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뭇대던 발걸음이 층대(層臺)로 올라서 목화(木靴) 옆에 섰다.

“…….”

량이는 곤이 벗어 놓은 목화를 내려다보다 닫힌 전각의 문을 바라봤다.

하필 바로 다음 날 문안인사를 들러야 하다니. 아, 들어가기 싫다.

“마마.”

마 상궁이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마 상궁은 아래를 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아…….”

문을 지키고 있던 나인이 꿇어앉아 량이가 운혜(雲鞋)를 벗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량이는 더 이상 머뭇댈 수 없음에 이내 운혜를 벗고 대비전 낭하(廊下)로 들어섰다.

“마마, 중전마마 드셨사옵니다.”

“드시라 하여라.”

대비의 대답이 있는 동시에 문이 열렸다.

량이는 속으로 숨을 한 번 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중전.”

량이를 반기는 대비, 그 앞에 곤이 등을 보이고 앉아 있다.

“송구하옵니다. 늦었사옵니다.”

곤의 옆에 앉으며 량이는 그의 눈치를 살짝 보았다.

“…….”

무표정이다. 헌데 그 표정이 어째 마음을 놓이게 한다.

“으음, 아니에요. 주상도 이제 막 오셨어요. 콜록.”

대비는 기침을 하며 차를 음미하고 있는 곤을 보다 량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많이 미령(靡寧-어른의 몸이 병으로 편치 못함.)하신 것이옵니까?”

량이는 대비의 안색(顔色)을 살피며 물었다.

“콜록, 괜찮습니다. 가벼운 고뿔이에요.”

허나 말과 달리 며칠 새, 얼굴에 수척해 보인다.

“살피지 못하여 송구하옵니다.”

“아이고, 호호호. 이 늙은이가 중전을 걱정시켰네 그려.”

“풋!”

대비의 말에 곤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코웃음을 쳤다.

“…….”

량이는 한쪽 입꼬리가 비딱하게 올라간 곤의 옆모습을 곁눈질로 힐끔, 보다 이내 고개를 바로 해버린다.

“허허허…… 차 드세요. 중전.”

대비는 좀 전 기분 좋은 웃음과 비교되는 민망한 웃음을 보이며 차를 권했다.

“예, 마마…….”

량이도 어색하니 표정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헌데,

‘윽…….’

오른손으로 찻잔을 들던 량이는 미간을 찌푸리고 만다. 손목이 아팠다.

얼른 왼손으로 찻잔을 받쳐 든 량이는 낯빛을 가다듬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허나 그런 그녀의 표정변화를 대비는 이미 보았다.

“손목을 다친 게요, 중전?”

“예? 아, 그것이…….”

량이는 손목을 감은 천이 보였음을 깨닫고 찻잔을 빠르게 내려놓았다.

“어찌 된 것입니까?”

재촉되는 물음에 량이는 저에게로 향해 있는 곤의 시선을 느끼면서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층대(層臺)를 내려오다 그만 미끄러져 넘어졌나이다. 하오나 크게 상(傷)하진 않았사옵니다. 심려(心慮)마옵소서.”

대비가 더 묻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럴 대비가 아니다.

“아랫것들은 무얼 했기에…….”

“제 불찰(不察)에 생긴 일이옵니다.”

량이는 강해진 곤의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 괜찮은 거지요?”

“예, 마마.”

“…….”

곤의 시선이 거두어졌다. 휴우, 안도의 숨을 내쉬는 량이. 하지만 그런 그녀의 뒤통수를 치듯 대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콜록, 주상. 중전에게 너무한 것이 아니요? 미뤄진 합방에 대해 별 말씀도 없으시고…….”

얼마 지났다고 또 합방 타령인가.

“…….”

곤은 아예 답도 하기 싫다는 듯 차만 마실 뿐이다.

“……마마, 시간이 많이…….”

“음, 이 늙은이는 많지 않아요.”

대비는 량이에게 푸근하지만 고집 있는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정말 할 말 없게 만든다.

“……미령(靡寧)하시온데 무리하지 마시고 편히 쉬시옵소서.”

그런 대비의 말을 막는 곤이다.

그는 제 할 도리 다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미련 없이 방을 나가버린다.

**

‘덜컹.’

전각문이 열리고 발소리가 들린다.

“…….”

곤은 무심히 하늘을 보다 고개를 바로 한 다음, 천천히 대비전을 벗어났다.

작은 발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곤은 몸을 훅, 돌렸다.

“정말…….”

갑작스레 맞닥뜨린 곤의 얼굴에 량이는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

“…….”

말없이 서로 쳐다보는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른다.

곤은 눈길을 량이 두 눈에서 아래로 내려온다.

인중(人中)과 턱의 사이, 그 어느 곳에서 멈칫하는 눈길이 당의 자락까지 내려왔다가 도로 올라왔다.

“정말 넘어져 다친 것이 맞는 것이오?”

곤은 의심을 담아 물었다.

“그야 물론…….”

량이는 당황하여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다.

“높은 데서 떨어진 것은 아니고?”

곤은 량이가 아닌 옆의 마 상궁을 슬쩍 보며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아니옵…….”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소인이 중전마마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사옵니다.”

마 상궁은 안 되겠다 싶어 앞으로 나선다.

“…….”

곤은 마 상궁의 정수리에 앉은 검은 족두리를 물끄러미 보다 량이에게 시선을 돌린다.

“하긴…… 그럴 리 없지.”

곤은 하고 있던 제 생각이 우습다는 듯 코웃음을 친다.

“심려 끼쳐 드려 송구하기 그지없사옵니다.”

량이는 곤의 말에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심려라…… 핫, 과인은 그런 거 한 적 없소.”

곤은 터무니없는 소리하고 있네, 한다.

“……허면, 신첩은 이만…….”

량이는 옅게 피어나는 서운함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움직였다.

빨리 그에게서 벗어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허나 곤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 옆을 지나쳐 가는 량이의 모습을 계속 따라가던 눈길, 이윽고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이번도!”

“…….”

멈춘 발걸음, 량이의 몸이 돌려진다.

무슨 일입니까, 하는 량이의 얼굴을 보며 곤은 그녀에게 한 발 다가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