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훔쳐보지 마.

2010년 3월 어느 날 좋은 날.

“오빠, 이름이 뭐예요?”

우리 동네 큰 고목나무집에 잘생긴 오빠가 이사 왔다.

말랐지만 큰 키에 마치 뱀파이어를 연상시킬 정도로 하얀 피부. 칼에 베일 듯한 오뚝한 콧날에 짙은 눈썹, 차갑지만 무심한 표정에 내 심장은 폭행당했다.

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니,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이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나? 미노야, 강미노.”

강미노, 잘생긴 오빠는 그 말을 남기고 승용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갔다.

학교에서도 수다마을에서도 꼴통으로 유명한 삼총사 찬미와 친구 은자와 미자는 미노가 대문을 닫고 사라질 때까지 넋을 빼고 쳐다봤다.

“나 방금, 탐크루즈 본 거 같은데?”

“와, 무슨 남자가 저렇게 하얘? 백인도 아니고.”

아이들이 정신을 차린 건 미노 다음으로 승용차에서 내린 희주 한마디 때문이었다.

“너희들, 어디 중학교 몇 학년이야?”

중학교?

아이들은 발끈하며 희주의 위아래를 훑었다. 키 165 정도 되어 보이고 뭐 물론 피부도 희고 얼굴도 이쁘긴 하지만 그래도 찬미한테 비빌 건 아닌데?

“쟤, 지금 우리한테 하는 말이야? 뭐, 중학교?”

찬미는 자부심인 몸매가 특히 긴 다리가 돋보이게 미스코리아 포즈를 취하고 고개를 바짝 올려 섹시하게 쳐다봤다.

“우리가 어딜 봐서 중학생이야?”

“설마 너희들, 고등학생이야? 아, 진짜 촌티 나는 교복 좀 봐.”

“뭐, 촌티?”

“설마, 나도 저 교복 입는 건 아니겠지! 아, 짜증나.”

아이들은 희주의 어이없는 무시에 황당함을 넘어서 기가 막혔다.

“야, 너 뭐야? 뭔데, 우리 학교 교복을 무시해?”

“뭐 저런 게 다 있어? 너, 우리가 누군지 알고 까불어?”

희주는 까무잡잡하고 촌스러운 시골 아이들이 그저 가소롭기만 했다.

“촌년들, 뭐라는 거야?”

와, 촌년 나왔다.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소리.

은자는 열 받아 제대로 말이 안 나와 더듬었다.

“야, 너어, 야 진짜.”

그건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와씨, 진짜, 야.”

희주는 그런 아이들에게 단 한방의 일격을 가하고 집으로 총총 들어갔다.

“아우, 촌티 옮을까 들어가야겠다.”

“뭐어? 야, 너, 거기서.”

아이들은 아무 이유 없이 무시당한 거 같아 분통이 터졌다.

“뭐야, 우리 지금 당한 거야?”

“그런 거 같은데? 어이가 없네.”

“와 씨, 정신이 확 든다. 쟤 조만간 손 좀 봐주자.”

“당연하지.”

아이들은 가방을 메고 씩씩거리며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찬미는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대청마루에 던져놓고 부엌으로 갔다.

찬미의 집은 전형적인 시골집이다. 아버지인 대평은 마을 이장이시고 엄마인 영선은 마을에서 창녕 댁으로 통한다. 아버지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할 정도로 한 성격 하시고 엄마는 조용조용 나긋한 성격의 현모양처이다. 형제는 이제 중3인 여동생 찬주와 3살인 남동생 찬동이 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부엌에 들어가니 엄마는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왔어?”

“뭐 만들어? 냄새 좋다.”

“명이 아줌마가 된장 잘 익었다며 갖다 줘서 된장찌개 끊이고 있어.”

“엄마, 큰 고목나무집 있지? 거기 이사 들어왔어.”

“그래?”

찬미는 미노를 떠올리니 기분이 좋아졌다.

“거기이, 엄청 잘생긴 오빠가 이사 왔어. 피부는 하얗고, 키는 엄청 커, 쌍꺼풀은 없는데 눈도 커. 좀 마르긴 했는데 얼굴 하나는 진짜 예술이야.”

“남자가 빼빼 말라서 어디 써먹어?”

“그건, 좀 먹고 운동하면 되지. 다 필요 없고 요샛말로 패완얼. 잘생기면 장땡이야.”

영선은 픽 하고 웃었다. 우리 딸이 금사빠였다니.

“우리 찬미 반했나 보네.”

“에이, 그건 아니고.”

찬미는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으며 혀를 내밀었다.

잠시 후 방에서 찬주의 절망에 가까운 비명이 들려왔다.

“아이씨, 진짜, 아아아아아아.”

그 소리에 두 사람은 움찔하며 작은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쟤, 왜 저래?”

“영어 한 문제 틀렸데. 어지간하면 오늘 찬주 건드리지 마. 알았지?”

“알았어. 미친개한테 물릴 일 있어?”

“너 말 이쁘게 못 해?”

그 무렵 일을 마치고 돌아온 대평은 대청마루에 아무렇게나 놓인 찬미의 가방을 보고 소리 질렀다.

“저 가방, 누구 거야? 학교 갔다 왔으면 방에 가방을 넣어놔야지 누가 저렇게 던져놨어?”

찬미는 잽싸게 마당으로 나와 가방을 챙겨 들고 아버지에게 인사했다.

“아버지, 다녀오셨어요.”

“오냐.”

영선도 바구니를 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조금만 기다려요. 저녁으로 된장찌개에 호박잎 쌈 준비했어요.”

“난 됐어. 조금 전에 대성이네 집에서 수제비 얻어먹었더니 배 안 고파.”

