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홍매.'은밀히 수하를 시켜 호주에서의 청아의 행적을 낱낱이 캐낸 적일단은 수하가 가져온 남녀의 초상이 그려진 그림을 유심히 훑고 있었다. '도봉현의 태수 양재기를 죽인 용의자로 현상금이 걸렸던 두 남녀가, 뜻밖에도 사내는 문혜의 호위대장과 닮았다는 것과 여인은 청아의 모습을 닮았다는 사실이 묘하게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묵운대의 위호대장이라?”'“예, 단주. 공주께서 송월객잔에 머물렀을 때, 비은 역시도 그곳에서 묵은 줄로 압니다. 양태수가 자객에게 변을 당한 건 그로부터 이틀 뒤였고 그 후, 이들의 방이 붙었다가 다시 전량 회수되었다고 합니다.”'“그래?”'“예. 하옵고, 송월객잔에서 비은이 부랑배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소동이 있었다는데, 그때 공주의 위호대장이 도움을 줬었다고 들었습니다.” '조용히 수하의 말을 듣고 앉았던 적일단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다시금 그는 예리한 눈길로 청아의 모습을 닮은 초상화와 걸륜의 초상화를 훑고 들었다. '“흠.”'걸륜의 초상화를 보던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씰룩거렸다. 사내의 모습에서 청아의 몸에 찍혔던 붉은 인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녀의 어깻죽지에 박힌 상처 또한.'적일단은 거칠어져 오는 숨결을 달래가며 조용히 손에서 초상화를 내려놓았다. 굳이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청아에게 벌어진 일련의 일들을.'양재기의 별저에 침투한 신원불명의 자객은 둘이었고 공교롭게도 청아와 문혜공주의 위호대장이 용의선상에 올랐다. 수배 방이 곧 회수되었다지만 그의 기민한 감각은 자객의 정체가 그 둘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같은 목적을 가지고 한밤중 양재기의 별저에 침입한 둘, 그리고 송월객잔에서부터 엮인 그들의 인연. '하면, 둘의 사이에 공존하는 그 어떤 것이 분명 있을 터. '여태 여인으로서의 삶에 빗장을 꼭꼭 치고 살아왔던 청아가 하루아침에 선뜻 낯선 사내를 몸과 마음에 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골똘히 잠겨든 적일단의 머릿속으로 설핏 청아의 말이 지나갔다.''― 반쪽짜리인 저를 완전하게 해줄 사람이 진정한 주인이지요.''자신에게 맡겼던 증표를 받아들고 감격에 떨던 그녀.'갑자기 더운 열기가 훅 몰아쳤다. '‘하, 이자란 말이더냐! 네 영혼을 앗아간 자가!’'질투의 열기로 달아오른 가슴을 누그러뜨리는 사내의 표정은 빙설처럼 차갑게 굳어지고 말았다.'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허락 없이 제 멋대로 자신의 품을 날아가 버린 그 작은 새를.'홀로 된다는 것. 그 아픔이 어떤 건지 잘 알기에 그 아이를 품은 것이었다. 둥지도, 날개도 없던 그 작고 여린 새를. '하니, 가르쳐 줄 것이었다. '연정! '그따위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찰나에 타오르는 불꽃에 지나지 않는단 것을. ''교화의 의술이 효과를 발휘한 덕인지 상처가 빨리 아문 청아는 모처럼의 망중한을 보내며 글겅이로 초광의 털을 빗겨주고 있었다. 낮게 깔린 잿빛 구름 틈새로 간간히 내리치는 짤막한 햇살에 초광의 흑갈색 갈기가 반들거리며 빛났다.'새 주인의 손길이 그새 익숙해졌는지 그녀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날렵하게 잘 빠진 준마는 이따금 검고 긴 꼬리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푸르르 거리는 소리를 흘렸다. '털을 다 빗긴 청아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매끈하게 올라붙은 초광의 어깨경사를 손으로 다정하게 쓸어줬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매끄러운 털의 감촉을 따라 지난 시간들이 한 올씩 되살아났다. ''― 이놈을 타고 가도록 하오.'― 나를 생각한다면, 그리 하오.''여전히 귓가에 여음으로 맴돌고 있는 그의 음성. '그리 오래 전도 아닌데 왠지 아득해져버린 기분이다. '가만히 털을 쓸던 청아는 입가에 쓸쓸한 미소를 묻힌 채 웅얼거렸다.'“주인이 보고 싶지 않니?”'큼직한 눈망울을 끔벅거려가며 초광이 답하듯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청아는 그런 초광의 잔등에 뺨을 기댄 채 망연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물빛에 달이 어리듯 어느새 눈가엔 스르르 그의 잔영이 차왔다. '‘무명…….’'걸륜을 떠올리며 청아는 씁쓸히 읊조렸다. 뽀얗게 핀 먼지바람 속에서 차츰 멀어지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연정의 무게에 흔들릴까 봐 애써 제대로 뒤조차 보지 않고 달려왔던 길. 점점 멀어지던 그와의 거리, 점처럼 그 자리에 우두커니 박힌 채 저를 지켜보고 섰던 바람 같았던 그 사내.'가만가만 쓸고 있던 초광의 잔등에서 손을 내린 청아는 한숨을 흘리며 교월처럼 눈을 빛냈다. 그의 모습이 눈에서 희미해지기 전에 한번 더 만나보고 싶었다. 오랜 시간 이름을 잊고 살아온 그에게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그래서 그땐 그의 진짜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다. 마찬가지로 저의 이름 또한. '“그러고 보니 낯선 말이구나.”'어느새 다가왔는지 교화가 초광의 짙은 털빛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제야 청아는 상념을 털어내듯 기대섰던 초광의 등에서 몸을 뗐다.'“월영은 어쩌고?”'“잃어버렸어요.”'“저런, 어쩌다!”'혀를 끌끌 차며 보는 교화에게 청아는 씁쓸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교화가 애석한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가며 초광의 갈기를 한번 쓰윽 어루만지고 들었다. '“누군지 몰라도 월영을 손에 넣었다니! 대단한 횡재를 했겠구나.”'“저보다 나은 주인을 만났길 바라야겠지요.”'“그래. 한데 보아하니 이 녀석도 계보 있는 귀한 놈인 것 같은데?”'청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다시금 걸륜의 모습이 짧게 스쳐갔다. 교화의 눈길이 그런 청아의 입술 끝에 와 쏠렸다. 붉은 입술 새로 드러난 가지런한 치아가 박씨같이 하얘 보였다. '‘참으로 곱구나. 그래서 그가……. 하아…….’'짧은 순간, 저도 모르게 넋 나간 듯 청아를 보고 섰던 교화는 가슴 한곳이 찌릿해 오는 기분을 느끼며 어깨를 응등그리고 말았다. 어떻게 이 아이에게 끌리지 않을 수 있을까? 사내라면 누구라도. 그 역시도 뜨거운 심장을 지닌 한낱 사내인 것을. '마땅히 가지고 싶을 터였다. 간절히 원할 터였다. '저도 모르게 스멀거리고 돋는 청아에 대한 시투에 교화는 씁쓸하게 차오는 고소를 목젖으로 꿀꺽 넘겼다.'“단주께서 찾으신다.”'“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