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2012년 10월.

세계적인 동영상 플렛폼 회사 ‘너튜브’의 간판이 한눈에 보이는 큰 빌딩 아래에 수십 명의 기자들이 한 소녀를 에워싸고 있었다. 사진기의 플래쉬가 여기저기서 터졌고, 기자들은 마이크를 소녀의 얼굴 가까이에 대고 질문을 쏟아냈다. 하지만 소녀는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곳은 어디지? 이 많은 기자들은 왜 나를 둘러싸고 있는 거야? 심장이 두근거리고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 너무 긴장하고 있나 봐. 그런데 가슴에 안고 있는 이 무거운 물건은 뭐지?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건데…’

소녀가 가슴에 품은 것은 엄청나게 큰 사각형에 별이 한가운데 들어가 있는 판이었다. 그것을 들고 있는 그녀는 무척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16살 소녀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많은 카메라 세례를 받아 기분이 무척 기쁘고 벅찬 느낌이었다.

‘혹시 나 뜬 거야? 그런데 뭐로 뜬 거야? 가수? 배우? 뭔지 모르겠지만, 기분은 끝내주는데!’

그 순간, 기자들의 열띤 취재로 소녀의 기분이 하늘로 붕 떠 있는 그 사이, 갑자기 한 젊은 남자가 있는 힘을 다해 기자들의 어깨를 밀어내면서 소녀 앞으로 다가왔다.

키가 크고 어깨가 무척 넓은 남자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짙은 남색의 슈트를 입고 있었다. 남자가 소녀 앞으로 다가오자 쿨한 향수 냄새가 그녀의 코를 살짝 자극했다.

그 찰나, 남자는 두 팔에 힘과 열정을 담아, 기습적으로 그녀의 목과 어깨를 확 감싸 안으며 정열의 키스를 진하게 퍼부었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내 사랑, 드디어 찾았군!”

이 모습을 본 기자들은 쏜살같이 두 사람의 키스 장면을 무차별적으로 찍어대며 질문을 퍼부었다.

“한해이 씨! 이 남자는 누굽니까?”

“한해이 씨! 그동안 숨겨두었던 남친입니까?”

“….”

그녀는 대답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도 이 남자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정확히 보기 위해, 그의 얼굴을 확 밀쳤다.

“오, 마이 갓!”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그의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어서 누구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뭐… 뭐야! 왜 얼굴이 안 보여?”

꿈에서 막 깨어난 해이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크게 맞은 기분이었다. 16년 인생을 통틀어 이렇게 생생하고 기막힌 꿈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기분이 얼떨떨하고 이상했다. 너무 생생해서 진짜 현실 속에서 겪은 일 같았다. 그 충격으로 인해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침대에 그냥 그대로 누워있었다.

그러다 이게 정말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오른쪽 뺨을 있는 힘껏 한 대 쳤다.

철썩!

“앗! 너무 아프잖아!”

바보 같은 짓을 했다. 볼따구니가 벌게진 게 꿈이 분명했다. 볼은 아팠지만, 신기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왜 이런 꿈을 꾸었을까…? 설마, 혹시 내 운명을 암시한 예언의 꿈 아니야? 예지몽? 나, 커서 유명한 사람이 되는 걸까? 무엇으로? 너무 희한해서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야.”

해이는 이 놀랍고 이상한 꿈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한참이나 침대에 앉아 멍하니 꿈에 빠져 있던 해이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나갈 준비를 했다. 오늘은 학교뿐만 아니라 오후에 병원에도 가야 했다.

말괄량이 16살, 중학교 3학년생, 연애가 요즈음 지상 최대 관심사인 사춘기 소녀는 어디를 가든 완벽하게 예쁜 외모를 준비해야 했다.

얼굴은 티 안 나게 가볍고 흐린 핑크빛 색조로 화장을 하고, 머리는 살짝 세팅을 해서 자연스러운 웨이브를 만들어줬다.

교복 치마허리는 한 번 접어서 무릎 위로 살짝 올라오게 해서 귀엽게 보이도록 연출했고, 무릎까지 오는 흰 양말로 마무리한 후 전신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오~ 쏘 비유티풀! 여기에 온 동네 오빠들이 내게 빠지도록 할 유혹의 한 수가 필요한대.”

해이는 폰에서 인기 걸그룹 ‘시스터’의 노래를 틀었다.

우우우~ 아 플리즈 돈 고 마이 러브~

우우우 아임 폴 인 러브 위드 유~

우린 우연히 만나게 아니야~

우리는 처음부터 운명이었던 거야~

“이렇게 섹시하게 춤추고 노래하면, 안 넘어올 남자가 없지!”

그녀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신나게 춤을 췄다.

흥에 겨워서 자신이 환자인 것도 까먹었다. 엄마가 아시면 몸조심하라고 난리를 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

“가방 챙겼어?”

“네.”

“오늘, 신장투석 하는 날인 거 알고 있지?”

“엄마, 오늘은 나 혼자 병원 갈 거예요. 따라올 생각하지 마세요.”

