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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도 참 지극정성이다. 주말에도 남자친구한테 도시락 갖다 바치고.”
“간만이잖아.”
거울 앞.
하늘색 플레어 원피스를 입은 단발머리의 여성이 머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친구의 야유에도 그냥 웃어 보이는 그녀의 이름은 ‘강다령’이었다.
아담한 투 룸에서 친구 ‘김이슬’과 함께 자취하고 있는 그녀는 도시락을 챙겨 집을 나섰다.
“갔다 올게.”
“오늘 같은 날 저러다 더워 죽지.”
“덥다. 카페 갈까?”
“응. 스무디 사줘.”
햇볕이 내리쬐는 8월의 도심이었다.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한 길은, 해가 살을 태울 기세로 빛을 뿜어대고 있었다.
다령은 방금 지나간 커플들을 보며 자신의 남자친구인 우형을 떠올렸다.
우형과 3년째 연애 중인 27살의 다령은, 요즘 두 사람 사이에 찾아온 권태기에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 권태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자 그녀는 오늘, 정성 가득, 사랑 뿅뿅한 도시락을 준비했다. 토요일에도 일하는 우형과 그의 사무실 식구들이 나눠 먹을 수 있게 아주 넉넉한 양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우형의 회사에 도착할 때쯤, 쨍쨍했던 하늘엔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
[1층입니다.]
엘리베이터를 탄 그녀는 ‘황선 식품’의 이름이 적혀있는 8층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그녀가 ‘닫힘’ 버튼을 누르려고 할 때였다.
“잠시만요.”
한 남성의 목소리에 다령이 급히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눌렀다.
와… 잘 생겼다.
엘리베이터를 오르는 남성을 보고 다령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주름 하나 없는 곤색의 정장을 몸에 딱 맞게 입고, 하얀 얼굴에 왁스를 이용해 앞머리를 말끔히 올린 남성은 키까지 컸다.
그리고 그런 남성을 보며 다령이 멍한 표정을 짓던 그때, 남성과 눈이 마주쳤다.
잘생긴 얼굴에 비해 눈매가 매서웠던 남자가 자신을 보고 흠칫, 놀랐다.
혹시 자신이 아는 사람인가 싶어 다령이 눈을 피하지 않자, 남성은 금방 고개를 돌렸다.
‘그래, 저런 남자를 내가 알 리가 없지.’
남성은 다령과 같은 층에서 내릴 모양이었다.
[문이 닫힙니다.]
곧이어 엘리베이터가 목표 올라가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의 층수 표시 램프가 ‘7’에서 ‘8’로 바뀌던 그때였다.
‘덜컹!’하는 큰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어?”
“하….”
갑작스러운 상황에 두 사람은 서로 당황했고, 다령과 함께 탔던 남자는 재빠르게 엘리베이터의 비상 버튼을 눌렀다.
“어어! 이봐요!”
그때, 비상 버튼을 누르던 남자가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힘없이 왼쪽으로 쓰러졌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엘리베이터 멈췄죠? 금방 해결해드릴 테니까 걱정 마시고 침착하게 있어 주세요. 지금 몇 명이 있나요?]
다행히 스피커에서 관계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다령은 두려움에 다급하게 외쳤다.
엘리베이터가 멈춰서가 아니라, 사람이 죽을까 봐.
“두, 두 명이요! 아니, 지금 한 명이 쓰러졌어요! 사, 살려주세요….”
[사람이 쓰러졌다구요? 의식은요?]
“누, 눈 감고 있어요.”
[김씨, 119 불러.]
다급한 관계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혹시 몰라서 그러니 하실 수 있는 응급처치를 부탁할게요!]
“으, 응급처치요? 저 심폐소생술 같은 거 제대로 할 줄 몰라, 모르는데요.”
[환자의 목을 젖혀서 기도 확보부터 해주시구요! 손깍지를 끼고 가슴 압박부터 해주세요. 체중 실어서 빠른 속도로요!]
난생처음 겪는 이 상황에서 이 남성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 길로 다령은, 안전교육 시간에 ‘보기만’ 했던 심폐소생술을 어설프게 흉내 내기 시작했다. 8월의 날씨,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령의 머리카락은 그녀의 얼굴에 얼기설기 달라붙었다.
