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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려영은 교태전에 오도카니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혼자 있을 때면, 려영은 여지없이 4년 전으로 돌아가 동뢰(세자가 세자빈과 첫날밤의 보내는 의식)때의 장면 속으로 뛰어들었다.
“빈궁, 오늘뿐 아니라, 앞으로도 나는 그대를 안지 않을 것이오.”
려영은 마치 처음 본 사람처럼 낯선 현을 마주하였었다. 매정하고 단호하게 말하는 현에게 려영은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떨려서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옷고름은커녕 가체도 내려주지 않고 제 할 말만 하고 사라진 현의 뒷모습조차 보지 못했다. 그렇게 사라지는 그의 발소리에 예민하게 청각을 기울이고 있자니, 이곳이 구중궁궐이로구나, 실감이 났었더랬다.
“중전마마, 신 윤 상궁이옵니다.”
려영은 윤 상궁의 다급한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뜨고 현실로 돌아왔다.
“중전마마. 승은 상궁 최씨가 옹주마마를 생산하셨습니다.”
윤 상궁의 목소리에 조금의 기쁨이 담겨있었다. 려영은 윤 상궁이 기뻐하는 이유가 왕실에 자손이 태어나서가 아니라, 태어난 아이가 아들이 아닌 딸이 태어난 것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 * *
삼간택 절차를 모두 마치고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별궁으로 가게 되었을 때 려영은 힘들게 왕실의 법도를 익히면서도 현의 빈이 된다는 생각에 그저 기뻤다. 려영은 어린 날의 약조를 잊지 않고 있었다. 비록 5살의 어린 여아에게 한 6살 남아의 약조였지만.
려영이 5살 때, 궁궐 안에 역병이 돌았었다. 나인이며, 상궁, 내관할 것 없이 시름시름 앓았고 심심치 않게 죽어 궁을 나가는 자들이 생겼었다. 그러자, 당시 6살인 세자가 피접을 나왔는데 그곳이 바로 려영의 집인 정우찬 대감댁이었다.
정우찬 대감은 려영이 세자에게 혹여나 버릇없게 굴까 저어되어 려영이 세자와 어울리고자 하는 것을 막았지만, 세자는 커다란 궁에서 엄한 왕재의 교육을 받으며 이리 가도, 저리 가도 보는 눈이 많은 생활 속에 지내던 시간에서 달콤한 일탈이 된 피접인지라, 려영을 부러 가까이하며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세자저하. 이것 보십시오. 여기 여기 작은 물고기가 막 막.”
철없는 5살의 대감 댁 고명딸은 사랑받고 자란 티를 여실히 나타내는 얼굴을 하고선 흥분한 표정으로 현에게 자신이 찾은 장면을 보여주고 싶어서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있었다.
현은 늘 법도를 강조 받은 궁궐에서 지내다가 제 나이에 맞게 어리광도 부리는 려영이 생경하기도 하고 귀여웠다. 그래서 려영이 자신을 부르는 것을 알면서 일부러 시간을 끌며 못 들은 척했다.
역시, 려영은 더 흥분하면서 크게 자신을 불러댔다. 느긋하게 현이 고개를 돌리자 려영이 볼을 부하게 부풀리고 눈은 초롱초롱한 것이 조금은 새초롬하게 뜬다고 노력한 것이 역력한 모습을 하고서는 세자를 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통통한 애기 살이 더욱 부풀어져 보드라운 려영의 볼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한참을 현을 불러서인지 려영의 볼은 제법 빨개져 있었다.
“려영아. 둘이 있을 때는 세자저하라고 부르지 않아도 된다 하지 않았니? 현 오라버니라고 부르거라.”
“그치만, 그럼 아버지께서….”
“병판대감께는 내가 비밀로 해드리마.”
“참말이십니까?”
지금까지 현을 애타게 부르던 려영은 현을 왜 불렀는지도 까먹고서는 현을 오라버니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면서 좋아하고 있었다.
그런 려영이 귀여운 현은 려영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조그만 현의 손이, 조그만 려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려영의 귀여운 볼은 다시금 만족으로 인해 부풀어 올랐다. 다시 양쪽 볼에 한가득 사탕이라도 문 것 같았다.
쪽!
려영이 갑자기 현의 볼에 뽀뽀했다. 현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놀라 토끼 눈을 했다. 제아무리 사가에 피접을 나와 있다 해도 자신은 세자거늘 이 어린 여자아이는 겁도 없나 보다.
려영은 그런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천진한 눈을 하고서는 기쁨에 반짝거리는 눈을 하고서 배시시 웃고 있었다.
“려영이는 현 오라버니가 너무 좋아요.”
5살이지만 자신의 고백이 쑥스러웠는지 려영은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 도망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만 냇가 주변에 있는 돌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제가 좋아하는 현 앞에서 넘어진 것도 창피하고 무릎도 까진 것 같아 아파오는지 갑자기 서럽게 꺼이꺼이 울기 시작하는 려영이었다.
쪽!
이번엔 현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는 려영의 볼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리고는 자그마한 현의 손으로 커다란 려영의 눈망울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려영이 계속 울어야 할지 아니면 웃어야 할지 망설이며 눈을 뻐끔거리고 있자, 현이 미소를 지었다.
