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풍백이 꽃피는 것을 시기한 나머지 추위를 몰고 왔다. 화창한 봄날이었으나 찬 기운이 제대로 가시지 않았다.

꽁꽁 언 손을 연신 비비며 남윤은 아버지 서영익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했던 나머지 남윤의 고개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금방이라도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 날개를 펼친 새처럼 팔작지붕의 처마 끝은 우아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남윤이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서영익은 저만치 멀리 가 있었다. 화들짝 놀라며 남윤이 얼른 달음박질쳐서 서영익을 따라잡았다.

그렇게 한참을 서영익의 뒤를 따라 걷다 보니 궐의 심처에 들어와 있었다. 이내 서영익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조급하게 뒤를 따르던 남윤도 덩달아 걸음을 멈추었다. 눈에 익은 중년의 사내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전각 안에서 걸어 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중년의 사내를 알아본 남윤은 작은 감탄사를 흘렸다.

“저분은…….”

“쉿.”

서영익이 남윤을 주의시켰다.

남윤이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잠시만 기다리시겠습니까?”

무표정한 얼굴의 중년 사내는 전에 봤을 때와 풍겨오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전에는 친근하고 다정다감했으나 지금은 냉철하며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러겠습니다.”

서영익의 답을 들은 중년의 사내가 빠르게 전각 안으로 사라졌다.

주변으로 불편한 정적이 모여들었다. 느리지만 정확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남윤이 서영익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하였다.

“아버지, 잠깐 측간에 다녀오면 안 되겠습니까?”

“곧 주상전하를 알현할 것이다. 조금만 참아라.”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습니다. 후딱 다녀오면 안 되겠습니까?”

남윤은 두 다리를 반대 방향으로 교차를 시키고선 쩔쩔맸다. 금방이라도 오줌보가 터질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 이러다가 옷에 싸겠습니다.”

얼마나 힘을 주고 참고 있는지 남윤의 얼굴색이 시뻘겠다.

서영익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여기 측간이 어디 있습니까?”

전각 밖에 시립해 있던 궁녀에게 서영익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겉으로는 무관심해 보였지만 한참 전부터 부녀에게 남달리 관심이 많았던 궁녀 하나가 얼른 답을 하였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라가 보아라.”

남윤 또래로 보이는 궁녀 하나가 따라오라는 듯 앞장을 섰다.

궁녀의 뒤를 따라가는 남윤을 보던 서영익이 얼굴을 찌푸려졌다.

“손은 치우고.”

“예.”

당장에라도 오줌보가 터질 것 같았던 남윤은 제 가랑이 사이를 손으로 잡고 있었다. 망측한 모양새로 궐 안을 활보할 것을 생각하니 걱정보다 잔소리부터 튀어나왔다.

“언제면 다소곳해질까…….”

멀어지는 남윤의 뒷모습을 보며 서영익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궁녀가 빠르고 안전하게 남윤을 측간으로 데리고 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궁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남윤은 측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발을 동동 구르며 옷을 벗었다. 한계치까지 차오른 오줌보가 마침내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장마가 끝나고 난 후 폭포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측간 안에서부터 들려왔다.

남우세스러운 소리에 궁녀가 측간과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급격하게 소변이 몸을 빠져나가면서 남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제 살겠다.”

속바지를 추켜올리며 남윤이 말하였다. 얼굴빛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편안함을 되찾자 걸음걸이에도 여유가 흘러넘쳤다.

측간을 나온 남윤은 궁녀를 찾았다. 분명 밖에 있겠다고 했는데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근처를 여기저기 살펴보았으나 끝끝내 궁녀의 머리카락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어디를 가신 것이지?”

돌아가는 길을 몰랐던 남윤은 졸지에 궐 안에서 미아 신세가 되었다. 지나가는 궁인이라도 있으면 붙잡고 물어볼 텐데. 구석진 측간 근처로는 지나가는 사람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단 한 명도 없었다.

