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청야담 이야기]

#1화

초여름을 맞이하여 궐내엔 여름 맞이 연회가 펼쳐지고 있었다.

정리된 넓은 정원, 설치된 차양 아래 긴 테이블 위엔 제철 꽃들과 함께 별식이 차려졌다. 왕실 사진사는 연신 테이블을 찍으며 감탄했다. 왕실 홍보지에 실릴 예정이었다.

자리한 이들의 면면을 볼라치면 유수의 문화인들에다 정재계 인사들, 그리고 왕실의 일원들. 각기 다른 그들이나 한결같은 반응이 있었으니 탁자에 놓인 요리들에 대한 감탄사가 그것이었다.

“늘 그렇지만 청야담 숙수들의 손맛은 대단합니다.”

“한 번 맛을 볼라치면 몇 개월 전 예약해야 하니 그 점이 아쉬워요.”

“제철에 맞는 미각을 맛볼 수 있는데다 청야담을 이끄시고 계신 궁 여사님의 반듯한 미식은 더할 나위 없다죠.”

모두의 칭찬은 오른쪽에 자리한 궁 여사에게 모아졌다. 대대로 물려받은 왕실의 손맛을 재현해 내는 데 탁월한 솜씨가 있는 청야담 3대 주인이었다.

더욱이 오늘날, 급박하게 변화된 현실에서 왕실의 맛에 있어선 청야담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렇기에 계절마다 왕실이 주관하는 연회, 특히 청야담의 숙수들을 초빙한 연회라면 초대장을 받기 위한 로비까지 펼치고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훌륭하니 다음 대의 청야담 주인에 대해서도 궁금하군요. 아직은 어리죠?”

“여간내기가 아니란 소문입니다. 영특함은 둘째로 또래와는 달리 속이 깊다면서요.”

“미리미리 줄 서야겠어요. 귀엽고 사랑스러운 손녀분이시니 성장한 뒤가 벌써부터 궁금하군요.”

“아직은 이릅니다.”

궁 여사는 하나뿐인 손녀의 칭찬 아닌 칭찬을 만류했다. 그럼에도 모두는 궁 여사의 친손녀를 진심으로 궁금해했다. 벌써부터 연을 맺자는 둥 입바른 소리들에 궁 여사의 깐깐한 눈빛이 다소 부드럽게 변했다.

“한소진. 이제 열 살입니다만 과장을 보태자면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부단히 노력한 바 훗날 부족한 저를 대신해 잘 꾸려 갈 겁니다. 저 역시 기대가 매우 크답니다.”

“역시! 어디 있죠, 손녀는?”

“이곳 정원을 구경하고 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 아드님도 데려올 것을. 다음에 꼭 뵈어요, 궁 여사님.”

정무관 부인은 벌써부터 소진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렇지만 궁 여사와 나란히 자리한 이 왕비. 그녀가 보이는 관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왕비는 아주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나중에 우리 신제와 소진을 만나게 하면 어떨까요.”

“글쎄요. 아직은.”

“그렇지요. 아직은.”

둘은 교묘히 말꼬리를 돌리면서도 공통된 뭔가를 담고 있었다. 이 왕비는 왕실에서 두 번째로 맞이한 정궁이었다. 병약한 첫 번째 왕비가 돌아가시기도 전, 왕의 눈에 들어 후궁 역할을 했다는 소문이 있으나 지금은 누구도 그것에 대해선 함부로 입 열지 못했다.

더욱이 첫 번째 정궁 소생의 왕자가 세자가 된 만큼 이 왕비 소생의 두 번째 왕자의 입지는 상당히 모호한 상황이었다.

그것을 주도한 이가 수상이란 소문 또한 자자했다. 그러나 지금은 정치적 상황을 논하는 자리가 아닌 만큼 떠올릴 필요는 없었다.

계속하여 웃음꽃과 함께 풍성한 연회는 이어졌다.

그 즈음, 소진은 색 고운 한복 차림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정원 구석구석을 구경 중이었다. 멀리선 소진을 챙기는 경산댁이 지켜보는 상황이니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소진은 흐드러지게 핀 불그스름한 종 모양 꽃무더기 앞에 웅크렸다.

“이 꽃은 금낭화야.”

소진은 잎은 어긋나고 깃 모양으로 갈라진 줄기 꽃에 입맛을 다셨다.

“금낭화채가 꽤 맛난데. 내일 할머님께 만들자고 할래.”

쉴 새 없이 종알종알, 금낭화채는 고산에서 나는 멧나물을 데쳐 기름소금에 무친 것이다. 금낭화를 보고 금낭화채를 연상한 것이다. 이렇듯 늘 한식과 연관된 학습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특히나 고집 센 눈매에 오뚝한 코, 앵두라진 입술로 열심히 집중할 때면 그리도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다음으로 소진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야트막한 연못 위의 반월로 놓인 수표교였다. 오래된 돌다리이기에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소진은 수표교로 작은 발을 올렸다. 그런데 딱딱한 느낌이 아니었다.

“어?”

휘둥그레진 소진은 제 발을 내려다보며 다시 한 번 수표교에 발을 꾹 눌렀다. 마찬가지였다. 푹신한 스펀지를 밟았다 할까. 아니면 모래, 진흙, 뭐가 되었건 촉감이 달랐다.

“돌이 부드럽네.”

놀랄 일은 이것뿐 아니었다. 갑자기 실바람이 분다 싶었다. 한데 소진이 수표교로 몇 발자국 내딛는 것과 동시에 바람의 세기가 달라졌다.

바람은 물결이었다. 밀려나고 밀려들며 급기야 세찬 바람으로 소진의 옷자락을 마구 날리게 했다.

“경산댁! 경산댁!”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았다. 소진은 눈을 꼭 감고는 마구 소리를 질렀다. 이제 바람은 소진의 작은 몸을 타고 돌았다.

“경산댁!”

다시 한 번 발악하듯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풀썩. 소진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람이 사라졌다. 그제야 감은 눈을 뜬 소진은 수표교의 난간을 꼭 잡고 일어섰다.

그런데 소진은 제 눈을 비볐다. 눈에 뭔가가 들어가서가 아니었다. 눈앞에 펼쳐진 곳, 같으나 다른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