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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정하고 올라온 날이었다.
이사를 가기 전 2주의 공백이 있었다. 만개한 벚꽃이 수놓은 석촌 호수를 벌써 두 바퀴째 돌았다. 봄날은 눈부실 정도로 맑고 고왔다. 그날의 잔상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날임이 분명했다.
2년 전. 5월.
우리의 발걸음이 머문 곳은 무한 리필이 되는 시끌벅적한 치킨 가게였다.
5년 만의 시간이 무색해질 정도로 서로의 입가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우연히 친구를 통해서 만나 가벼운 묵례만 나눴던 그는 며칠 뒤 내 블로그를 찾아와 쪽지를 남겼고 깔끔한 그의 인상을 기억해내며 메신저로 조금씩 친해졌다. 그 짧았던 만남을 결국 지금 이 자리의 인연으로 만든 것이다.
“혹시 김태섭 감독 영화 좋아해요?”
재하의 입에서 김태섭 감독의 이름이 나오다니. 언젠가 물결의 노트에 적힌 이상형의 남자 중 하나가 영화 취향이 비슷한 남자였던 적이 있었다. 문득 스치는 옛 기억에 물결의 입이 기분 좋게 늘어졌다.
“그럼요. 재하 씨는요?”
“아, 북촌풍향 보셨어요?”
“봤죠. 흑백영화. 그 동네도 제가 좋아하는 동네예요. 부암동.”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뭐가요?”
맥주를 한 모금 시원하게 넘긴 물결이 이내 그를 보며 되물었다. 재하는 그런 그녀를 응시하더니 피식 웃었다.
“와, 얼굴 빨개졌다.”
“에?”
그의 말에 옆에 있던 손거울이 물결의 손에 들린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원래 그래요. 술을 잘 못 마셔요. 그나마 이것도 많이 는 거죠. 소주는 여전히 쥐약이지만. 그건 그렇고 아까 하던 말, 마저 해봐요. 뭐가 그럴 줄 알았다는 거죠?”
“실은 저도 부암동 좋아하거든요. 혼자 잘 거닐어요. 한옥마을 지나서 부암동까지 튼튼한 두 다리로 걷고 또 걸었던 날이 있었죠. 추워서 머리가 쭈뼛거렸었지만. 하하.”
사람 좋은 재하의 웃음소리는 보는 사람도 같이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의 목울대도 섹시하게 보이다니. 벌써 술이 취한 건가. 물결은 포크로 애꿎은 치킨 한 조각을 찍었다.
“영화 좋아하나 봐요.”
“네. 특히 김 감독님은 제 뮤즈시죠. 영화 연출을 전공한 것도 그분의 영향이 매우 컸고요.”
“아아, 그러고 보니 우린 통하는 게 많네요? 재하 씨는 연출 전공, 난 글쟁이고요. 언제 한번 같이 작업하는 날도 올까요?”
그런 날이 온다면 덩실덩실 춤을 출 것이다. 아직까진 뜬구름인 허상에 가까웠으니.
“물결 씨.”
“네?”
“말 놓으세요. 저보다 한 살 연상인데. 먼저 말 놓길 기다렸는데 이럼 어색하잖아요.”
“어색해요? 난 괜찮은데.”
“어색해요. 재하라고 불러요.”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물결은 잔을 살며시 내려놓으며 그의 두 눈을 응시했다. 검은 두 눈동자가 모든 걸 빨아들일 것만 같은 그의 눈. 그 눈에 담긴 자신이 보였다.
“그래. 그러자.”
“이제부터 이름 부른다.”
바로 말을 놓는 재하의 저돌적인 말에 물결이 희미하게 웃었다.
“최근에 한 연애는 언제야?”
꽤 노골적인 질문이었다.
“1년 전.”
꽤 빠른 답이기도 했고.
“한 치도 망설이지 않는구나. 난 엄청 오래됐는데.”
“얼마나? 3년 이상이야?”
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온 세상의 우주가 그를 향해 뿜어내는 것처럼 잊기가 참 힘들었는데. 잠만 자면 꿈에서 아른거리고, 속은 지독하게 앓았고. 다시는 사랑 따윈 믿고 싶지 않았던 치기의 날들. 첫사랑의 실패는 단절을 지향해 버렸다. 꽤 오랜 기간 동안.
“스물두 살 때니 5년 전이지. 하지만 미치도록 사랑했으니 후회는 없어. 이젠 추억으로 여길 만큼 덤덤해져서 나 자신도 문득문득 놀랄 정도로.”
“스물두 살 때면 정말 꼬꼬마 때네. 얼마나 사귀었는데?”
질문은 점점 세부적으로 스며들었다.
“2년. 첫사랑이라서 힘들었나 봐. 사랑도 이별도 처음 견뎌냈었으니.”
“나는?”
“어?”
“내가 더 잘해 줄 수 있는데.”
“뭐?”
재하의 말에 물결이 황당해하며 반문했다.
“말 그대로. 오늘 너 보면 고백하려고 했어. 그동안 꽤 오래 알았잖아.”
“그래도. 만난 건 얼마 안 됐잖아. 몇 년 전엔 지나가다가 인사한 게 전부였고.”
“그 잠시가 내겐 설렘의 시간들이었어.”
“설마.”
재하에게 호감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부턴가 간간이 일상을 재하와 함께 공유했고 그날의 간헐적인 서러움들을 메신저를 통해 해소했던 적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를 온전히 모르는 상태에서 지금 이 상황이 뜬금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배회했다.
“안 믿어도 돼. 며칠 뒤 넌 나를 분명 그리워하게 될 테니.”
“대체 그런 대사는 어디서 배운 거야?”
“가르쳐 줄까? 궁금해?”
“너 선수지?”
