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뜻밖의 손님

서촌에서도 가장 깊숙하고 구불구불한 골목길.

그 길 끝에 자리 잡은 낡은 한옥 게스트하우스 가온.

가온의 주인장 달은 한껏 하품을 하며 앞치마를 둘러맸다.

올해로 스물아홉 살인 가온의 주인장은 말간 소녀 같은 얼굴로 능숙하게 칼질을 시작했다.

빠르게 두부와 감자, 호박을 잘라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에 넣었다.

그때 별이 곰 탈을 뒤집어쓰고 달에게 다가왔다.

“굿모닝, 오늘 밥은 뭐야?”

“흐엇, 깜짝이야 김별!”

놀란 달은 한 손으로 별의 등짝에 스매싱을 날렸다.

“아! 아파, 언니.”

별은 고통에 허리를 앞뒤로 꺾으며 곰 탈을 벗어냈다.

“집에서 탈 쓰고 다니지 말랬지!”

“언니, 이게 크리에이터 김별의 시그니처거든.”

“구독자 열 명도 안 되면서 무슨.”

“지금 서른 명이거든? 것도 2주 만에!”

별은 탈을 다시 뒤집어썼다. 곰 한 마리가 제 앞에서 엉덩이를 씰룩거렸다.

달의 이마에 갈매기 두어 마리가 새겨졌다.

“후우. 좋은 말로 할 때 벗어라.”

“쳇.”

별은 곰 탈을 벗어 옆구리에 끼고 입을 삐죽거렸다.

“그 몸통도 벗고 쫌! 손님들이 싫어할 거라고 몇 번을….”

“언니!”

“왜?”

“2주째 손님이라곤 개미 한 마리 없는 거 몰라? 무슨 손님 타령이야.”

달의 이마에 주름이 패었다. 그 사건이 떠올라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교복 입은 소녀들에게 테러를 당하고 손님이 뚝 끊겨 버린 지 벌써 2주째였다. 달의 입에서 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한 대 더 맞고 싶어?”

“왜 나한테 난리지? 따질 거면 그 자식한테 가서 따져.”

“그 자식 얘기 꺼내지도 마! 만나면 갈아 마셔 버릴 테니까.”

별은 달을 피해 거실로 나와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긴 통나무 식탁에 걸터앉아 TV를 켜는 순간 원수, 그 녀석이 등장했다.

“흠, 그럴 수가 없겠는데 언니?”

“뭐?”

“아니, 갈아 마시긴커녕 저 얼굴을 실제로 만나면 그냥 압도될 거 같은데.”

“조용히 해라, 김별.”

별은 달의 악다구니에 귀를 한 번 후비고는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희찬이 도도한 얼굴로 신형 세단을 몰고 있었다. 부엌에서 오이채를 썰던 달의 귀에도 그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TV 부서 버리기 전에 채널 바꿔라, 김별.”

별은 못마땅한 얼굴로 채널을 돌렸다. 하지만 광고마다 그 녀석이 등장했다. 이번엔 편안한 캐주얼 차림으로 커피를 마시며 웃고 있었다.

희찬.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배우.

그는 데뷔 8년 동안 단 한 번도 대한민국 톱스타의 자리를 놓쳐 본 적이 없었다. 탁월한 비율에 섹시한 외모와 미친 연기력으로 10대부터 50대까지 전 연령층의 여자들에게 골고루 인기가 있었다.

자동차, 커피, 핸드폰, 화장품, 전자제품, 소주 광고까지 광고 섭외 1순위인 그를 TV에서 보지 않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언니, 이건 불가항력이야.”

“내가 그래서 TV를 안 봐요. 여기저기 그 자식 안 나오는 데가 없어서.”

“웬수네, 웬수.”

오이채를 썰던 달의 칼끝이 멈췄다.

“웬수? 아니, 그놈은 원수야. 우리 가온 게스트하우스의 철천지원수!”

칼을 쥔 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때 TV에선 연예 프로그램 리포터가 한껏 들뜬 목소리로 기자회견장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오후 아시아의 스타 영화배우 서희찬 씨가 재계약을 놓고 불거진 소속사와의 갈등에 대한 입장을 밝힐 것으로 보입니다. 법적인 공방까지 이어질 위기에 처했다가 극적 타결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갈등의 원인과 결과를 놓고 연예계 관계자들의 관심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달은 어느새 다가와 TV를 주시했다.

“얼마나 성격이 그지 같으면 소속사랑 저 모양이래.”

