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혼란한 상황

최종원은 문국현의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침묵하였다. 흡사 묵언 수행을 하던 때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설렘 가득하던 얼굴은 나라를 잃기라도 한 것처럼 생기가 없었다. 손에 든 겉옷이 땅바닥에 질질 끌리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조용히 최종원의 뒤를 따르던 노승이 보다못해 그의 손에서 겉옷을 빼앗듯이 가져가 버렸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땅바닥에 끌려 더러워진 부분을 털었다.

누런 흙먼지가 바람에 날리는 것을 최종원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송소혜는 바람처럼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영 믿지 못해서 주막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물론 주모에게도 송소혜가 어디로 갔는지 물어보았다.

부엌간에서 아침 내내 일을 한 탓에 송소혜는 물론 최종원이 바깥에 나갔는지도 주모는 알지 못하였다. 송소혜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디서부터 그녀를 찾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였다.

툇마루에 주저앉은 최종원에게 노승이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였다. 거절할 핑계조차 마땅한 것이 없었던 최종원은 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받게.”

노승이 땅에 끌리지 않도록 반으로 접은 겉옷을 최종원에게 돌려주었다.

쓴 미소를 지으며 최종원이 겉옷을 받았다.

“인연이 있으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테니 그만 기운 내게.”

“다시 만날 인연이 아니면 어떻게 됩니까? 다시는 만나지 못합니까?”

“만일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인연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만나려 하는 의지가 있다면 언젠가는 만나겠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은 누구도 알 수 없네.”

최종원은 노승의 말이 무책임하다고 느껴졌다.

반기를 들려던 최종원은 화를 내기 전에 한 번 더 차분히 생각이란 것을 해보았다. 그간 받았던 노승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화가 날 때 생각 없이 한 말은 후회를 낳았다. 후회는 다른 실수를 만들고 또다시 후회하게 만든다. 악순환의 연속은 그렇게 해서 생긴다. 그러니 이런 상황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불교의 가르침을 받겠다고 절로 들어가 놓고 예전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그간의 노력이 헛되었다는 증명과 같았다. 최종원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화를 낼 상황은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노승에게 화풀이해서는 안 되었다.

큰 실수를 할 뻔했던 자신의 우매함에 최종원의 고개가 잘 익은 벼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이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종원아.”

몸을 돌리는 최종원을 노승이 따뜻한 목소리로 불렀다.

“예, 스님.”

“오는 인연 막지 말고 가는 인연 붙잡을 생각 말아라.”

노승의 말에 최종원이 고개를 들었다.

심각한 분위기와 달리 노승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네 인연이면 밀어내도 네 옆에 달라붙을 것이고 네 인연이 아니면 풀로 붙여 놔도 떨어질 것이다.”

“승휘마마처럼 말입니까?”

“그래, 너와 승휘마마의 관계가 딱 그러하지 않느냐.”

알겠다는 듯이 최종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승이 최종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알맞은 인연이 있기 마련이다. 아직 그 인연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니 너무 속상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예전에 이런 말을 들었다면 누구나 아는 사실을 말한다며 노승을 무시했을 것이다. 지금의 최종원은 달랐다. 노승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

“네 진가를 알아봐 줄 사람이 분명 이 하늘 아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네가 찾아주길 그쪽에서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니 열린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아라.”

온화한 음성으로 말을 하며 노승이 한쪽 손으로 앞을 가리켜 보였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방향에서 와서 다른 방향으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누구 하나 똑같은 모습을 한 사람이 없었다.

최종원도 그런 평범한 사람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노승에게 큰 위로를 받은 최종원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어서 집으로 가봐야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모래를 매단 것처럼 무겁던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비슷한 속도로 노승과 나란히 걸음을 옮기던 최종원이 슬그머니 속도를 늦춰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최종원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송소혜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주막의 처마 끝만 겨우 보였다.

마음에 남은 미련일랑 풍경처럼 처마 끝에 걸어두었다. 송소혜가 보고파 질 때면 풍경이 슬픈 소리를 내며 울릴 것이다. 언젠가 그 소리를 송소혜가 듣길 바라였다. 그리고 최종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이라도 해주길 내심 바라였다. 자신에게 좋은 기억이었던 만큼 송소혜에게도 함께한 시간이 좋았기를 최종원은 희망해 보았다.

