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잔뜩 피어 있는 끝없는 꽃밭에서 윤희는 누군가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금발머리와 푸른 눈을 가진 외국인으로서 백마 위에 앉아 있었다. 윤희는 위로 쳐다보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고개가 아픈 줄도 몰랐다.'[“당신은 누구세요?”]'[“난, 당신을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 찾아온 왕자입니다.”]'윤희는 요즘 같은 21세기에 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말이 황홀하게 들렸다.'[“정말로요?”]'[“그럼요. 윤희 공주. 그대는 나의 운명의 배필입니다. 난 그대를 만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느끼함이 너무 지나쳐 녹은 버터처럼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좋다며 입가에 침을 흘리는 그녀였다. ‘침’이라니. 이 와중에 웬 침? 윤희가 그렇게 생각을 하는 동안 그 왕자란 사람은 멋있는 백마에서 훌쩍 뛰어내려 그녀 앞에 섰다.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얼굴을 들어 자신을 보게 하였다. 윤희는 푸르다 못해 시린 느낌에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그가 꽉 잡고 있어 그건 불가능했다. 그러면서 점점 다가오는 그의 입술에 자신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쓸며 침을 꼴딱 삼켰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의 입술은 그녀의 입술에 다가왔다. 그녀의 입술을 살짝 누른 그의 입술에서 프렌치 키스를 생각하던 그녀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자신의 입술과 얼굴을 핥고 있어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때, 눈앞에 보이는 하얀 물체 하나가 시뻘건 혀를 내밀며 얼굴로 다가왔다. 볼에 느낀 간지러움에 그 물체를 잡은 윤희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여기가 어디지?’'자신이 있던 곳의 호텔이 아닌 낯선 장소에 의아해하며 자기가 잡은 물체의 부드러움이 뭔가를 확인하였다. 자신이 잡았던 그 물체는 하얀색 털을 가진 귀엽고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는 말티즈였다.'[“어머나, 귀여워라. 너 때문에 아주 좋은 단꿈에서 깨어나 버리고 말았네. 넌 이름이 뭐니?”]'그녀의 말을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녀가 말을 하자 귀를 쫑긋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가 한참 좋은 때를 방해했구나. 아무튼 반갑다. 강아지야!”]'마치 우수에 젖은 듯 물기를 머금고 있는 말티즈의 까만 눈동자가 한국에 있는 자신의 여동생 준희를 떠올리게 했다. 친근감이 느껴진 그녀는 강아지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슨 일로 자신이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머릿속을 더듬었다. 하지만 기억에 없었다. 다만, 얼마 전부터 자신을 쫓아다니던 수상한 사람들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그들을 떠올리자 이 낯선 외국에서 어디에 있는 건지 의문이 생기며 갑자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여기 어디야? 나 이상한 곳에 있는 거 아냐? 무서워. 이대로 가족들 못 만나게 되는 거 아냐?”]'두려운 마음을 누르며 생각을 하던 그녀는 옛날 한국의 속담 중에 ‘호랑이 굴에 잡혀 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란 말이 생각났다.'[“그래. 정신만 차리면 되는 거야. 꼭. 제발. 내 정신아. 도망가지 말고 옆에 있어줘.”]'중얼거리던 윤희는 침착함을 되찾고 자신이 있는 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윤희가 자신과 놀아주던 손을 멈추고 눈으로 방안을 살피자 그 강아지는 팔쪽으로 다가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몸을 비볐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모른 척하고 자신이 있는 곳을 파악하기 위해 일단 눈으로 둘러보았다.'천장이 높고 방 안 가운데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누워있던 침대도 킹사이즈 정도이며, 사각의 모퉁이에는 건장한 기둥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 위엔 앙증맞은 캐노피가 걸려 있었으며 캐노피의 베일은 곱게 리본을 묶어 각각의 기둥에 흘러내리고 있었다.'[“도대체 여기는 어디야?”]'예사롭지 않은 방 안의 호화로움에 눈을 휘둥그레진 윤희는 침대에서 발을 내려 일어났다. '[“이런 화려한 장소에 날 왜 데려 온 걸까? 더구나 설마 이런 곳에 사는 사람이 나에게 무슨 볼 일이 있을까?”]'그녀는 계속 의문을 가진 채 방 안을 가로질러 눈에 보이는 창을 하나 열었다. 밖에서 상쾌한 바람이 안으로 불어 들어왔다.'창밖에 보이는 풍경이라고는 푸른 나무들과 그것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 밖에 없었다.'