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금요일 밤의 회식

방송은 순조로웠다.

첫 방송은 게스트 없이 현우 혼자 청취자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고 10만 개라는 기록적인 문자 사연 개수를 달성하며 끝났다. 스튜디오는 화환과 팬들이 보내온 선물로 가득했고 방송 내내 검색어 1위를 기록했다.

방송을 마치고 사무실로 올라온 나는… 무기력하게 앉아 휴대폰 화면만 새로 고쳐 보고 있었다. 끝없이 많은 기사가 쉼 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비현실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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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방은 현우 스케쥴에 맞춰 일주일에 세 번 정도 하기로 했다. 방송 들어가기 전 한 시간은 녹음을 했다.

녹음 시간이 다가오면 나는 다은과 미리 녹음실에 내려가 있곤 했다. 밤의 스튜디오엔 일하는 사람이 적어서, 스튜디오 문을 열어놓고 앉아있으면 복도에 누가 지나가는지 기척이 다 느껴지곤 했다.

늘 녹음 10분 전엔…. 현우와, 로드 매니저인 경석 팀장님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현우의 모든 스케줄에 동행하는 경석 팀장님은, 행동도 빠르고 발걸음도 빨랐다. 그에 비해 현우의 발걸음은 차분하고 여유로웠다. 나는 멀리서 다가오는 현우의 기척만 들어도 몹시 긴장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녹음실 문을 들어서면서 현우는 늘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다은은 하이 톤으로 현우를 반겼다.

“오빠! 어서 오세요! 오빠, 저녁 먹었어요?”

“네, 먹었어요.”

“아이 참, 말 놓으시라니깐요.”

“아… 그럴게.”

친화력 좋은 다은이는 어느새 현우에게 ‘오빠’라고 호칭 정리를 마친 모양이었다. 현우는 웃으며 디제이 석으로 들어갔고 나는 마지못해 대본을 들고 따라 들어가, 메마른 말투로 오늘 녹음분에 대해 설명했다.

“오늘 코너 초대석이에요, 배우 한이안 씨 오실 거예요. 1부는 인터뷰만 하면 되고 2부 들어가자마자 소코너 있어요.”

현우는 내 설명을 들으며 대본에 열심히 밑줄을 긋는다. 디제이가 처음이라 모든 게 낯설고 어려울 텐데… 더 자세히 설명해주고 싶지만, 늘 현우의 가까이에 다가서면 심장이 죄어오는 기분… 조금도 자연스럽고 편안해지지가 않았다.

“그럼, 녹음 시작할게요.”

내가 스튜디오 문을 닫고 나서려 하자 현우는 올려다보며 담백하게 한마디 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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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고정 게스트는 JBC의 신입아나운서 윤세령이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앞으로 금요일에 찾아뵙게 된 윤세령입니다!”

발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인사를 했는데도, 역시나 윤세령이 등장하자마자 게시판은 악플로 가득 찼다.

재작년, 입사와 동시에 화제가 됐던 아나운서. 귀여운 외모와 세련된 스타일을 가졌지만 어딘가 늘 이상하게 얄미운 스타일이었다. 청취자들의 거부감은 예상했던 바. 우리 스텝들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게스트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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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님이 게스트로 윤세령을 넣어 달래.”

런칭 전, 회의 때, 피디님의 말에 너무나 깜짝 놀랐다.

“네? 말도 안 돼!”

나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피디님은 답이 없단 표정을 지었다.

“윤세령이 라디오를 너무 하고 싶어 한대.”

그 말에 다은은 진심으로 화를 냈다.

“피디님, 뭔 소리예요, 진짜! 절대 안 돼요! 윤세령 완전 비호감이잖아요! 완전 상여우! 얼마 전에도, 윤세령이 김준하 배우 인터뷰하는데, 막 눈웃음치면서 팔 때리고, 어깨 잡구… 미친 짓 해가지고 얼마나 욕을 먹었는데요!”

“나도 알아, 나도 알지. 나도 엄청 반대하고 오는 길이야….”

“휴….”

국장님의 오더는, 우리로서는 절대 거절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마 국장님의 의견도 아니었을 것이다. 국장도 본인에게 내려온 오더를,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전달한 것뿐이겠지.