“모르지 뭐, 계약 안 한다고 언론 플레이 하고 난리도 아니더니 결국 하나 보네.”

“넌 알고 있었어?”

“워낙 시끄럽게 떠들어대야지. 대한민국에서 언니만 모를걸.”

달은 원망 섞인 눈으로 TV를 지켜보다 마당으로 시선을 돌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손님이 좀 오려나….”

“언니! 내가 너튜브 열심히 해서 우리 게스트하우스 홍보해 줄게.”

“됐고, 공부나 하지 그래? 자퇴했다고 공부는 아주 손 놓은 거야?”

“언니! 요새 누가 공부해서 성공해, 꼰대처럼 공부하라 그런 소리 하지 말아 줄래.”

찰싹, 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의 손바닥이 별의 등짝에 꽂혔다.

“아아아, 아프다고!”

“딴생각 말고, 검정고시 봐서 대학 가! 알았어?”

달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별은 그런 제 언니의 뒷모습을 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학은 언니가 갔어야지···.’

촉망받던 화가 지망생 김달, 하얗고 투명한 고운 얼굴에 붓을 쥔 언니는 정말 예뻤다. 별은 그런 제 언니를 항상 자랑스러워했었다.

엄마의 투병 생활이 시작되고, 대학 입학을 포기한 언니는 지금까지 죽어라 일만 했다. 지금은 억척 똑순이가 다 되었지만 언니에게도 봄날 꽃 같던 시절이 있었다.

“언니, 나도 이제 다 컸어. 언제까지 언니한테 의지해서만 살 순 없다고.”

별은 작게 읊조리며 리모컨 채널을 돌렸다.

***

찰칵찰칵, 잡지 화보 촬영이 한창인 창고형 스튜디오.

희찬은 짙은 그레이 슈트에 포마드 헤어를 한 채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봤다. 섹시하면서 매혹적인 그의 분위기에 여자 스태프들의 눈에서 꿀이 떨어졌다.

재킷을 벗어 어깨에 걸치자 셔츠를 입고 있음에도 감출 수 없는 탄탄한 근육이 드러났다. 쌍꺼풀 없는 크고 깊은 눈매가 반짝였다. 급기야 스태프들 사이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와, 완벽한 9등신 아니니?”

“근데 서희찬 실제 키가 180이래요.”

“진짜? 190은 되어 보이는데?”

“그래서 비율킹이라고 하는 거잖아요.”

셔터를 누르던 작가의 손이 멈췄다.

“오케이! 고생했어, 희찬 씨.”

“감독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스태프들의 우렁찬 인사와 함께 촬영이 종료됐다.

주호와 코디가 얼른 희찬 곁으로 다가왔다. 희찬은 타이를 거칠게 풀어 제 코디에게 건넸다. 코디가 넥타이를 가지고 멀어졌다. 희찬은 촬영장까지 저를 따라와 감시하는 덩치들을 살폈다.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그들을 노려보자 덩치들이 희찬의 시선을 피했다.

“최 대표가 독이 바짝 올랐어요.”

“최 대표 새끼,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중저음의 매력적인 보이스엔 숨길 수 없는 짜증이 묻어났다.

“박하늘은?”

주호는 덩치들을 힐끔거리며 속삭였다.

“아침부터 와 있어요.”

“전달은 제대로 했지?”

“그럼요. 회사 체육 대회 때 입었던 추리닝, 검은 마스크, 검은 캡.”

희찬과 주호가 대기실 쪽으로 움직이자 덩치들이 슬금슬금 뒤를 따랐다.

대기실 앞. 희찬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옷 갈아입고 바로 나올게요. 뭐 같이 들어가든지?”

덩치들은 살짝 고개를 젓고는 복도에 자리를 잡았다. 주호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쓰게 웃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희찬이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그때, 대기실 안쪽 메이크업 룸에서 불쑥 남자 하나가 나타났다.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벗으니 서글서글한 귀여운 외모가 드러났다.

“숨어 있느라 고생 많았어요.”

주호가 하늘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하늘이 손을 내저었다.

“별말씀을. 자, 이제 박하늘이 서희찬이 될 차례인가.”

하늘이 분위기를 풀어 보려 농담을 건넸다.

“너 실수하면 그냥 끝이야. 인정하기 싫지만 너한테 내 운명이 달렸다. 박하늘.”

“네네, 걱정하지 마세요 선배님. 이 후배가 아주 멋들어지게 해낼 테니까. 우리 배우 아임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똑바로 하라고.”