“빙고.”
이 자식. 김 감독으로 공통분모 형성할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그래도 재하의 이런 대화들이 밉지 않았다.
“무리란 거 알아. 그냥 이렇게 몇 번 더 만나다 보면 우린 더 서로를 알고 싶을 거야. 비슷한 게 너무 많잖아.”
“뭘 보고 우리가 비슷하다는 거야?”
“필. 느낌이 통해. 그런 게 있어. 소울메이트 같은 거. 그런 게 느껴져.”
“이재하. 너 말 진짜 잘한다. 해맑은 얼굴로 잘도 말해.”
“당연하지. 대화가 통한다는 것도 감정을 공유하는 거잖아. 우린 이심전심이라고.”
어떻게든 연결 고리를 찾는 재하가 문득 귀여워졌다.
하얀 얼굴, 오뚝한 코, 연한 눈매, 그리고 자꾸 마주치게 되는 저 눈빛. 정말 이대로 벌써 빠진 거 아냐?
“벌써 12시가 넘었네.”
“갈까?”
“가자. 너무 늦었어.”
옥신각신 끝에 물결이 계산을 하고 햄버거집 방향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거리엔 벌써 반팔을 입은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한강 걸을래?”
그의 제안에 물결은 고개를 저었다.
“다음에. 다음에 걷자.”
“그래. 그럼 내일 또 보자. 데리러 갈게.”
“안 돼. 약속 있어.”
“알겠어. 그럼 다음에 만날 때까지 잘 생각해 봐. 이 좋은 봄날, 혼자는 쓸쓸하잖아.”
“외로움 때문에 연애를 하고 싶지는 않아.”
“에이, 자꾸 튕기면 얄미워. 김물결 씨.”
재하의 손이 물결의 어깨를 감쌌다. 어쩐지 내칠 수 없었다. 커다란 그의 손이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신천역에서 꺾어야 되지? 오늘 혼자 자서 무섭겠다.”
“오지랖은. 연수 어차피 내일 아침에 올 텐데 뭐.”
“그래도. 같이 있어 줄까?”
“엉큼하긴. 저리 가라.”
마음이 따뜻하게 달아오른다. 이런 기분, 이 느낌. 참 오랜만이었다. 새로운 활력이 불어오는 통에 물결의 볼이 한층 더 빨개졌다.
“들어가.”
재하가 아쉬운 듯 물결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 빈말 아니야. 꽤 됐어. 너 좋아한지.”
코끝에 봄바람이 간질간질 흩날렸다.
“알겠어. 연락할게. 잘 가.”
후다닥. 물결이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재하가 가만히 서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곧이어 5층에서 불이 켜지니 안심한 채 뒤를 돌았다. 그런 재하의 등을 몰래 창문을 연 물결이 위에서 내려다봤다.
“재하야…….”
가닿을 수 없는 말들.
잠시 기억을 덮은 물결의 발걸음이 그때 그 건물 앞에 닿았다. 여기였던가, 저기였던가. 아스라진 추억의 한 자락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미친 듯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린 긴 이별 중이었다.
*
재하의 말대로 순식간에 사랑의 덫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런 에너지가 내게 남아 있었나, 새삼 놀랄 정도로 아주 깊게. 위험하게. 그렇게.
끝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재하는 어느덧 물결에게 전부 그 이상이었다. 독립 영화 연출을 맡게 된 재하는 그해 겨울 참 들떠 있었다. 작은 다락방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는 꼬박 두 달 간의 촬영 기간이 소요됐다. 완벽을 중시하는 그의 성격이 모든 걸 점철했던 탓이다.
그런 그가 물결은 마냥 좋았다.
“와, 이재하 오랜만이다.”
2주 만이었다. 재하의 얼굴을 본 건.
“나 안 보고 싶었어?”
해맑은 물결의 말에 재하가 슬며시 웃었다.
“기다려 줘서 고마워. 존중해 줘서.”
“고맙긴. 보고 싶었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하니.”
“김물결. 미치도록 안고 싶었어.”
본인이 말하고도 쑥스러운지 재하가 웃었다. 가면 갈수록 이런 낯 뜨거운 말을 점점 능숙하게 하는 재하.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볼은 눈치 없이 연분홍빛을 띠었다.
“우리 오늘은 작정하고 걷기로 했으니 실컷 걷고 실컷 먹자. 삼청동 거리 배회!”
신난 물결의 말에 생기로운 기운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오케이. 네가 좋아하는 고르곤 졸라 피자랑 까르보나라도 먹고. 전에 거기 가보고 싶다고 했잖아. 톡으로 포스팅 보내준 거.”
“으응. 좋아.”
팔짱을 낀 물결이 아이처럼 웃었다. 어느덧 사귄 지 6개월이 지났다. 연말이 점점 다가오는 거리는 쉴 새 없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귀 빨갛다.”
물결의 귀를 두 손으로 스스럼없이 감싼 재하가 그녀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문질렀다.
“잠시만.”
자리를 비운 지 5분도 안 돼서 재하의 손에 들린 귀마개는 물결의 귀를 따뜻하게 감쌌다.
“토끼 같아. 하얀 토끼.”
“너도 춥잖아.”
“춥긴. 내가 너 지켜 줄 거야.”
“허풍은.”
허풍일지라도 좋았다. 그때는 모든 게 좋아서 녹아내릴 것처럼 온전히 설렜다.
그 가게의 간판엔 거미줄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폐업이라는 매직으로 대충 휘갈긴 두 글자는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혼자였다. 그와의 추억이 깃든 거리는 이제 더 이상 추억이 아니었다. 2년. 벌써 2년의 시간이 지났다.
이재하. 어디서 무얼 하는 거니. 보고 싶다.
재하야…….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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