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구나 불을 다루고 바람을 부르던 마법의 시대가 갔다. 푸른 달의 주기로 685년. 세상에 남은 마력은 몹시 한정적이었고 그것을 가지고 태어나 다루는 자들은 더욱 드물어졌다.

자연히 마력과 그 구동 능력을 가진 자들은 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지배 세력이 되었다. 피로 유전되는 능력은 귀족들 간의 폐쇄적인 결속으로 이어졌고, 20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 평범한 백성들에게선 마력을 가진 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 클리아론의 새로운 학생 실라 아스티안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쟤가 그 희귀종이지?”

“맞아. 머리 모양이나 옷차림만 봐도 이곳 출신이 아니잖아. 어쩌면 저렇게 촌스러울까.”

“후후. 그러니까. 산골짜기에 처박혀 살던 시골뜨기에게 마력이라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실크 리본과 겹겹의 레이스, 반짝이는 보석으로 치장한 소녀들이 새치름한 눈으로 실라를 힐끔거렸다.

화사한 색의 드레스를 입고 한껏 머리를 꾸민 소녀들과 달리 실라는 하얗고 둥근 깃이 달린 검푸른 치마에 짤막한 단발머리였다. 지나치게 단정하고 수수해서 도리어 눈에 띄는 옷차림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실라가 쌩긋 웃어 보였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라도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하면서.

그걸 본 소녀들이 저들끼리 뭐라 수군거렸으나 실라는 평화롭게 정면을 응시했다. 미동도 않고 앞을 향한 눈동자가 말갛게 빛났다. 모두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라 새삼 힘든 것은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하고 호화로운 도시와 위협적일 만큼 아름답고 고아한 사람들 틈에서 느껴지는 완벽한 이질감. 그런 것쯤이야 며칠 뒤면 희미해질 것이다. 어디 가나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그런 자신을 믿고 자부심을 가지기로 했다.

그래, 어쩔 수 없다면 긍정적으로.

실라는 주머니에서 꺼낸 새콤한 레몬 사탕 하나를 우물거렸다. 달콤한 맛과 함께 아스티안이 떠오르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때였다. 장미 화단이 있는 서쪽 입구에서부터 탄성이 들려왔다. 실라의 사방을 에워싸고 있던 시선들도 재빠르게 그쪽을 향했다.

“레스터 선배.”

“단순히 잘생긴 게 아니야. 정말이지 아우라가 남다르다니까.”

훤칠한 키에 새까만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미소년을 향해 가장 열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실라가 속해 있는 1클래스였다.

레스터는 주변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4클래스가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우, 언제쯤 레스터 선배랑 페어가 되어 볼까.”

“꿈 깨. 4클래스 내에서도 혼자 미션을 클리어 하는 냉정하고 아름다운 남자라고, 선배는.”

클리아론에서는 무엇보다 마력을 우선시하기에 능력치가 상승한다면 클래스 이동도 가능했다. 1클래스의 학생들도 4클래스로 합류해 그들과 팀을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입학과 동시에 4클래스였던 레스터는 유독 마력이 강하고 구동 능력이 뛰어나 아직까지 홀로 클리아론의 시험들을 통과해 왔다고 했다.

집안, 능력, 외모. 모든 것이 으리으리한 남자를 흘끔 본 실라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런 종류의 인간은 겪어 본 적이 없는데…….

생각을 마치기도 전 서류 더미를 가득 든 남자가 실라를 불렀다.

“신입생. 그러니까 실라 아스티안 양은 반을 잘못 찾았어요.”

크고 두꺼운 안경을 추켜 올린 그가 서류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실라 양은…… 마력 기본 교육을 따로 이수하는 조건으로 4클래스에 배정됐거든요. 저기, 푸른 실크 보이죠? 4클래스는 저기로 가서 서야 해요. 아직 설명해야 할 것과 받아 가야 할 물품들이 있으니 이따가 따로 행정관을 방문해 주세요.”

클래스를 나누어 줄을 선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실라는 클리아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운 상황이지만 움츠러드는 대신 당당히, 실라가 허리를 바르게 펴고 남자가 설명한 자리로 이동했다.

