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은은 눈을 감고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차가운 겨울의 밤하늘로 오래된 구원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구속과 묶임에 절망했던 노예들의 노래에서 기원했다는 오래된 찬송가는 애절한 음색을 띠고 있었다. 끊어질듯하면서도 강하게 이어지는 목소리가 맑고 구슬펐다. 감은 여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마크는 반쯤 내리뜬 시선으로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긴 여운을 남기며 노래가 끝났다. 사람들에게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박수 소리도 끝이 날 때쯤 마침내 여은이 눈을 떴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눈앞의 풍경이 아닌 딴 곳을 담고 있는 듯 아련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크는 여은의 흔들리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활달하고 따뜻한 평소의 그녀가 아닌 여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녀는 아파 보였다. 지켜보는 마크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여은.]'그의 낮은 부름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린 여은은 일 달러짜리 지폐를 찾아 주머니를 뒤졌다. 마크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대신 지폐 한 장을 노래를 부른 여자에게 건넸다.'“감사합니다.”'도대체 얼마를 건넨 것인지 지폐를 받아든 여자의 눈이 일순간 커지더니 노랫소리만큼 우렁찬 목소리로 터져 나왔다. 곧이어 또 다른 노래의 반주가 시작되었고 마크는 아직도 반쯤 넋이 나가있는 여은의 손을 잡아끌었다. 노랫소리와 사람들의 인기척이 조금씩 멀어졌다. 둘의 걸음을 따라 마크의 담배 연기가 긴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한참을 걸어 둘은 인적이 드문 호숫가 한편에 멈춰 섰다. '앙상한 가지 위로 드리워진 자그마한 색색의 등이 싸늘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화사하게 반짝였다. 여은은 파카에 두 손을 넣은 채 반짝반짝 빛을 내는 장식등을 올려다보느라 고개를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끊어질 듯 희미하게 어둠을 타고 흘렀다.'[난 저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언젠가는 나도 죄를 용서받고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식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영원한 안식? 그건 죽음 아닌가?]'[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죽는 순간까지도 죄의식과 고통에 괴로워한다면 죽어서도 편안한 안식을 찾을 수 없지 않을까요?]'여은의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깜깜한 밤하늘로 향한 그녀의 작은 얼굴이 가로등 불빛 아래 하얗다 못해 파리하게 빛났다. 그녀의 검은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물기를 머금고 반짝였다. 작은 목소리마저 물기를 머금고 젖어 있는 것 같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입 안이 썼다. 마크는 나무 둥치에 기대서 또 다른 담배를 하나 빼어 물고 불을 붙였다. '[그럼 당신이 생각하는 영원한 안식은 뭐지?]'깊게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마크가 물었다.'[구원. 죽기 전에 구원 받아야 죽어서도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아요.]'[구원이라……. 신앙이 있는 줄은 몰랐군.]'[훗, 아니요. 난 교회도 안 다니고 딱히 믿음이나 신앙이 있는 건 아니에요.]'여전히 그를 돌아보지 않은 채 여은이 희미하게 웃었다.'[신을 믿지 않는다면 누가 당신을 구원하지?]'[내가 생각하는 구원은 종교적인 것과는 조금 달라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지나온 시간들에 대한 절망이나 슬픔보다 커지는 것…… 내가 기다리는…… 구원이에요. 언젠가는 지금 내가 살아가는 시간에 대한 기쁨과 다가올 날들에 대한 설렘이 과거의 아픔보다 더 커지는…… 그런 구원의 순간이 내게도 오지 않을까요?]'여전히 하늘 위로 들려진 채 힘겹게 웃는 여은의 얼굴이 아파 보였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녀의 따뜻하고 밝은 모습 어디에 이런 위태로운 면이 감춰져 있었던 걸까. 새하얀 파카를 입은 그녀의 작은 몸이 금방이라도 불빛 아래에서 바스러져 사라질 것만 같았다. '마크는 문득 깨달았다. 첫 만남부터 여은의 무엇이 그토록 자신을 사로잡았는지를. '밝은 모습만큼이나 겹겹이 가려진 어둠과 회색빛 그림자가 그녀 안에 녹아 있었다. 그녀에게는 삶이 만들어 놓은 고개를 넘고 강을 건너며 고통과 아픔을 인내하며 끌어안은, 진정 강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영혼의 깊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온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로 인해 언제라도 쓰러져 버릴 것 같은 위태로움이 덧씌우듯 자리하고 있었다. 그 깊이가, 그 불안정함이 그를 사로잡고 매혹시켰다.'갖고 싶다. 이 여자가 욕심난다. 이 여자의 까만 두 눈을 마주한 그 순간부터 그의 안에서 조금씩 부피를 더해 가던 욕심이 순식간에 집요한 열정과 사나운 탐욕으로 탈바꿈했다.'마크는 이제는 숫제 까만 밤하늘을 보고 빙글빙글 돌고 있는 여은의 앞으로 다가가 어깨를 잡았다. 멈춰선 여은의 시선이 그의 눈빛과 마주쳤다. 역시나 눈물이 그렁거리는 검은 눈동자는 속으로 울고 있는지 일렁거리고 있었고 꼭 깨문 아랫입술이 아파 보였다. 마주한 그의 시선이 한층 어둡게 빛났다. 그는 손을 들어 올려 깨물린 입술을 천천히 쓰다듬었다.'[그 구원이라는 것, 찾게 되면 나에게도 알려줘. 당신이 말하는 구원, 나도 알고 싶어졌거든. 내 곁에 있어. 내 곁에서 안식을 찾고 구원을 얻어. 그러고 나서 당신이 나를 구원해 줘.]'낮게 가라앉은 거친 목소리가 여은의 의식을 사로잡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비친 그녀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곁에 있으라니…… 무슨 소리에요?]'[말 그대로.]'차가운 불꽃을 품은 회색빛 눈동자가 그녀를 집어 삼켰다. 뜨거운 입김이 여은의 얼어붙은 얼굴 위로 와 닿았다. 여은은 급히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가 더 빨랐다. 그가 여은의 허리를 잡아 당겼다. 거칠게 부딪힌 그의 가슴은 뜨겁고 단단했다. 다가온 그의 입술은 차갑고 거침이 없었다. '“휘익!”'누군가 지나가며 그들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여은이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놓아주기는커녕 마크는 벗어나기 위해 뒤척이는 그녀의 몸을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가 한 손을 올려 여은의 턱을 아프게 잡아 벌였다. 그리고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거칠게 파고들었다. '두려움이 여은을 덮쳤다. 그녀의 저항이 거세어지자 마지못한 듯 마크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뿌리치듯 그의 품을 벗어난 여은은 무작정 뛰었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렸다.'겨울밤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마크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는 조금씩 사라져가는 그녀의 온기를 더 오래 간직하기 위해 손을 꼭 쥐었다.'“김여은. 이렇게 등을 보이고 내게서 멀어지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음에는 절대 놓아주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