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날 이렇게 막 대하는 여잔 네가 처음이야.-

한때 대한민국을 접수했던 로맨틱 드라마 속 대사다. 안하무인 개매너 재벌남이 당돌 과격 순진녀에게 던지는 이 오글거리는 멘트. 금 수저 물고 태어난 것도 모자라 극강 비주얼까지 장착한 우리의 재벌남이 가난하고 볼 거 없는 평범 여주에게 꽂히는 역사적 순간이다.

“저건 드라마니까 가능한 상황인건 알겠는데 그래도…… 멋있다.”

새벽 두 시. 손님들도 거의 빠져나간 곱창 집에서 세 여자가 곱창을 안주 삼아 소주를 홀짝였다. 윤 선생은 아까부터 TV드라마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드라마는 환상이잖아. 현실에선 꿈꿀 수 없는 일들을 꿈꾸게 해주는 판타지.”

김 선생까지 홍조 띤 얼굴로 재벌 역 남자 배우를 황홀하게 바라봤다. 삼십대 초반의 아직 미혼인 이 두 여선생들은 나와 같은 입시 단과학원 강사들이다. 늦은 저녁 강의가 끝나고 나면 우리 셋은 학원 근처 식당에서 이따금씩 소주잔을 기울이곤 했다. 각자 친구들을 만나기엔 너무 늦은 시간. 힘든 하루 일과를 무사히 끝내고 나면 한 잔 술로 스트레스를 달래고 재충전하고 싶은 법이다.

이들은 나보다 두 살 위인 서른둘 동갑으로 다들 명문대 출신에 경력도 오래된 베테랑급 강사들이다. 서울 시내 중위권 국문과 출신으로 임용고시, 언론고시, 공무원 시험까지 도전했다 죄다 미끄러지고 28살에 정신 차려 학원 계에 진출한 나와는 비교불가의 고수들이다.

“꿈이라도 좋아. 저런 재벌남이랑 손가락이라도 한번 스쳐봤으면.”

“내 말이. 전생에 나라를 구한들 저게 가능하겠냐고.”

“지금이라도 나라 한 번 구해봐?”

“한 번 가지고 되겠어?”

이들의 수다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듣기만 하던 난 앞에 놓인 소주를 원샷 하고는 잔을 테이블 위에 깨질듯이 툭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잘 익은 곱창을 입 안에 넣고는 마치 원수 대하듯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그들은 말을 멈추고 의아한 표정으로 날 빤히 응시했다.

“언니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오해하지 맙시다. 재벌들은 절대 저런 결혼 안 시켜요. 자기들 우월한 피에 천한 무수리 피가 섞이는 걸 원치 않는다고요. 사랑요? 그딴 거 카드 정지 시키고 차만 뺏어도 그냥 아웃이에요. 울고 불며 내 사랑은 너뿐이고 어쩌고 해도, 변하지 않는 건 오직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뿐이라고요.”

난 비장한 모습으로 주저리주저리 열변을 토했다. 취기가 오르면 감정은 더욱 증폭되기 마련이다.

“장 샘, 예전에 재벌이랑 사귄 적 있어?”

윤 선생의 진지한 물음에 난 움찔했다.

“네?”

“왜 이리 심각해? 꼭 경험담처럼.”

김 선생까지 거들었다. 난 과장된 웃음을 흘리며 화제를 돌렸다.

“경험은 무슨. 뭐 그냥 그럴 거 같다는 얘기죠.”

다행히 이들은 더 이상 캐물으려 하진 않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질문한 게 아니니까.

“평범녀가 재벌가랑 엮이는 일은 없지. 없는 걸 알기 땜에 판타지인 거고. 솔직히 저런 건 바라지도 않아. 그냥 진상들이나 안 꼬이면 다행이지. 서른 넘기니 꼬이는 건 죄다 어디 하자 있는 놈들뿐이고. 아니 나랑 동등하거나 아주 쬐끔, 쬐에끔 나은 남잘 만나겠다는 게 그렇게 무리한 욕심인거니?”

“우리 나이엔 이젠 욕심이야.”

윤 선생의 말에 김 선생이 자포자기한 음성으로 쐐기를 박았다. 우리들은 동시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니 우리 정도면 괜찮지 않아? 다들 어디 가서 빠지는 얼굴도 아니고. 누가 우리들을 서른 넘은 여자로 보겠냐고?”

윤 선생의 자위는 차라리 눈물겹다. 누가 봐도 조신하고 청순한 스타일의 윤 선생이나 키도 크고 몸매도 예술인 김 선생은 확실히 서른 넘은 여자로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요새 누가 제 나이로 보이게 하고 다니나? 마흔 넘은 봄날 아줌마가 피트니스로 이십대 못지않은 탄탄한 몸매를 선보이는 세상이다. 서른은 이십대로, 마흔은 삼십대로 보이는 시대. 문제는 그들을 진짜 이십대와 붙여놓으면 게임이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어려 보여도 세월의 흔적은 남는 법. 멀리 갈 것도 없다. 학원에 다니는 풋풋한 여고생과 재수생들 사이에서 우리는 그저 늙은 쭈구리일 뿐인 거다.

“안 되겠다. 우리 딴 거 보자. 사장님, 여기 채널 좀 바꿔주세요.”

곱창집 사장님은 아예 윤 선생에게 리모컨을 건네주었다. 윤 선생은 리모컨을 받아 채널을 마구 바꿔댔다. 드라마에 스포츠에 음악에 코미디까지 화면은 휙휙 바뀌었지만, 마땅히 끌리는 건 없었다.

“어, 저거 좀 봐. 신유찬이야.”

화면은 뉴스 채널에서 돌연 멈췄다.

“신유찬? 황제그룹?”

김 선생도 호기심을 보이며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앵커는 삼 년 전 타계한 황제그룹 신정식 회장의 큰아들 신유찬 전무가 지난 분기 최고 실적을 올렸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뒤이어 몸에 딱 맞는 감색 정장을 차려입은 신유찬의 인터뷰 모습이 화면을 보란 듯이 채웠다.

난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뭘 해도 안 되는 날이 있고,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지지가 않는 순간이 있는 법이다. 거지발싸개 같은 신데렐라 드라마가 내 빈정을 상하게 하더니 이젠 아예 그 당사자가 턱하니 나타나 내 뒤통수를 친다. 신유찬 이 빌어먹을 개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