1클래스 무리에서 4클래스로 이동하는 길. 경악, 질투, 호기심…… 유리 파편처럼 날카롭고 예민한 감정들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뒤따랐다.

푸른 리본을 앞세운 4클래스의 분위기는 조금 전 서 있던 1클래스와는 사뭇 달랐다. 스무 명 남짓의 학생들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기운은 가진 능력 뿐 아니라 자신감의 표출이기도 했다.

저를 빤히 보는 학생들을 지나 맨 끝에 자리 잡은 실라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와 소리가 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했다.

때문에 바로 앞에 그 유명한 레스터 가우디얼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팔을 걷어 올린 흰 셔츠와 걸치기만 한 회색 조끼 차림의 그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낮게 혀를 찼을 때서야 실라는 레스터를 응시했다.

“아, 미안.”

내려놓은 가방이 그의 진갈색 부츠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발견한 실라가 황망히 그것을 옮겼다. 돌아오는 답이 없을 것은 예상했으나 조금 의외였다. 걸리적거리는 가방을 발로 차지 않은 것 말이다.

듣기로는 방해되는 것을 참지 않는다고 했다. 실수도 없고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 말 그대로 혼자 완벽하고 아름다운 생물이라고.

아름다운 것은 눈으로 확인했고 성격은 겪으며 파악하게 될 테지만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부분은 어쩔 수 없이 당장 부딪쳐 나가야 했다. 그것이 자신이 여기까지 온 이유고 아스티안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실라는 아까 받은 페어 신청서의 빈칸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레스터 가우디얼 외의 이름을 적을 일은 없을 거다.

어쨌거나 나는 너를 지킬 거고, 너는…… 몰라도 좋겠지.

바람에 흐트러지는 짤막한 머리카락을 넘기며 실라의 입술이 짧게 호선을 그렸다.

＊*

클리아론에서 최초라는 수식어를 가장 많이 획득한 사람이 실라일 것이다.

변변한 가문조차 없는 일개 평민 최초로 마력을 소유했고, 아카데미에서 나누어 주는 비품을 사용하는 최초의 인물이었고, 클리아론 학생 가운데 최초로 마력이나 구동의 기본 사항에 무지했다.

게다가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로 레스터가 먼저 말을 거는 상대였다, 물론 첫 마디는 대부분…….

“꺼져.”

실라는 며칠 새 수백 번은 들은 듯한 단어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예 상대해 주지 않는 것보다야 낫다고 생각해서인지 무던히 넘길 수 있었다.

“페어는?”

“하아. 이거 완전…….”

레스터가 험상궂게 눈살을 찌푸리며 실라의 목덜미를 움켜쥐자 당황한 피에몽 교수가 중재에 나섰다. 교실로 향하는 복도 앞에는 세 사람밖에 없어 차마 못 본 척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저기, 실라 학생. 페어는 꼭 레스터 군이 아니라도.”

“아닙니다. 교수님. 보다시피 다들 페어를 맺은 상태라 빈자리가 없어요. 마력 지식도 많지 않고 경험도 부족한 저와 팀을 이루기 위해 상대를 교체하지는 않을 테고요.”

또박또박 할 말 하는 실라와 달리 피에몽 교수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럼 혼자서 하면…….”

“페어를 이루는 것이 시험 조건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예외가 있다는 것은 레스터 학생을 보고 알았지만요. 어쨌거나 마력 최강이라는 그를 보조하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4클래스에 누가 가지 않도록 가능한 빨리 마력 구동을 익히고 싶어요.”

“하지만 레스터 군이…….”

들어 보면 틀린 말은 없어서 피에몽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다 화들짝 놀랐다. 레스터가 노골적으로 교수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염려 마세요. 제가 다시 부탁하고 설득해 보겠습니다.”

“그, 그래요. 어쨌거나 아직 팀을 정하는 기간이 남았으니까.”

실라의 이야기에 피에몽 교수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다시 두 사람만 남자 레스터가 위협적인 눈으로 바짝 다가섰다. 실라는 미동도 않은 채 생긋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