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휘이잉.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담벼락 아래 심어놓은 장미의 붉은 꽃잎이 나풀거렸다. 어여쁜 장미의 모습을 시샘이라도 하는 듯이 불어온 바람은 이내 열어 놓은 창을 통해 방안까지 흘러들어왔다. 꼭 자신을 봐달라는 듯이 춤을 추는 바람에는 은은한 장미 향이 배여 있었다.

흔들리는 꽃잎을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싱그러워지는 봄의 어느 날은 유독 화창하였다.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푸르렀으며 또한 무척이나 맑았다.

이런 좋은 날과 도저히 어울리지 않은 뚱한 표정을 지은 사내 하나가 창틀에 턱을 괴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반듯한 미간에는 주름을 잡아넣었다. 심지어 그는 좋은 향내를 받으면서도 한숨을 푹푹 내쉬기만 하였다.

그런 바람이라도 있을 때가 좋았다. 막상 얄밉던 바람마저 사라지고 나자 사위가 무섭도록 조용하였다. 적막감이 숨통을 조이는 듯하였다.

“하아.”

사내는 무에 못마땅한 것이 있는 듯하였다.

도대체 무엇이 귀하게 생긴 사내를 괴롭히는 것일까.

땅이 꺼지도록 내쉬는 한숨은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궁금증을 자아내었다. 근심 걱정이란 사내에겐 남의 일일 것처럼 다소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낯설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이런 사내를 동정이라도 한 것일까. 어딘가에서 다시금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좌우로 움직이는 장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사내가 진한 한숨과 함께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도자기처럼 매끈하고 하얀 피부 위로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짙은 그늘을 만들더니 나른한 눈빛을 단숨에 집어삼켜 버렸다. 그런 연유로 이젠 사내가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져 버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미동조차 보이지 않아 꼭 잠이 든 건 아닐까 싶었던 사내가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좀이 쑤셔 더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겠구나.”

넓디넓은 방 안엔 사내 혼자였다. 누구에게 말하는지 알 수 없는 사내의 커다란 외침이 허공 속으로 흩어졌다.

잠시 후, 미닫이문이 열리더니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내관 하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푸념처럼 흘린 사내의 말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저하, 무에 불편하신 곳이라도 계시옵니까?”

방으로 들어온 내관은 사내를 저하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랬다. 여태 심통을 부리던 사내는 이 나라의 세자인 이 현이었다. 내관의 공손한 물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현의 눈썹이 꿈틀하였다. 불편한 점이 한, 두 개도 아니고 아주 많은 까닭이었다.

힐끗 눈을 들어 현의 분위기를 살피던 하 내관은 얼른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자신을 향한 현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뒷짐을 진 현이 느린 걸음으로 하 내관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더니 천천히 하 내관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뜬금없는 상황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하 내관은 현의 눈치를 살폈다. 급기야 이마엔 식은땀이 맺히고 말았다. 불편한 현의 심기를 건드린 죗값으로 엄청난 벌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 내관, 재밌는 놀이 한 번 해볼 생각 없는가?”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 하 내관이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대답하기 앞서서 하 내관은 고개를 비스듬히 들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현을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밤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반짝였다. 그 속에 들어 있는 음산함에 하 내관은 어깨를 좁혔다.

좋지 않은 기운이 현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르긴 해도 현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당연히 거절할 생각으로 현의 물음에 답을 하려 입을 크게 벌렸을 때였다.

별안간 현이 익선관을 벗어 하 내관에게 주었다. 얼떨결에 익선관을 받기는 했으나 영문을 알지 못해 하 내관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이걸 왜 소인에게 주시는 것이옵니까?”

현은 하 내관의 질문은 무시하고는 훌러덩 용포를 벗어 하 내관의 팔에 걸었다.

한순간 옷걸이로 전락한 자신의 신세에 하 내관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하 내관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빤히 보았으면서도 현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저하…….”

급기야 자신에게 손을 뻗어오는 현을 보고 하 내관은 말끝을 흐렸다.

“가만히 좀 있어 보게.”

“저하,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것이옵니까?”

“어허, 가만히 있지 못할까.”

“아무리 가만히 계시라고 하여도 그건 못 하겠습니다.”

하 내관이 가슴팍에 두 손을 얹은 채로 허둥지둥 뒷걸음질 치다, 등에 차가운 벽이 닿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불시에 받은 습격에 놀라 넋이 나간 하 내관이 두려움 가득한 시선으로 현을 올려보았다. 하 내관의 옷고름은 현의 억센 손길을 견디지 못하고 풀려 있었다. 머리에 쓰고 있던 관모가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군 지 이미 오래였다.

현이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져 있던 하 내관의 관모를 주웠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를 털며 하 내관을 향해 다가갔다.

그런 현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낀 하 내관이 옷고름을 손에 꼭 쥐고 달아나려 버둥거렸다.

“저하, 이러시면 안 되옵니다.”

하 내관은 바닥에 떨어질 현의 체면을 생각하여 큰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그렇기에 복도에 있는 궁인들의 동태를 살피랴 현을 주시하랴, 정신없이 시선을 돌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현을 향해 말하였다.