윤세령은 JBC 사장의 조카였다.

아나운서가 됐을 때부터 낙하산이라고 말이 많았는데 이제 그런 비난쯤은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그 위치를 누리겠다는 태도로 보였다.

“누가 봐도 뻔하잖아요! 사심인 거.”

입이 댓 발 나온 다은이 팩트를 말했다.

윤세령이 라디오를 하고 싶었다면 그냥 DJ 자리를 달라고 말했을 것이다. 요즘 그녀의 행보대로라면, 그래도 충분했다. 국장은 디제이 자리도 선뜻 마련해줬을 테다. 하지만 굳이 우리 프로그램을 지목한 이유는, 누가 봐도 뻔했다. 현우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울며 겨자 먹기로 윤세령에게 어울리는 코너를 겨우 마련했다. 그리고 오늘이 그 첫 방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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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윤세령은 한 시간 동안 하라는 토크는 안 하고 끼만 잔뜩 부렸다. 그러고도 코너가 끝나고 노래가 나오는 사이에 아주 당당한 표정으로 스튜디오에서 빠져나왔다, 첫날이니 현우가 마중한답시고 잠깐 디제이석 밖으로 나왔는데, 세령은 예의 그 눈웃음을 지으며 현우에게 기어코 이렇게 말하고야 말았다.

“오빠, 연락처 좀 알려주세요.”

피디님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어쩌면 그녀는, 우리의 예상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연락처요?”

현우는 놀란 듯. 되물었다.

“네, 앞으로 매주 볼 거니까, 친해져야죠. 연락처 알려주세요!”

애교가 많고 구김이 하나도 없는 스타일이었다. 윤세령은 적극적으로 현우에게 들이댔다. 현우는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지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같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는 것뿐.

현우는 윤세령에게 연락처를 가르쳐주었고, 목표를 달성한 윤세령은 신난다는 표정으로, 스튜디오를 나서며 피디님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피디님! 우리 회식 언제 해요?”

그렇게, 나도 모르는 현우의 연락처를 쟁취해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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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내 눈앞에서 다른 여자가 현우한테 꼬리 치는 것까지 지켜봐야 한다니….

멍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스튜디오 안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클로징 멘트를 마친 현우가 고개를 들었다. 또 눈이 마주쳐버렸다. 현우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절대 먼저 시선을 피하는 법이 없었다. 나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내 표정은, 아마도 언짢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우의 표정은 그야말로 지그시 응시하는 눈빛이었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이나, 뜻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넌 도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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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매일, 나는 내가 깨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생방 스튜디오에서 디제이석과 작가석의 거리는 5미터 정도, 그 사이엔 벽과 커다란 창이 하나 있다. 내 자리에서 고개를 들면, 디제이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다. 이따금,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다가 눈이 마주쳐 당황하기도 하고, 어떤 땐 대본을 보고 있는 현우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처음엔 그런 현우를 어쩌지 못해 마음이 아렸다. 가까이 가고 싶고, 말 걸고 싶고, 만지고 싶은 마음이 컸다. 현우의 멘트 하나에 심장이 쿵 떨어지기도 하고 마음이 미친 듯이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마음이 진정되어가는 게 느껴졌다. 가끔 낯선 순간과 마주치게 됐기 때문이다.

현우가 점점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쏟아지는 청취자들의… 사랑한다는 메시지와… 나는 신경도 안 쓰는 듯, 너무나 프로페셔널하게 진행하는 현우의 모습. 나에게 확실하게 선을 긋는 정중한 태도를 경험하면 할수록… 마음 한구석이 점점 비어가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쭉 작가와 디제이로, 태연하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서로 모르는 사이였던 것처럼 지내면 되는 걸까.

하루에도 수천 번씩, 뜨겁게 달아올랐다 차갑게 식었다 하는 내 마음은, 내 마음은 어쩌지.

현우의 디제이 계약은 1년. 혹시 그 후에 프로그램을 내리게 되면… 이렇게 1년을 더 보고, 또 추억이 쌓인 후에, 다시 현우와 헤어진다면 나는 그 이후의 시간을 버틸 자신이 있을까.

자신이 없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뾰족한 것에 찔린 것처럼, 내내 심장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