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많이 좋아합니다.

서연과 함께 쇼핑을 가기로 한 주말.

쇼핑을 즐기는 편이 아닌 희주라 그녀과의 약속이 부담스러웠던 탓에 어젯밤 잠을 설쳤다.

희주는 민준이 함께하길 바랐지만, 그와 서연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오늘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녀를 혼자서 감당해야만 하는 날이었다.

“언니! 이리 와 봐요.”

마치 제 세상을 구경시켜주려는 듯 신난 서연이 희주의 팔을 끌어당겼다.

마지 못해 그녀를 따라간 곳은 화려한 색감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품매장이었다. 서연은 물 만난 고기처럼 이것저것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거, 이거, 이거 입어 볼게요. 언니도 마음에 드는 거 입어 봐요. 우리 오늘 예쁘게 하고 놀러 가요.”

그녀의 생긋 웃는 모습에 희주는 그저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이쁜 그녀는 따로 꾸미지 않아도 될 정도로 상큼한 모습이었다.

이런 여자라면 어떤 남자라도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어머! 언니. 이거 정말 잘 어울려요.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사야 해요. 이거 계산해 주세요.”

“아, 아뇨. 내가 살게요.”

“같이 쇼핑와 준 것도 고마운데 옷 한 벌은 사주게 해줘요. 대신 맛있는 밥 사주면 되잖아요.”

“그래도⋯.”

이게 얼마짜리 옷인데요⋯⋯.

희주도 예전 친구들과 어울려 흥미 없는 쇼핑을 하던 때가 있었으니 그녀가 사주겠다는 옷의 가격 정도는 알고 있었다.

사실 부담스러운 금액도 문제였지만, 이렇듯 스스럼없이 저를 대하는 그녀의 모습에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제가 민준과 계약 연애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가 얼마나 실망하게 될까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

희주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마치 몇 년은 쇼핑하지 못한 사람처럼 백화점을 샅샅이 훑을 것처럼 돌아다녔다.

얼마 후, 옷 구경이 지겨워졌는지 1층 화장품 매장 메이크업 스튜디오로 내려온 서연이 희주를 동그란 의자에 앉혔다.

웃으며 인사하는 직원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단골 매장인 것 같았다.

그녀가 직원과 짧은 대화를 나누더니 희주에게 다가왔다.

“언니. 나 아까 위층에서 못 신어본 신발이 자꾸 생각나서 잠깐 다녀올게요. 여기서 메이크업 받고 있어요.”

“같이 가도 돼요.”

“아뇨. 언니는 편하게 여기 있어요. 금방 갔다 올게요.”

말을 마친 서연이 직원에게 눈웃음을 짓고는 이내 매장 밖으로 나가 버린 탓에 꼼짝없이 의자에 앉은 희주는 상냥한 직원에게 피부 테스트를 시작으로 풀메이크업을 받았다.

늘 바쁜 출근 시간 가벼운 화장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직원이 비춰주는 거울 속 모습이 그녀는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어!

거울 속 제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보던 그녀의 두 눈이 놀란 듯 커졌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곳에 놀랍게도 민준이 서 있었다.

“여긴 어떻게⋯.”

“서연이가 같이 식사하자고 연락이 와서.”

“아, 서연씨 위층에 잠깐 갔어요.”

“네. 쇼핑은 다 한 겁니까.”

그녀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이 상냥하게 수고하셨다는 말을 하자 감사의 인사를 한 후 의자에서 내려왔다.

하⋯!

옷을 가다듬는 희주의 모습에 민준은 저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뱉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녀의 눈부신 모습에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어색한 듯 살짝 수줍게 서 있는 그 모습이 정말이지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게다가 방금 메이크업을 받은 건지 얼굴에선 유독 눈부실 정도로 빛이 나 보였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오똑한 콧날을 지나 선명하게 도드라진 입술에 다다르자 살짝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 입술에 입술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온몸이 후끈 달아오른 탓이었다.