*****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아까웠던 나머지 연은 곧장 왕이 있다는 침전으로 향하였다. 가슴 벅차오르는 기쁨에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웃음을 만들었다. 만면 가득 미소를 지은 연은 발걸음을 빨리하였다.

연이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사이 상궁이 안을 향해 고하였다.

“주상 전하, 세자 저하 입시옵니다.”

“들라 하라.”

방문이 열린 순간 연은 깜짝 놀랐다. 먼저 온 객이 있었다. 흥이 깨진 연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던지 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신, 그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천천히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뒤를 도는 객의 얼굴을 확인한 연은 찌푸렸던 미간을 펴고 표정 관리를 하였다. 감정을 들켜 좋을 게 없는 사람이었던 탓이다.

연은 왕의 안색을 살폈다. 왕은 흡족한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무언가 굉장히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선수를 빼앗겼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의뭉을 떠는 임정헌이 연은 몹시 못마땅하였다. 연 모르게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게 무엇인지 현재 상황에서는 알 수 없지만 연에게 좋은 일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였다.

기분 좋은 날이라서 일단은 그대로 넘어가기로 하였다.

문제점은 왕에게 기쁜 소식을 알린 후에 차근차근 따져도 늦지 않았다.

연을 지나치기 전 임정헌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경축드립니다. 세자 저하.”

역시 연의 짐작이 맞았다. 임정헌이 이른 아침부터 왕을 찾은 이유. 남윤의 출산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고맙소.”

“긴히 대신들과 의논할 문제가 있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임정헌의 달변은 조정에서 따라올 자가 없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지난날 연도 그런 임정헌을 꾀여 남윤을 궐에 들였다.

내 편일 때는 남부럽지 않았지만 적이 되면 골치가 아픈 존재가 바로 임정헌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지금 임정헌은 연의 편은 아닌 듯하였다. 그렇다고 완전히 적이 된 것도 아니었다. 연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편도 될 수 있고 적도 될 수 있었다.

임정헌의 눈가에 어린 음흉한 기색을 연은 모른 척하였다.

“아침부터 고생이 많으시오.”

“고생이라니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연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 곁을 지나치는 임정헌에게서 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왕은 지금도 흡족한 표정을 하곤 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윤이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은 영상에게 이미 들었다.”

“그런 것 같았사옵니다.”

“그래서 실망하였느냐?”

“소자가 가장 먼저 아바마마께 기쁜 소식을 알려드리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여 약간 아쉽기는 하옵니다.”

“누가 먼저면 어떻고 누가 나중이면 어떠냐. 네가 가장 먼저 소식을 알리고 싶었던 사람이 나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연의 속상한 마음을 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여 연을 위로하였다.

연이 씁쓸하게 웃으며 왕의 앞에 다가가 앉았다.

“영의정과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빈궁의 자리에 남윤일 앉혔으면 좋겠다고 하는구나.”

“그게 정말입니까?”

“누구보다 시류를 타는 능력이 뛰어난 자가 아니더냐.”

연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임정헌에게는 시류를 읽는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그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타고났다고밖에 설명이 안 되는 그런 능력이었다.

하여 임정헌은 임상은이 관비가 되는 큰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란 듯이 승승장구하였다. 기어이 최고 관직인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연은 임정헌이 영의정이 되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다. 본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런 자에게 막대한 권력을 쥐여준다면 훗날 좋지 못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만한 인재가 없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영상이 남윤일 빈궁의 자리에 앉힌다고 하니 조정에 반대하는 자는 아마도 이판을 제외하고는 없을 것이다.”

“이유는 무어라 합니까?”

“네가 이 아비에게 전하려고 하였던 소식이 이유라면 설명이 되겠느냐? 자칫하였다간 끊어질 수도 있었을 왕실의 대를 이었다. 남윤이 한 일은 상을 내려도 부족할 것이다.”

“분명 그것 말고도 다른 뜻이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다른 게 더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건 말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이득이 없는 일에는 움직이지 않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윤의 일에 있어서만큼은 제 일처럼 두손 두발 걷고 나섰습니다.”

왕도 임정헌이 남윤의 일에 온 정성을 쏟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임정헌 덕분에 억울하게 뒤집어쓸 뻔했던 누명도 벗었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가려운 곳을 쓱쓱 긁어주는 것이 소자 불안합니다.”

“나중엔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긁어주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을 바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과도한 권력을 탐한 자들의 말로가 어땠는지 세자는 아는가?”

하나 같이 비참한 결말을 맞았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