“그래요?”

찬미가 가방을 들고 살포시 작은방으로 들어가니 찬주가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내 동생 찬주는 초등학교부터 지금까지 1등을 단 한 번도 놓친 적 없는 우등생이다. 해서 부모님은 찬주에게 절대 심부름이나 일을 시키지 않는다.

만만한 게 나지.

나는 항상 그게 불만이다. 공부 못하는 게 죄도 아닌데 차별을 해도 너무 심하게 한다. 게다가 저 계집애는 공부 좀 한다고 유세가 장난이 아니다. 자기가 무슨 상전이라도 되는 줄 알고 있다.

들고 있던 가방을 찬주 옆 자신의 책상에 휙 던지고 돌아서 옷장을 열었다. 가방이 넘어지면서 찬주의 머리를 툭 하고 건드렸지만 보지 못했다.

“아얏.”

찬주는 바로 고개 돌려 언니를 째려봤다.

“씨이.”

언니는 늘 저런 식이다. 덤벙대고 실수해놓고 절대 사과를 모른다. 지금처럼.

“좀 조용히 못 놔?”

“시비 걸지 마.”

“시비? 방금 네 가방이 내 머리 친 거 못 봤어?”

“못 봤는데? 너! 영어 한 문제 틀렸다며? 암만 그래도 나한테 화풀이는 하지 마라.”

“어이가 없네, 하긴 10점 20점 먹는 네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

“아이구, 그럼 넌? 너 때문에 지금까지 2등만 한 태주 마음 이해해?”

“뭐?”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혔다. 자기가 태주에 대해 뭘 안다고. 가끔 보면 엄마 말대로 정말로 언니를 다리 밑에서 주워온 거 아닐까 싶다. 그것도 아니면 태주 누나이던가! 어떻게 매번 태주 편을 드는 건지.

“주제를 알아야지. 맨날 꼴찌 하는 인간이 맨날 2등 하는 애를 동정하네?”

“이게 진짜, 엄마가 시비 걸지 말라고 해서 참고 있었더니.”

찬미는 더는 참지 못하고 찬주의 머리에 꿀밤을 “꽁” 하고 먹였다.

“고등어 반 토막만한 게 툭하면 덤비네.”

“아얏, 왜 때려?”

찬주는 더는 참지 못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게 툭하면 고등어 반 토막이래. 그래! 나 키 작아, 나 작은데 보태 준 거 있어?”

“미쳤냐? 내가 너한테 보태게?”

“그러면서 왜 자꾸 놀려? 내가 고등어 반 토막이면 넌 고등어 중간토막이다.”

“그게 뭔데?”

“뭐긴 뭐야? 배만 톡 튀어나온 거지.”

찬미는 순간 살이 도톰하게 오른 배불뚝이 고등어를 상상했다.

“이게 진짜 죽으려고 스텝 밟네.”

“그래, 나 스텝 밟는다, 어쩔 건데?”

마당에는 대평과 영선이 두 자매의 싸움 소리를 듣고 있었다. 하루가 멀게 싸우는 통에 아주 지겹다 못해 지긋지긋할 지경이다.

대평은 오만 정 떨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또, 시작이다. 아이고 지겨워라. 어떻게 만나기만 하면 싸워?”

곧 찬미가 씩씩거리며 마당으로 나왔고 영선은 분명 주의 줬음에도 불구하고 싸우자 짜증냈다.

“오늘은 건드리지 말라니까.”

“저게 먼저 시비 걸잖아.”

대평은 큰딸의 기분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마치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찬미야. 커피 한 잔만 타와 봐.”

찬미는 뚱한 표정을 짓고 입을 내밀며 아버지를 쳐다봤다.

또 나한테만 시킨다.

“아버지 딸은 찬주 하나고 난 주워다 키운 남의 딸이죠?”

“아이구, 그거 이제 알았어? 또, 또, 왜에?”

“맨날 나만 시키잖아요.”

“지금 시험 기간인데 찬주는 공부해야지.”

“저도 시험 기간인데.”

“넌 공부를 안 하잖아.”

물론, 공부 안 한다. 하지만 찬주가 공부 안 해도 늘 나한테 시킨다.

“저도 공부하면 안 시켜요?”

대평은 콧방귀 끼듯 피식 웃었다.

“아이고, 김찬미 입에서 공부한다는 소리가 다 나오네. 제발 공부 좀 해라. 너 반에서 꼴찌 면하면 절대 안 시키고 해달라는 거 다해준다.”

“정말이죠?”

대평은 절대 공부할 리가 없는 찬미의 다짐을 흘려 넘기며 답했다.

“그럼.”

“약속했어요.”

“좋아, 아버지 커피 어떻게 마셔?”

“둘둘셋.”

“빙고.”

찬미가 툴툴거리며 커피 타러 부엌으로 들어가자 대평이 뒤에다 대고 이덕화 흉내를 내었다.

“커피 한 잔, 부우탁 해요.”

*

2층.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미노는 흡족한 표정으로 방 구경하다 창가로 갔다.

바깥에는 넓은 마당 보였고 담벼락 중앙 대문 옆에는 100년도 넘어 보이는 큰 고목나무가 위세 당당하게 서 있다. 약간은 기괴하게 비틀린 나무였지만 오랜 세월을 거친 탓인지 그조차도 멋있어 보였다.

바람을 느끼기 위해 창문 여니 유난히 가는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근육과 살이 다 빠져 핏대가 서 있는 팔을 보니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어 손목을 돌려가며 쳐다봤다.

예전에는 운동을 좋아해서인지 사람들로부터 몸이 탄탄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