“나도 려영이가 좋다.”
“참말?”
려영이 언제 울었냐는 듯이 입가에 방싯거리는 웃음이 잡히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려영이는 오라버니한테 시집와야 한다.”
“네. 려영이는 현 오라버니 각시 할래요.”
“그래. 오라버니와 약조를 한 것이다.”
“그럼, 오라버니, 저기 꽃밭에서 그거 만들어주세요. 징표로요.”
려영이 또 배시시 웃으며 몸을 배배 꼬았다. 현은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해서 일부러 못 알아들은 척 물었다.
“‘그거’가 무엇이냐?”
“아이참 ‘그거’있자나요. 왜 손에다가 끼는 거.”
“하하하. 그래. 이왕 약조하는 김에 가락지도 만들어 끼자꾸나.”
둘은 진지하게 꽃 가락지를 만들었었다. 누가 더 예쁘게 만드는지 내기라도 한 것처럼 려영과 현은 말도 없이 가락지 만들기에 열중했었다. 그러다 어둑어둑하게 땅거미가 질 무렵이 돼서야 맘에 드는 가락지를 완성해서 서로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이제 정말 려영이는 다른 곳에 시집을 못 가겠구나. 이제 정말 이 오라버니 각시인걸.”
“응. 려영이 현 오라버니한테 시집갈 거여요. 우리 약조한 거여요.”
당시는 너무 어려 세자인 현과 가례를 올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었다. 그렇기에 너무 쉽게 약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려영은 믿고 있었다. 간택되어 별궁에 있을 때조차 의심하지 않았다. 현이 자신을 기억할 것이라고, 따뜻하게 맞아줄 것이라고. 그래서 친영례(세자가 별궁으로 세자빈을 데리러 오는 의식)가 다가오자 전날 밤잠도 설칠 만큼 설렜다. 세자빈이 된다는 것이 아닌 현의 내자가 된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서 그 어린 날 보았던 현 오라버니를 다시 만난다는 생각에 들떴었다.
* * *
“꽃 가락지가 아닌 길이 남을 징표를 달라고 했어야지.”
다시 서온돌에 혼자 남은 려영은 추억을 걷어내지 못해 가슴앓이하고 있었다.
‘하. 여전히 내 바보로구나. 그럼 무엇이 달라졌을까?’
려영은 쓰게 웃었다.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기에 그녀의 마음은 쓰디썼다.
#1화.
전각에서 홀로 술을 마시던 현은 돌연 공중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無)냐?”
“네. 전하.”
“그래. 살펴본 일은 어찌 되었느냐?”
“전하의 예상대로였습니다. 우상대감을 필두로 한 반역의 무리가 슬슬 큰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현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였다. 22살의 젊은 왕은 나이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냉철한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계속 그들을 주시해라.”
“네! 전하!”
무(無)는 모습을 드러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허공으로 그 자취를 감추었다.
‘정. 우. 찬 대감, 기어이 저와 틀어지시는 겝니까.’
현은 독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 옛날 충신 중의 충신이었고, 피접 나가 있던 세자에게 더 없는 신하였던 려영의 아버지, 정우찬 대감은 이제 병판이 아닌 우의정의 자리까지 올라있었다.
중전의 아버지, 국구이며, 삼정승의 자리에 오른 정씨 가문의 세는 출세하고 싶다면 그 집 앞을 기웃거려 보라는 말이 나돌 만큼 그 위세가 대단했다.
지금의 자리만 유지해도 남부러운 것이 없는 정우찬 대감이었으나, 그는 선왕의 계비가 죽은 후부터 현과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는 중이었다. 사람의 욕심은 본디 끝이 없는 법. 신하의 자리에서 정상에 오른 그는 오르지 못할 나무에 탐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선왕의 계비, 윤 씨는 욕심이 많았으나, 오랫동안 아들 복이 없었다. 간신히 얻은 아들은 이미 장성한 세자에 비해 너무 어리고, 너무 병약했다. 그녀도 처음부터 허망한 야욕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선왕이 없는 세상에서 세자가 자신과 아들을 지켜줄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불안하다면 제 아들을 왕에 올리면 그만이라 그리 생각한 그녀는 선왕의 총애를 뒤에 업고 세자에게 위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영악하게도 그녀의 첫 계획은 세자를 없애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온갖 술수를 써서 세자를 암살하려 하였다. 사람들 앞에서는 너무도 자애로운 계모. 그러나 뒤로는 더러운 방법과 요사스러운 술법으로 세자를 없애려 혈안이 되어있는 것이 그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그 모든 시도는 번번이 미수로 그쳤다. 세자가 모든 술수를 읽어낸 것인지 누군가 세자를 비호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세자는 살아남았다. 늙었던 선왕은 총애하는 젊은 꽃, 계비의 추악한 행실을, 미수로 그친 그 수많은 암살을 그저 묻어 두어 주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대신들은 계비와 한배를 타고자 했다. 왕이 지켜주지 않는 세자보다는, 왕의 총애를 등에 업은 계비가 더욱 튼실한 뒷배가 되어 줄 것이라 간신배들은 그리 계산한 터였다.