“어허헝, 일어나세요오.”
하필 이런 순간 엘리베이터가 멈추다니….
심폐소생술에도 남성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그 순간 다령은 ‘기도 확보’를 떠올렸다.
“이, 인공호흡이라도 해야 하나….”
사람을 살리는 일에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남자의 고개를 뒤로 젖힌 다령은 눈을 질끈 감고 인공호흡을 시도했다.
그렇게 심폐소생술과 인공호흡을 반복하고 있자,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어…!
때마침 남자는 눈을 떴고 그와 눈을 마주쳤을 때, 다령은 안심했다.
이 상황에서도 그녀는 남성의 따뜻한 눈빛에 놀라고 있었다.
엄청 차가워 보였는데 애틋해 보이기까지 하다니.
그러다 자신의 얼굴이 남성과 너무 가깝다는 걸 깨닫고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 남자의 두 팔이 자신을 끌어안았다.
“훕!”
인공호흡이 키스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
열린 문틈 사이로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올 때쯤, 다령은 자신을 안고 있던 남자를 황급히 뿌리쳤다.
“히… 힉!”
이, 이건 무슨 신종 변탠가….
바닥에 주저앉아 겁먹은 표정을 짓던 자신과 달리, 남성은 아직도 비몽사몽한 얼굴로 그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아… 아니네.”
눈을 뜬 남자가 가장 먼저 뱉은 말이었다.
“본부장님!”
“다령아!”
곧이어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아본 그곳에는 자신의 남자친구 ‘우형’이 있었다.
*
“아니, 그 사람은요!”
“죄송합니다. 일단 저랑 말씀 나누시죠.”
“사고 친 사람이 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엘리베이터 사고 후, 입을 맞춘 그 남성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 남성의 변호사라는 사람이 다령을 카페에 데려왔다.
“우선, 담당 변호사인 저와 얘기 나눠요.”
‘변호사’라는 직함이 어울리지 않게 살짝 펌 기가 있는 헤어스타일의 남자는 난처해하면서도, 접대용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건 고의였다구요! 키! 스요….”
흥분해서 화를 내던 다령이 주위 사람들을 의식한 듯 끝말을 줄였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의식이 없다가 일어나셔서 순간 꿈인 줄 아셨대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본부장님께서도 정말 죄송하다고, 이번 일만 넘어가 주시면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든 연락 달라고 하시네요.”
새파랗게 젊어 보이던 아까 그 남자가 본부장이란다.
변호사가 내민 명함에는 ‘배홍 그룹 고문 변호사_나희성’이라고 적혀있었다.
“저랑 장난하세요? 이건 변호사님 명함이잖아요.”
“위치가 위치이신지라 저를 통해서 연락을 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이번 일은 제가 정말 죄송합니다. 담당 변호사로서 본부장님이랑 같이 있었어야 했는데.”
어색한 미소를 짓던 변호사는, 웃음기를 싹 감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하긴, 이분이 무슨 잘못이겠어.
“제가 어떤 부탁할 줄 알구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일부러 삐딱하게 말하는 다령에게, 변호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실 분 아닌 거 같아요. 본부장님도 이럴 때 돈으로 해결하거나 하는 방법은 도리가 아닌 것 같다고 하시면서 힘드실 때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한테 연락, 주세요.”
*
“왔어?”
“아까 그거 사고….”
“알아, 사곤 거.”
한참 뒤, 다령이 우형의 회사 휴게실로 돌아왔다.
자신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하필 그 장면을 우형이 봐버렸으니.
민망해하던 다령의 말을 우형이 잘랐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평소랑 분위기도 달랐다.
“도시락… 안 먹었어?”
“아, 어.”
“왜, 나눠 먹지. 일부러 넉넉하게 싸 온 건데.”
“다령아.”
“응.”
“우리 헤어지자.”
“이거 내 거 아닌데….”
다령은 이렇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는 우형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우형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손을 떨며 사진을 내밀었고, 그 사진은 다름 아닌 초음파 사진이었다.
“딱 한 번이었어. 그냥 하윤이 한 번만 만났던 건데….”
‘하윤.’ 그 이름은 우형의 전 여자친구였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그리고 이 초음파 사진은 대체….
