시 오기를 기다렸어.”

“그러니까 네 말은 우린 헤어진 게 아니었고 넌 내가 살 빼도록 기다렸다 이거야?”

“그렇지.”

들을수록 기막히고, 볼수록 뻔뻔한 자식이다.

이런 자식 때문에 아까운 내 인생을 2년씩이나 허비했다니.

“너 참 나쁜 자식이다.”

“뭐?”

“그럼 네 SNS에 같이 사진 찍은 년은 누구고 홍콩에 여행 같이 간 년은 누군데?”

“그건.”

경민은 순간 당황했다.

“걔는 그러니까 걔랑은 사귀는 건 아니고! 야 이주나 너 SNS도 해?”

“물론 하지.”

“걔는 신경 쓰지 마. 잠깐 만나긴 했는데, 오래 사귄 것도 아니야. 어제 헤어졌어.”

“웃기고 있네. 야! 김경민 그 여자랑 만난 지 1년 된 기념으로 홍콩 간 거라며? 양다리 걸치고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니까 좋디? 아, 양다리가 아니라 문어 다리였나?”

더는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