현은 그 모든 과정을 거치며 스스로 단단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자신을 구해주는 사람 없는 궐에서 자신, 스스로 살아남아야만 했다. 감정을 숨기는 것은 이제 그에게 일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이 그에게는 더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생사의 문턱을 넘나들게 했던 그녀의 마지막 계략에서 꿋꿋이 견뎌내어 살아난 세자는, 갑작스러운 더는 세자를 해하지 말라는 선왕의 엄중한 경고로 인해 지긋지긋한 그녀의 독살 시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기세등등한 중전 윤 씨였지만, 선왕의 지엄한 어명을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선왕의 도움 없이 자신의 갓 태어난 아들을 다음 왕의 자리에 앉힐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아직 그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암살 계획에 실패한 계비의 그다음 계책이 바로, 세자빈이었다. 시간을 벌 필요가 있는 중전 윤 씨는 세자를 지금 당장 죽일 수 없다면,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감시하여 장차 제 아들이 장성하였을 때 후일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세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자신에게 전하여 줄 자, 세자의 신임을 얻어 그의 생각조차 읽어내어 자신에게 알려줄 수 있는 자, 그러한 자를 세자빈으로 앉히려 했다. 자신의 수족이 되어 줄 세력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계비에게 선택되었던 것이 려영이고, 정씨 가문이었다. 17살이 될 때까지 세자빈을 맞지 않고 있었던 과년한 세자 현이, 16살의 려영과 가례를 올리게 된 데에는 그러한 이유가 있었다.
려영이 세자빈으로 간택될 때까지만 해도 충신이었던 정우찬 대감은 중전 윤 씨의 거듭된 회유와 주변의 파도와 같이 몰아치는 온갖 유혹을 물리쳐내지 못했다. 세상사에 오물에 찌들 듯 그는 정치판의 생리 속에 제 한 몸 맡기고 더러움 그 한복판에 제 발로 들어갔다. 모두 떠받들어주고, 굽실거리는 현실 속에서 정우찬 대감은 점점 더 높은 곳을 향한 갈증을 느꼈다. 가만히 있어도 중전의 아버지, 그러나 인간이란 참으로 탁한 존재였다.
5년 전, 현은 이 모든 사정을 다 간파하고 있었다. 불의의 사고로 절에 불공드리러 갔던 선왕의 계비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오래지 않아 선왕이 붕어하였다. 그리고 현이 왕위에 오른 지도 1년이 지났다.
현이 즉위하자, 정우찬 대감은 현이 자신이 윤 씨와 도모했던 일들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이 몹시도 불안하였다. 후사가 없는 려영의 중전 지위도 정우찬 대감이 지혜로운 판단을 내릴 수 없도록 더욱 몰아갔다. 그 때문에 현이 려영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다는 것도 그를 더욱 안달 나게 하였다. 그래서 정우찬 대감은 무리수인 것을 무리수인지 깨닫지 못하고 뜻을 함께하는 이들을 모아서 이제 겨우 10살인 선왕의 계비의 아들, 준을 명분으로 하여 역모를 꾀하려 하고 있었다.
* * *
“전하, 중전마마 드셨사옵니다.”
문 내관이 현에게 고했다. 다시 독한 술을 한입 가득 털어놓은 현이 ‘탁’소리를 내며 술잔을 상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드시라 하라.”
현 주위로 가라앉은 무거운 분위기에 려영은 평소보다 더욱 주눅이 들었다. 려영은 동뢰 이후로 늘 현 앞에만 서면 죄인마냥 기가 죽었다. 마음속으로 호흡을 가다듬던 려영이 소리 나지 않게 숨을 크게 한 번 쉬었다.
“전하, 신첩 전하께 승은 상궁 최 씨의 일로 상의드릴 일이 있어 찾아뵈었나이다.”
현은 려영을 쳐다보지도 않고 술병을 집어 들었다.
“신첩이 하겠나이다.”
려영은 현에게 가까이 다가가 현의 손에 들린 술병에 손을 대었다.
탁!
둔탁한 소리를 내며, 술병이 려영의 고운 손을 때렸다.
“필요 없네.”
현의 차가운 음성에 려영은 가슴에 또 한 번 상처가 났다. 빈번히 일어나는 이런 일에는 이제 상처받지 않을 만도 한데 려영은 매번 차가운 현을 마주할 때마다 심장이 찢겨나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려영은 현의 곁에서 조금 물러서 앉았다. 그녀의 작은 어깨가 조금 파르르 떨리는 듯했다. 현은 그녀가 가까이에서 물러나자, 무엇이 또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현의 표정은 려영을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전하, 승은 상궁 최 씨에게 숙원의 첩지를 내리려고 합니다.”
“….”
“옹주를 생산하였으니, 마땅히 그에 합당한 첩지를….”
“그리하세요.”
“네, 전하.”
“…물러가세요.”
항상 이런 식이다. 더는 려영이 말을 잇지 못했다. 필요한 대화 외의 그 어떠한 말도 더 나눠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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