“이미 생긴 앤데 지우라고 할 수 없잖아. 나, 진짜 고민 많이 했어.”
바람만으로도 경악할 일인데, 전 여자친구가 아기까지 임신했단다.
다령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우형을 쳐다보자, 그는 미안한 얼굴로 눈을 피했다.
“야….”
바람피우는 년, 놈들은 쌍으로 물에 빠트려야 한다, 말하고 다녔던 자신이었다.
정작 본인 앞에 닥친 현실 앞에서 그녀는 힘없이 그 자리를 벗어날 뿐이었다.
“하….”
다령이 나가고, 홀로 남아 한숨을 쉬는 우형의 머리 위로 음식물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강다령!”
“쓰레기통에 쓰레기 버린다. 왜?”
더운 여름에 그녀가 정성껏 싼 도시락은,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쓰였다.
*
“박우형 이 나쁜 새끼.”
다령이 우형의 회사에서 나왔다.
그러면서도 내심 이 나쁜 새끼가 자신을 쫓아오지 않을까, 잡으러 오지 않을까 했는데, 그는 끝까지 자신에게 오지 않았다.
띠링.
[다령 씨, 금요일에 말하려고 했는데 미안해. 내일부터 다령 씨 안 나와도 될 것 같아. 이번 달 월급은 다음 달에 입금될 거야.]
‘울고 싶은 아이에게 뺨을 때린 격’이란 말이 있다.
때마침 날아온 팀장의 문자가 딱 그 짝이었다.
타이밍 좋게도 굵은 빗방울들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녀는 꼼짝없이 비를 맞으며 집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령은 하늘을 따라 펑펑 울기 시작했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빗속으로 사라졌다.
*
“그 여자는?”
“몰라. 계속 화내는 거 간신히 말렸어.”
저녁 8시가 넘어서야 도후의 집으로 돌아온 희성이, 도후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이제 막 씻고 나왔는지 꼿꼿하게 서 있었던 도후의 머리카락들은 물기를 품고 있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의 어깨가 꽤 넓었다.
“하… 돈 요구나 그런 건 안 해?”
“그럴 사람처럼은 안 보였어.”
“어떻게 믿어.”
“넌 왜 이렇게 사람을 못 믿냐. 꼬여 가지곤.”
“형은 어떻게 믿어?”
“난 변호사니까? 믿어야지.”
“있잖아, 뭐 착각하고 있나 본데 엄밀히 말하면 형 의뢰인은 나 아니야?”
“엄밀히 말하면 그 여자한테 실수는 네가 했지! 최선을 다하고 왔잖아!”
잠깐의 실랑이 끝에 도후는 자신이 졌다는 듯 소파에 다시 등을 기댔다.
“그런데 진짜 닮긴 닮았더라. 착각할만해.”
“닮기는!”
“너도 그래서 착각한 거 아니야?”
“설마 그런 이유까지 다 말한 건 아니지?”
“말하지 말라고 날 변호사로 고용한 거 아니야?”
도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낮에 갑작스러운 수면 증상에서 깨어난 도후의 눈앞에는 자신의 첫사랑 ‘소희’가 있었다.
아니, 소희를 닮은 이름 모를 여자가 있었다.
“오늘 약 안 먹었지?”
“아, 오늘 약 못 먹었는데.”
“그렇겠지. 아까 엘리베이터 안에서 쓰러졌잖아.”
“그때 한 번밖에 안 잤어.”
“응? 약 안 먹은 거치고 한 번이면 다행이네.”
도후와 희성은 사촌지간이기도 했지만,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이기도 했다.
까칠한 도후를 희성이 형답게 잘 보듬어 주고 있다.
희성은 대한민국 최고 로펌에서 일부러 도후를 돕기 위해 ‘배홍 그룹’ 고문 변호사직을 맡았다.
도후의 가장 큰 비밀이자 병인 ‘기면증’으로 인한 사건·사고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도후에게 ‘기면증’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 첫사랑 ‘소희’가 소리 소문없이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 뒤 그는, 자신의 입장 때문에 비밀리에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었다.
처방받은 약을 먹지 않으면 많게는 하루 네 번까지도 수면발작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오늘은 한 번 밖에 수면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 있는 컨디션 좋은 날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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