“그 힘든 걸, 어떻게 혼자 해내려고 해? 같이 가줄게.”

“사양할래. 내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엄마 보기에는 어린애야. 열여섯 살밖에 안 된 것이 어른인 척은. 나중에 시집가거든 그때 마음대로 해.”

“엄마, 노 땡스!”

해이는 장난치듯 거절했다. 엄마가 걱정하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엄마는 그런 딸의 속 깊은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마음이 아파서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찾아온 루프스 병, 그리고 망가진 신장. 누가 스무 살도 안 돼 이런 고통을 당할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알았어. 대신 투석 끝나면, 다른 곳으로 새지 말고 바로 집으로 와야 한다. 아버지도 걱정하시니까 저녁 식사 전까진 와야 해!”

“알았다고요.”

해이는 엄마가 만들어준 토스트 한 조각을 베어 먹으면서 책가방을 매고 현관을 나섰다.

“다녀오겠습니다.”

“차 조심해!”

“넵!”

해이는 씩씩하게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사실, 엄마한테 병원에 혼자 가겠다고 한 것은 호기 어린 행동이었다. 자기도 병원에서 서너 시간씩 신장투석 하는 시간이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당장 치료받는 것보다, 미래가 더 무서웠다.

얼마나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혹시 이렇게 고통당하다 갑자기 죽는 것은 아닐까?

이런 두려움이 시시때때로 밀려왔다.

그렇지만 병원에 올 때마다 자기 때문에 눈물을 참고 있는 엄마의 얼굴을 보는 것이 내내 마음 편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집엔 네 살이나 어린 동생이 있는데, 이렇게 큰딸 때문에 힘들어하는 엄마를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아무렇지 않은 척, 두렵지 않은 척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별거 아니야. 난 잘할 수 있어. 절대 무섭지 않아. 내가 누구냐? 한해이잖아? 북한군도 무서워한다는 대한민국 중딩!”

주먹을 불끈 쥐고 이렇게 외친 후,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아파트를 나왔다. 그리고 부지런히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

오늘도 수업은 지루했다. 그래서 해이는 더 재촉해서 병원으로 달려갔다.

일주일에 세 번 4시간씩 혈액투석을 받지만, 꼭 고통스러운 일만은 아니었다. 병원에는 뜻밖의 즐거움도 있었다.

바로 병원에서 만나는 김주승 선생과 한일수 선생을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김 쌤은 얼굴이 조금 날카롭지만 눈과,입술이 매력적이었고, 한 쌤은 키가 작고 조금 통통했지만 말할 때 배려심이 남달라서 친한 이웃집 오빠 같아 좋았다.

이 두 선생님의 얼굴을 매주 본다는 것이 학교 가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해이는 이 두 사람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 병원에 올 때마다 간식을 가지고 왔다.

오늘은 편의점에서 소시지와 젤리를 샀다. 두 선생님에게만 주면 간호사 언니들이 질투할까 봐 넉넉하게 사서 주변 사람들까지 나누어주었다. 그러면 간호사 언니들이 해이에게 두 쌤의 스케줄을 알려줄 때도 있었다.

가끔 환자가 너무 많아서 혈액투석을 받기 전까지 10~30분씩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면 김 쌤과 한 쌤을 찾아다니며 그들과 장난치는 재미에 빠지곤 했다.

해이가 병원에서 이런 숨바꼭질을 하며 보내고 있다는 것을 엄마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오늘은 김 쌤도, 한 쌤도 안 보이네. 다들 어디 간 거야?”

해이는 자기 순서를 기다리기가 지겨워 또 두 사람을 찾았지만, 1층부터 3층까지 모두 뒤져도 두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박 간호사님, 김 쌤과 한 쌤 어디 갔어요? 안 보이네요.”

“한 쌤은 휴가 냈고, 김 쌤은 지금 응급실 가 있어. 교통사고 환자들이 들어왔는데, 외과가 필요하다고 해서 불려갔어.”

“그래요?”

해이는 응급실에서 김 쌤이 뭐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싱글벙글 웃으며 김 쌤을 보러 응급실로 달려갔다.

김 쌤의 얼굴을 보면, 이따 투석 받을 때 한결 기분이 나아질 것을 기대하며 그를 찾았다.

“나의 기쁨조, 김 쌤~”

조심스럽게 응급실 안으로 들어가자 간이침대마다 환자들과 보호자들이 다 차 있어서 응급실은 혼잡했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김 쌤이 두 명의 의사와 간호사 2명과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뭔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는 상황처럼 보였다.

“남자는 의식이 없습니다.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안 돼요.”

“여자 환자는?”

“지혈을 하고 있고요. 바로 수술실 잡아놨습니다.”

“외과 과장님께 콜은 했어?”

“네, 환자들 들어오자마자 했습니다.”

“알았어. 나도 바로 수술실로 들어갈게”

김 쌤은 남자 두 명과 두 개의 침대를 끌고 급하게 응급실을 빠져나갔다.

해이는 옆에서 말조차 걸 수 없는 긴박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