“나 이상해요?”

빤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느낀 그녀가 수줍게 입을 열었다.

새로 산 원피스도 생각보다 짙은 화장도 모두 너무 어색해 자신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요.”

그의 마음과는 다른 딱딱한 대답에 그녀는 좀 더 의기소침해졌다.

아무래도 이런 모습은 제게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오지 않는 서연을 원망하며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후-. 어색해 죽겠네.”

“예쁩니다.”

“네?”

민준의 목소리에 놀란 그녀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갈 곳 잃은 그녀의 눈동자가 방황을 멈추고 이윽고 그와 시선을 맞췄지만 떨리는 마음은 여전했다.

뭐, 뭐라구요?

지금 예쁘다고 했어요?

“오늘 예쁩니다. 서희주 씨.”

몸에 달라붙지 않는 하늘하늘한 실크 소재의 베이지 원피스는 그녀의 작고 흰 얼굴을 더욱 환하게 만들어주었다. 쇄골 아래까지 내려오는 굵은 웨이브의 갈색머리와도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 흔한 악세사리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임에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보이는 우아한 모습에 민준도 그만 진심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어색한 눈맞춤이 이어지고 있을 때 구세주처럼 서연이 양손 가득 무겁게 쇼핑백을 들고 나타났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의 말에 놀란 희주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굳어있었다.

“오빠, 왔어? 언니 어때, 너무 이쁘지?”

“어? 어. 그러네.”

희주의 시선은 피한 채 그가 어색한 대답을 남기자, 서연이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배고파. 오빠, 언니 우리 얼른 밥 먹으러 가요.”

“그래요. 얼른 가요.”

그의 믿을 수 없는 대답에 어색해진 희주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어!”

“어머! 엄마⋯.”

그들이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 그때, 맞은 편에서 유유히 걸어오는 홍 여사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녀는 민준과 희주를 번갈아 보다가 서연과 눈이 마주치자 매섭게 노려보았다.

“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태평하게 지금 쇼핑이나 하고 있어?”

“아, 그게⋯.”

“제가 같이 쇼핑가자고 부탁했어요. 죄송합니다.”

“어머! 희주 양이 죄송할 게 뭐야. 안 그래도 집 나가서 어디서 지내고 있나 했더니 민준이 집에 있었나 보네.”

홍 여사가 조금 전 서연을 바라볼 때와는 다르게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희주의 팔을 잡았다.

아무래도 그녀는 희주가 대단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민준은 그 모습에 흐뭇해하며 이참에 서연을 보내버릴 요량으로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얘 때문에 불편해 죽겠어요. 좀 데리고 가세요, 어머니.”

“오빠!”

서연은 저를 보내버리려는 그가 야속한 듯 커다란 눈망울에 서운함을 가득 담아 노려보았다.

“지 멋대로 하겠다는 애를 누가 말려. 너희 집에서 내보내든 말든 네가 알아서 해.”

“엄마도 오빠도 진짜 너무하네. 내가 짐짝이야?”

“너 눈치 없이 희주 양도 있는데 그 집에서 계속 있었던 거야? 희주 양 많이 불편했겠어. 근데 오늘 너무 예쁘다.”

홍 여사가 서연은 관심 없다는 듯 희주에게만 시선을 맞추자, 제게만 쏟아지는 시선에 몸둘 바를 몰랐다.

두 모녀가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꾸민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하는 그녀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 괜찮아요. 서연씨 너무 밝고 귀여워서 같이 있으면 기분 좋아지거든요.”

“어머! 언니. 진짜 언니밖에 없어요.”

서연이 희주에게 팔짱을 끼며 감동받은 듯 입을 삐죽거렸다.

“넌 쇼핑 다 했으면 집에 가.”

“엄마! 진짜 너무 한 거 아니야? 나 언니랑 밥 먹으러 가는 중이었어.”

“희주 양. 맛있는 밥은 나랑 먹으러 가자.”

