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그 장미는 무척 아름다웠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장미보다 매혹적이었다.

유혹의 향기에 이끌린 자들은 그 장미에 현혹되고 말았다.

그들은 점점 탐욕에 눈이 멀어 갔다.

기어이 그것을 꺾어 손에 쥔 자는 그 대가로 자신의 딸을,

장미의 주인인 야수에게 보냈다.

고독의 성에 홀로 사는 냉혹하고 위험한 야수.

그의 성에 갇혀 버린 아름다운 제물.

장미보다 고귀한 그녀는 야수를…….

6년 만에 밟아 보는 한국 땅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떠날 때와 달라진 것 없는 메마른 땅과 푸른 하늘. 여전히 타인에게는 무관심한 사람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두려움에 눈물을 글썽이며 홀로 비행기를 탔던 16살 소녀가 어느새 훌쩍 커버렸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자신을 기다리는 최 비서를 피해 라운지에 들러 아이스커피를 사 마실 만큼, 여유롭고 능청스러워졌다는 것 정도였다.

테이크아웃한 커피를 마시며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선 홍주는 없어진 자신을 찾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검은 정장의 사내들을 무심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쪼오옥. 빨대를 타고 올라온 냉커피가 입 안을 씁쓸하게 물들였다. 표정 변화 없이 평온하게 걸음을 옮긴 홍주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최 비서 앞에 섰다. 하지만 최 비서는 자신이 그토록 찾고 있는 홍주가 눈앞에 있는 사람이란 걸 단박에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잠깐 ‘이건 뭐야?’ 하는 눈으로 홍주를 힐끔거리곤 이내 대화에 열중했다.

“네. 9시 10분에 도착하는 비행기에 탑승한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8시 40분부터 게이트 앞에 대기 중이었습니다만. 홍주 양이 나오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네. 더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심각하게 통화를 끝낸 최 비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홍주가 무덤덤하게 지켜보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바닥으로 누르던 최 비서가 제 앞에서 알짱거리는 홍주를 신경질적으로 쏘아보았다. 안 그래도 갑자기 사라진 홍주 때문에 바짝 열이 올라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여자 하나가 앞에 버티고 서서 커피를 쪽쪽거리며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자신을 보고 있었다. 짜증이 확 치밀었다.

“뭡니까?”

곱지 않은 시선과 불쾌함이 한껏 묻어나는 목소리로 최 비서가 물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맛나게 커피를 들이켠 홍주가 빨대를 놓고 싱긋이 입가를 끌어 올렸다. 선 분홍빛 입술이 싱그러운 미소를 만들어 냈다. 그를 바라보는 최 비서의 미간이 좁아졌다. 미소 띤 입술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설마.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최 비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이. 미스터 최.”

커피를 들지 않은 홍주의 손가락이 사라락 리듬을 타며 인사를 했다. 익숙한 목소리에 최 비서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홍주를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여……홍주?”

최 비서가 홍주의 이름을 무의식중에 내뱉었다. 그는 홍주의 이름 뒤에 호칭을 붙이지 않았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그만큼 지금 홍주의 모습이 최 비서에게는 충격적이었다. 홍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최 비서의 목으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눈에 확 띄는 연분홍빛 머리와 그와 맞춘 듯한 인디언 핑크 미러 선글라스. 안에 톱을 입었지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새하얀 시스루 블라우스와 무릎이 다 보이는 화끈하게 찢어진 청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신고 있는 샌들. 그야말로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차림새였다.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그런 옷차림이기도 했다. 이러니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지.

“홍주 양, 대체 왜.”

“왜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또다시 마른침을 삼키는 최 비서를 홍주가 해맑게 쳐다봤다. 최 비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는 천진난만한 표정이었다.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지만 지금 홍주의 태도는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절대 최 비서가 놀란 이유를 모를 리가 없었다. 최 비서가 정신을 수습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일깨우기 위해 홍주에게 짐짓 심각한 투로 물었다.

“오늘 10시 30분에 일레이 호텔에서 약속 있는 건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죠.”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홍주를 보며 최 비서가 급한 숨을 삼켰다. 알면서 저런 복장으로 왔다니. 도저히 홍주가 제 정신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어떤 자린지 알고 계십니까?”

재차 추궁하듯 묻는 최 비서를 빤히 쳐다보며 홍주가 엷게 웃었다. 미소만 띤 채 이번에는 입을 열지 않는 홍주로 인해 최 비서의 속이 부글거렸다. 최 비서가 걱정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이동하면서 대책을 세워 보도록 하죠.”

시간이 촉박했다. 오늘 홍주가 만날 상대는 약속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렵게 마련한 자리인 만큼 절대 눈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복장 자체도 문제였지만, 시간에 늦는 건 더 큰일이었다. 그래서 최 비서는 일단 차로 이동하면서 최대한의 대책을 강구할 생각이었다.

급한 마음으로 빠르게 발을 옮기며 최 비서가 근처를 배회 중이던 직원들을 손짓으로 불러들였다. 느긋이 최 비서의 뒤를 따르던 홍주 주변을 그들이 에워쌌다. 경호라는 명분을 앞세운 감시였다. 예전 같으면 주눅이 한껏 들어 움츠린 채로 죄인처럼 걸었을 홍주가 지금은 당당하게 마치 연예인처럼 즐기며 걸었다.

피하지 못한다면 즐겨라.

언젠가부터 홍주의 생활 신조가 된 말이었다. 이왕 제멋대로 살지 못하는 인생이라면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즐기며 살아야 덜 억울하지 않을까. 그래야 더 아프지도 슬프지도. 죽을 만큼 괴롭지도 않을 테니까.

공항 문을 나서자 바로 앞에 때를 맞춰 차가 멈춰 섰다. 줄줄이 늘어선 차의 맨 앞에 최 비서가 홍주를 태웠다. 최 비서가 뒷좌석에 그녀를 앉히고 보조석에 올라타자 차가 출발했다.

“찾았습니다. 지금 이동 중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간단한 보고를 하고 또다시 어딘가로 최 비서가 전화를 걸었다.

“지금 호텔로 홍주 양에게 맞는 옷, 신발, 백 풀 세트로 준비해서 보내. 20분 내에 도착한다.”

정신없이 바쁜 최 비서와 달리 뒷좌석의 홍주는 무척 편안했다. 그녀는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녀의 일탈은 호텔에 도착하는 순간 끝날지도 모른다. 지금의 모습은 지워지고 잘 가꾸어진 인형처럼 만들어질 것이다.

“하아, 지루해.”

오랜만의 귀국. 그에 대한 감흥 따위는 홍주에겐 없었다. 그리움이나 반가움이란 단어를 떠올릴 그 어떤 것도 이곳엔 존재하지 않았다. 떠날 때도 혼자였고, 다시 돌아온 지금도 그녀는 혼자였다. 거주지만 바뀌었을 뿐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무료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그녀의 눈에 약속 장소인 호텔이 들어왔다. 피식. 싱거운 웃음이 닫힌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오늘 홍주는 이곳에서 선을 보기로 되어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가족이 아닌 낯선 남자를 먼저 대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