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알지 못하는 낯선 곳에 와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는 자신도 모르게 거친 말을 내뱉었다.'[“제기랄! 도대체 여기가 어디냐구? 내가 왜 이런 이상한 곳에 있어야 하냐구?”]'윤희는 조금씩 두려워졌다.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린다고는 하지만 여기는 한국이 아닌 외국이었다. 아니 외국 어딘지는 알지 못한다. 분명 자신은 프랑스에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쳐다보았다. 분명 끈으로 된 아름다웠던 푸른색의 스트랩 드레스는 구깃구깃한 채로 자신의 다리를 감싸고 있었다. 옷을 보자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맞아, 나 릭과 저녁 식사를 했었어. 리츠 호텔에서. 그런데 왜 여기에 와 있는 거지? 이런 산속에?”] '지금 구겨져 엉망인 이 옷이 릭과 식사할 때 입었던 드레스였다. 릭과 즐겁게 식사를 한 기억 이외는 어떠한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릭이란 남자 사람 속을 뒤집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식사 시간에는 웬일인지 무척 다정했던 기억이 났다. 평소의 릭이 아닐 정도로. 릭에게 생각이 미치자 릭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졌다. 자기가 여기에 있게 된 이유를 아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느끼자 그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릭이 비밀을 알고 있을까? 내가 여기 있게 된 데는 릭도 한 몫 한 걸까?”]'구겨져 엉망진창인 자기 옷차림을 내려다보고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갈아입을 만한 옷은 눈에 띄지 않았다. 사실 방 안에 거울이 없어 자신의 얼굴이 어떤 꼴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옷의 구겨진 정도를 보아서는 안 봐도 비디오가 확실했다. '침대 아래에 놓여 있던 자신의 구두를 신은 윤희는 방 안에 깔려있는 카펫에 구두 소리가 묻히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이 끼익 거리며 열리는 그 소리가 무척 크게 들린 그녀는 고개를 내밀고 좌우를 살폈다.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복도의 적막감에 조금은 불안해진 윤희는 그래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아야겠다는 강한 생각에 복도를 걸었다. 복도 끝으로 나오자 아래쪽에 로비가 보였으며 좌우로 곡선 모양의 계단이 있었다.'[“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무슨 성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내가 여기 왜 와 있는 거지?”]'윤희는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현관문을 살짝 밀자 쉽게 열렸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잘 조성된 정원을 쳐다보며 분명 자신이 모르는 장소임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관리를 잘 받은 듯한 정원으로 내려서자 자신의 다리를 감싸는 물체를 느꼈다. 고개를 내려 쳐다보니 좀 전에 자신과 같이 방 안에 있던 말티즈였다. 그 강아지는 사람의 온기가 필요한 듯 계속 그녀 다리 옆에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정원만 봐서는 어떠한 곳인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그녀는 누구라도 찾을 생각에 입을 열었다.'[“누구 없어요?”]'그녀의 한국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없겠지만 자신의 존재는 알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우선 익숙한 한국말로 뱉었다. 그때 정원 한쪽에서 정원사처럼 보이는 사람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누구시죠?”'그녀가 물어보자 그 사람은 그저 고개를 좌우로 흔들 뿐이었다.'“저기 프랑스어 몰라요?”'그는 윤희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말이 통하는 사람은 어디 있담. 그녀는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지친 표정을 한 채 자신이 머물렀던 방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곳의 소파에 한동안 앉아 있었을 즈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며 인상 좋아 보이는 외국인 아주머니 하나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윤희는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었다. 그녀는 아까 정원에서 봤던 남자와 달리 약간의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저기요. 여기가 어디에요?”'“여기는 텐부르크님의 별장이에요.”'“텐부르크? 그가 누구죠?”'“프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