*****

궐 안에는 죄 바쁜 사람밖에 없었다. 남윤이 말을 걸어볼라치면 걸음을 빨리해서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옷차림을 가지고 무시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남윤은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본래 어떤 색이었는지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색이 바랜 치마와 저고리. 그래도 지금 입고 있는 옷이 그녀가 가진 옷 중에서는 가장 고급이라 말할 수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곤궁함이 사람을 무시해도 되는 이유라도 되는 것처럼 궁인들은 남윤을 철저히 무시하였다.

“깍쟁이 같으니라고.”

입술을 부루퉁하게 앞으로 내밀고 남윤이 투덜거렸다. 그러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어떻게 찾아가지?”

어디를 보나 비슷비슷하게 생긴 전각들뿐이었다. 길 안내를 해주는 궁녀가 있으니 따로 길을 외워두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궁녀가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못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대비를 제대로 해두지 않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일단 급한 대로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왔던 길을 따라 반대로 가다 보면 아버지와 헤어졌던 곳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 흠이었지만 일단 해보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실망하며 주저앉아 있기보다 남윤은 행동하는 편을 선택하였다. 기억을 더듬으며 남윤이 측간을 나갔다.

남윤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녀를 측간으로 데려다주었던 궁녀가 돌아왔다. 문이 닫힌 측간을 보고 아직도 남윤이 안에 있다고 판단을 내렸다.

간발의 차이로 두 사람이 엇갈려 버렸다.

*****

기억을 따라 걷던 남윤은 어느 사이 형형색색의 꽃이 만발한 궐의 후원에 들어와 있었다.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도 잊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에 혼이 쏙 빠지고 말았다.

“우와. 예쁘다.”

고향에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꽃들이 한가득 피어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궐과 고향을 비교하여 보니 얼마나 삭막한 곳에서 살고 있었는지 실감이 났다.

꽃의 인도를 따라 점점 더 깊은 곳으로 걸음이 옮겨갔다.

별안간 새가 지저귀는 듯한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남윤의 귓가에 들렸다. 조용한 가운데 들려온 웃음소리였던 터라 남윤의 청각이 다른 때보다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잘못 들었나?”

주변을 살펴도 사람 그림자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남윤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소리를 자세히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신기하게도 더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남윤이 고개를 바로 세우려던 그 순간이었다.

또 한 번 더 멀지 않은 곳에서 꺄르르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서 저렇게 웃는 것일까? 궁금증이 생겼다.

남윤이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기고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작은 연못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 정자에 남윤의 또래로 보이는 여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화려한 옷차림이 지체 높은 양반가의 여식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남윤이 고개를 아래로 내려 제 입성을 보았다. 그녀가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좋고 깨끗한 옷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저들의 것에 비하면 볼품없고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손으로 치마를 잡고 펼쳤다. 질 좋은 비단이 가진 광택이나 화려한 수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남윤이 부러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연못 건너편에 모인 여인들을 보았다. 찻잔을 드는 손짓 하나조차도 기품이 흘렀다. 남윤은 여인들이 차를 마시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허공에 찻잔이 있다고 생각하고 따라 해보았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키득대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남윤이 허공에 손을 든 채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

“애 좀 봐라. 궐에 왔다고 네가 양반이라도 된 것 같니?”

다짜고짜 독설을 퍼붓는 여인을 남윤이 빤히 보았다.

여인은 연못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색감의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가슴 아래쪽에는 있는 풍성한 수술이 달린 노리개는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그 움직임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어디서 양반도 아닌 계집이 양반을 빤히 보는 것이야.”

앙칼진 여인의 목소리가 남윤의 귓가에 닿으려는 찰나였다. 짝. 눈 깜짝할 사이에 여인의 고운 손이 남윤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여인의 손이 닿았던 뺨이 얼얼하였다.

놀란 토끼 눈을 한 남윤이 여인을 보았다. 불시에 당한 일격에 어안이 벙벙하였다.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는 것이야? 매운맛을 더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미처 남윤이 무어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여인이 고함을 질렀다. 벼락과 같은 그 소리에 정신이 다 아찔하였다.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여인이 성난 황소처럼 남윤의 앞에서 날뛰고 있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