그러나 말로는 현의 움직임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오히려 현의 마음에 불을 지른 듯하였다. 단숨에 하 내관의 앞으로 걸어온 현이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밖에 무수히 많은 궁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눈과 귀가 무섭지 않으시옵니까? 지금 저하의 이런 행동은 옳지 않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예?”

놀라 되묻는 하 내관의 모습을 보고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현의 미간이 구겨졌다.

“아니옵니까?”

현의 반응에 하 내관은 자신이 착각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다. 머쓱함에 헛기침하며 옷매무새를 정돈하였다. 그리고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벗어라.”

“예?”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는 것인가?”

하 내관의 둔한 태도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시라면서요.”

“뭐가 말인가?”

“그러니까…….”

현의 물음에 민망함을 느낀 하 내관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말끝을 묘하게 흐리며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황망한 말이었다.

말을 아끼는 하 내관을 가만히 바라보던 현이 재촉하였다.

“이럴 시간 없네. 어서 벗게.”

“저하,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하 내관의 저항은 소용없었다. 좀 전과는 다르게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지 현의 움직임에 거침이 없었다. 결국, 하 내관은 현의 고집에 속수무책이었다.

현은 하 내관의 관복을 홀라당 벗겨 버렸다. 그러더니 그걸 주섬주섬 입기 시작하였다.

하 내관은 넋 나간 표정을 하고 현이 옷을 갖춰 입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자신의 책무가 무엇인지를 떠올린 하 내관은 현이 옷 입는 걸 도와주기 시작하였다.

완벽하게 옷을 바꿔 입은 현의 입가에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

현은 가슴 근처를 떠돌다가 훅하고 들어와 자리를 잡았던 공허함을 날숨과 함께 토해내듯이 뱉어냈다. 상쾌한 공기와 싱그러운 초목이 주는 청량감에 몸은 하늘을 날 듯이 가뿐하였다. 현은 깃털처럼 가벼운 발걸음을 망설임 없이 옮겼다. 이윽고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은 궐문이 현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현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궐문을 통과하여 바깥으로 나왔다. 바깥세상은 궐 안보다 훨씬 더 무르익은 봄이었다. 손끝에 닿는 온화한 바람에 기분이 좋아진 현은 이끌리듯 앞으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 사이 현은 시전 한복판을 걷고 있었다. 내친김에 눈에 띄는 가장 화려한 가게에 들어가 옷도 한 벌 사 입었다. 현은 나팔꽃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적자색 도포와 넓은 흑립을 썼다. 금사로 만든 끈에 눈처럼 희고 고운 옥으로 만든 갓끈이 찰랑거리며 맑은 소리를 내었다.

옷이 날개라더니 그 말이 딱 지금과 같은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하 내관의 옷을 입었다고 해서 수려한 외모가 숨겨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질감이 느껴졌었다. 하지만 이렇게 멋들어지게 한껏 차려입으니 감탄이 절로 쏟아져 나올 만큼 자태가 빼어났다.

흡족한 얼굴로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온 현의 걸음걸이는 그 전보다 더 위풍당당하였다. 그는 뒷짐을 지고 부채질하며 남은 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그렇게 옷까지 갈아입고 현이 찾은 곳은 북촌의 어느 거리였다. 그는 찾는 곳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다녔다.

“여기도 아니군.”

워낙 오래전에 딱 한 번 와봤던 곳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였다. 골목골목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기와집들이 현을 더욱 헷갈리게 하였다.

그래도 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분명 찾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후궁의 자식이라 해도 일단 임금의 자식이지 않은가. 현의 아우이자 민 귀인의 하나뿐인 아들 휘안군의 집은 아흔아홉 칸이 조금 안 되긴 해도 넓은 저택이었다. 그런 집을 못 보고 지나칠 리가 없었다.

더 마음속에 여유를 가져 보기로 하였다. 아직 시간이 여유로웠다.

현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을 자아내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번엔 틀림없이 그곳을 찾을 수 있으리란 강한 느낌이 들었을 때였다.

순간적으로 하늘이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현의 발치로 어린아이 팔뚝만 한 굵기의 목검이 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조급함을 느껴 빨리 걸었다면 눈앞에 떨어진 목검에 그대로 머리를 맞을 뻔하였다.

얼핏 별것 아니게 보이는 목검이지만 좀 전에 날아온 속도로 머리나 몸을 맞았다면……. 그 뒤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단순히 멍이 들거나 혹이 나는 걸로 끝나지 않았을 거였다.

현은 운이 좋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목검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요리조리 목검의 상태를 살폈다.

무게감이 있는 걸로 보아 숙련자가 사용하는 목검으로 보였다. 누군가 검술을 연습하다가 손에서 놓친 모양이었다. 한데 이런 목검을 연습용으로 사용하는 자가 목검을 놓치다니. 희한한 일도 다 있었다.

현이 고개를 들어 목검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담이 높았다. 안에는 대체 누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