“네엡.”

희찬은 어느새 하늘과 똑같은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하늘이 희찬 옆으로 다가와 손으로 브이를 그리며 주호를 봤다.

“주호 씨, 우리 사진 하나만 찍어 줄래요?”

“에?”

희찬이 미간을 구기며 하늘의 팔을 치워냈다.

“내가 왜 너 같은 놈한테 이런 일을 부탁했나 모르겠다.”

“형! 당연히 나밖에 없지, 내가 왜 서희찬 루키로 불리겠어? 키도 비슷하지, 체형도 비슷하지, 나만 믿으라니까요.”

“그래, 제발 기자회견장까지만 들키지 말고 부탁 좀 하자.”

하늘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남자는 결심한 듯 서로 잠시 눈을 맞췄다. 주호가 대기실 문을 열었다. 그 뒤를 따르는 건 마스크를 쓴 채 후드를 눌러쓴 하늘이었다.

희찬은 그대로 대기실에 남았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핸드폰이 울렸다.

[성공!]

하늘로부터 온 짧은 메시지. 희찬은 마스크를 쓰고, 하늘이 쓰고 온 모자를 눌러쓴 뒤 조용히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

같은 시각. 여의도 기자회견장 앞에는 희찬의 팬클럽이 목이 터져라 그의 이름을 외쳐대고 있었다. 기자들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며 회견장 밖의 풍경을 담았다.

기자회견장 옆에 붙어 있는 대기실에서 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서희찬 어디 갔어? 10분 뒤가 기자회견인데 이렇게 사라지면 어쩌라고! 박주호, 서희찬 어딨어?”

“제가 알았으면 잡았죠.”

“니가 몰랐다는 게 말이 돼?”

“박하늘이랑 짜고 치는 걸 무슨 수로 알아요, 제가.”

“이것들이 날 단체로 물 먹여!”

그때 누군가 대기실 문을 노크했다. 퀵 서비스 기사 하나가 들어왔다.

“여기 최 대표님이 누구시죠?”

“나요, 무슨 일이죠?”

“여기, 이거요.”

“뭡니까 이게?”

“저야 모르죠. 전달만 하는 건데, 여기 사인하시고요.”

최 대표는 서류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주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 새끼. 진짜 나랑 장난해! 나한테 그냥 내용증명 떡하니 보내고 사라져! 가만 안 둬.”

주호는 씩씩거리는 최 대표를 뒤로하고 슬쩍 대기실을 나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중저음의 높낮이가 거의 없는 차분한 목소리. 희찬이었다.

“형, 어디예요?”

“기자회견장에서 횡단보도 건너면 보이는 건물, 그리로 와.”

주호는 전화를 끊고 다시 두리번거리며 조용히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주호가 비상계단을 열고 사라지자 낡은 운동화 하나가 주호의 뒤를 쫓았다. 주 기자였다. 희찬에 대한 악의적인 기사의 90퍼센트가 그의 손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 기자와 희찬은 업계에서 유명한 앙숙 사이였다.

주호는 비상계단을 이용해 지하로 내려가 밖으로 나섰다. 횡단보도를 건너자 저 멀리 모범택시 한 대가 라이트를 깜빡였다. 주호는 빠르게 다가가 뒷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모자를 한껏 눌러쓴 희찬이 앉아 있었다. 맨얼굴에 흐트러진 앞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올리는 희찬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대충 상황만 파악하고 오랬지?”

“아니, 최 대표가 딱 버티고 서 있는데 몰래 나오는 게 쉬워요?”

“기사님, 일단 가시죠.”

기사가 백미러로 희찬을 힐끔거렸다.

“어디로?”

“일단, 여길 벗어나 주세요, 기사님.”

택시 기사가 한 번 더 희찬을 힐끔거리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후후.”

회심의 미소를 짓던 주 기자가 얼른 택시를 잡아타고 그들의 뒤를 쫓았다.

“형, 이제부터 어쩔 거예요?”

“6개월 지나면 최 대표가 놔줄 거 같아? 끈질기게 엉겨 붙을 거라고. 끌려 다니기 싫어.”

“근데 최 대표가 또 어떤 양아치 짓을 할지···.”

“쉽게 나불거리진 못 할 거야, 이젠 전쟁이다.”

희찬은 팔짱을 낀 채 그대로 눈을 감고 몸을 등받이에 기댔다. 주호도 더 이상 아무 말 않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