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다. 원래 붉던 하늘이 검푸르게 물들어 간다고 해야 좀 더 정확한 표현일까? 땅과 닿은 듯 보이는 부분이 마음을 먹먹하게 하는 붉은 빛을 진하게 띠고 있다. 노을을 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들썩거린다. 기쁨이나 설렘의 그것은 아닌 거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슬픔의 그것 또한 아니었다. '여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다. 지대가 높은 우리 동네,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늙은 소나무, 그리고 그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벤치. 아침이면 운동하러 나온 동네 주민들로 북적거리지만 지금 같은 시간엔 모두 저녁식사를 하기위해 집에 있는지라 한적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하늘이 잘 보이고 그 아래 펼쳐진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장난감을 모아놓은 듯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도시가 밤을 준비하고 있다. 건물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땅거미를 비웃듯이 하나 둘 밝은 불을 켜기 시작한다. '손끝에 까칠까칠한 소나무 결이 느껴진다. 20살 때 까지만 해도 나는 이 나무에 손도 대지 않았었다. 깔끔한 척 했다고나 할까? 깊이 파인 나무껍질 사이로 보이지 않는 벌레들이 우글우글 거릴 것만 같아서 어쩌다 몸을 스치기만 해도 소란을 떨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무뎌진 건지 무심해진 건지 오히려 내가 이 나무를 쓰다듬는다. 아마 현미경으로 나무껍질을 들여다보면 내 손끝에서 묻어난 각질들이 잔뜩 보일지도 모르겠다.'아……. 시원한 저녁바람이 목과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 긴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어 놓는다.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삐뽀로로…… 삐뽀로로…….'문득 생각해보니 아까부터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귀찮다는 생각에 저절로 미간이 찡그려진다. 질 좋은 면으로 만들어진 개더스커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기 위해 잠시 몸을 뒤척이자 바닥에 놓여있던 검은 비닐 봉투가 발끝에 걸린다. 짜증나……. 봉투를 쳐다보지도 않고 발로 툭 차버렸다. 그것 참…… 생각보다 묵직한 것이 잘 움직이지도 않는다.'한 10초쯤 지났을까. 드디어 주머니 안에서 끈질기게 울려대던 핸드폰 화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헉!”'집이다! 아니 엄마다! 갑자기 가슴이 철렁 주저앉는 충격과 동시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현실을 회피하듯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핸드폰 놈은…… 포기하지 않는다. 멈추지 알고 울려댄다.'삐뽀로로…… 삐뽀로로…….'근 3분가량을 연속적으로 울려대던 핸드폰이 드디어 멈추었다. 그제야 발아래 널브러져 있는 비닐봉투를 내려다보았다. 잊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하던 중이었는지. 죽었다……. 오늘밤 나는 또 한 번 엄마 손에 죽고 내일 아침 다시 태어날 것이다. 오늘은 뭐로 맞을까? 지난번처럼 국자? 무엇으로 두드려 맞든…… 007에게 주어진 첨단무기보다 강력한 엄마의 손바닥보다는 덜 아프다.'마치 똥 묻은 수건을 들어 올리듯 엄지와 검지로만 축 늘어진 비닐봉투를 집어 들었다. 다행이다. 봉투 안에 들어있는 감자 5개는 무사해 보인다. 하늘엔 멋들어진 노을이, 바닥엔 분위기 있는 낙엽이, 귓가엔 산뜻한 저녁바람이, 그리고 곧 몰매 맞아 죽을 내 손엔 먼지 묻은 비닐봉투가 들려있다. 우직하게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소나무가 묻는다. 괜찮겠어? 그러게 또 왜 그랬어.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