희주를 사이에 둔 두 모녀의 싸움을 바라보던 민준이 피식 웃었다.

홍 여사와 서연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희주의 당황한 모습이 너무 귀여워 보였다.

우리 집안 여자들이 이토록 좋아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건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는 뜻 같았다.

“그냥 다 같이 가면 되잖아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얼른 가시죠.”

그의 한 마디에 희주의 팔을 하나씩 잡은 홍 여사와 서연이 나란히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희주 양 여기 스테이크 꽤 괜찮아. 마음에 들 거야.”

“네.”

네 사람은 유명한 셰프가 있는 호텔 레스토랑에 앉아 있었다.

서로 희주 옆에 앉겠다는 걸 민준이 가까스로 차지한 덕분에 두 모녀는 나란히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두 사람 때문에 이 사람이랑 저 제대로 식사도 못 하겠어요. 적당히 하시죠.”

“우리가 뭐 어쨌다고.”

“나 괜찮아요.”

홍 여사가 살짝 서운한 기색을 보이자 희주가 민준에게 고개를 돌려 미소를 보였다.

나는 사실 당신의 이 사람 소리에 더 죽을 것 같아요.

“오빠가 처음 하는 연애라 좋아서 그러잖아, 우리가.”

“그놈의 처음 소리 좀 그만하면 안 되냐. 이 사람 부담스러워서 소화 안 되겠다.”

당신 때문이라구요, 강민준 씨!

설레서 소화 안 되면 당신이 책임져요!

“괜찮다구요. 민준 씨.”

제발 이름을 불러주길 바라는 그녀의 간절한 눈빛이 그에게 닿았지만,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그는 그저 치명적인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희주 양. 우리랑 같이 식사하는 거 부담스러워?”

“아, 아니요. 저 괜찮아요.”

“전에도 말했지만, 오늘 보니까 난 희주 양이 더 마음에 드네. 우리 아들 애인이어서 하는 말은 아니고. 호호.”

“네. 감사합니다.”

“편하게, 편하게 대해. 요즘 시대가 어느 땐데 민준이가 속 썩이면 나한테 흉도 보고 그러라고.”

“언니. 그건 나한테 해도 돼요.”

“이 사람한테 바라는 게 그런 겁니까.”

민준이 어느새 희주와 두 모녀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마치 그의 진짜 연인을 대하듯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그의 가족 덕분에 희주도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졌다. 진심으로 그의 연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은 너무 따뜻했다.

그러다 문득 제 진짜 연인이었던 영민과 미애의 모습이 떠올라 이내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괜찮아요?]

그는 말없이 살짝 미소만 짓고 있는 희주가 혹시나 불편해하진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바로 옆에 앉은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가라앉았던 그녀 마음이 조금씩 생기를 찾았다.

그녀답지 않게 그에게 장난을 치고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안 괜찮으면 데리고 나갈 거예요?]

아리송한 표정으로 메시지를 확인한 그가 힐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입가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미소로 보아 제게 장난을 친 게 틀림없어 보이자 민준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짖궂은 그녀의 장난마저도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귀엽게만 보이는지 무언가에 단단히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사람이랑 오붓하게 시간 보내고 싶은데 오늘은 서연이 어머니가 데려다주세요.”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말까지 서슴없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의 상태는 분명 정상이 아님이 틀림없었다.

이런 달콤한 말을 뱉은 그나 듣고 있던 세 여자나 한바탕 놀라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 우리 아들 연애하더니 너무 다정해졌다. 알았어. 얘는 내가 알아서 해볼게. 둘이서 좋은 시간 보내, 아들.”

“⋯⋯네.”

희주는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빤히 그의 얼굴을 바라만 보았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저와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이 상황에 정신이 나갈 사람은 아무래도 그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런 말을 뱉은 자신에게 놀라 넋이 나간 듯한 그의 모습에 그녀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아들의 믿기지 못할 태도에 한껏 흥분한 홍 여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려 서연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