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그날따라 큰오라버니의 잔소리가 듣기 싫었다. 후원에 핀 봄꽃의 향기가 살랑거리는 봄바람을 타고 사방에 흩날렸다. 달콤하고 향긋하다. 갓 만든 유과 같기도 하고 생강이 듬뿍 들어간 쌉쌀한 엿 같기도 하다.

예설은 두 눈을 감고 코를 킁킁거렸다.

“황예설, 집중하라니까.”

민설이 서안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주의를 줬지만 예설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이제 일곱 살이 된 예설은 색동저고리에 다홍치마를 곱게 차려입었다. 검고 큰 눈은 마치 별을 박아 넣은 듯 영민하게 반짝거리고 얼굴은 밀떡처럼 뽀얗다. 흑단처럼 검고 윤기가 흐르는 머리는 귀밑머리로 땋아 송화색 댕기로 묶었다. 비록 어리지만 출중한 미색이다.

“네가 배우고 싶다고 한 거잖아. 그런데 왜 이리 딴전이야?”

민설 또한 열네 살이란 나이답지 않게 의젓하면서도 관옥 같은 풍모를 지녔다. 황 정승가의 맏아들인 그는 세 살에 천자문을 익히고 다섯 살에 소학을 뗀 소문난 수재다. 남들은 사서삼경에 입문할 나이에 그는 이미 공맹을 줄줄 외울 정도로 천재적 기질을 보였다.

몇 달 전 민설의 청아한 강독 소리를 어깨너머로 듣던 예설이 먼저 글을 배우겠다고 자청했다. 하도 졸라 대는 것이 귀찮아 민설은 마지못해 누이에게 글 몇 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곧 싫증을 낼 거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예설은 솜이 물을 먹듯 글자를 술술 외웠다. 글씨도 단정했다. 그는 내심 놀라워하며 차츰 본인이 더 열성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예설은 글공부를 좋아했지만 아직 어리다 보니 오늘처럼 딴전을 피울 때가 있었다. 여아이니 장차 과거를 볼 것도 아니고 써먹을 일도 없건만 민설은 이상하게도 욕심을 부렸다. 학문을 숭상하는 순수한 학인의 마음이 앞선 것일 거다.

이때 정자 밖에서 허리에 목검을 찬 윤설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열세 살인 그는 민설과는 달리 온통 까무잡잡하면서도 다부진 체구를 지녔다.

“설이 너 여기서 뭐 해? 글공부 따위 집어치우고 나랑 목검 수련이나 하자니까.”

예설을 탐내는 건 민설만이 아니었다. 예설은 서너 살 무렵부터 윤설의 초식을 그대로 따라하는 등 무예에도 재능을 보였다. 또래 사내아이는 제대로 들지도 못하는 무거운 목검을 마치 나뭇가지처럼 가볍게 다룰 정도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타고난 강골이다.

“예설인 나와 공부할 거니까 넌 방해하지 마.”

민설이 점잖게 일축했지만, 윤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깟 공부는 해서 뭐 해? 과거에 나갈 것도 아닌데. 설아, 차라리 무예를 익히는 편이 더 나아. 나중에 네 남편이 너한테 손찌검이라도 하게 되면 그때 요절을 내 주란 말이다.”

“황윤설, 그게 무슨 소리야? 여인이라면 마땅히 부덕을 지켜야지.”

두 형제는 예설을 사이에 두고 한참이나 티격태격했다.

결국 이들의 실랑이를 참지 못한 예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 싫어. 둘 다 안 해.”

예설은 버럭 소리를 지른 후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 버렸다. 민설과 윤설이 미처 붙잡을 새도 없었다.

“황예설.”

“설아.”

공부는 어느새 숨바꼭질이 되어 버렸다. 까르르거리는 예설의 웃음소리와 민설과 윤설의 고함 소리가 집 안 곳곳에 울려 퍼졌다. 마당을 쓸던 억쇠도, 장독대에서 된장을 푸던 삼돌네도 말리기는커녕 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예설은 어머니의 거처인 안채로 달려들어갔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예설은 얼른 병풍 뒤로 숨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예설을 찾는 형제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고, 그 대신에 어머니의 격앙되면서도 숨 죽인 목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대감, 절대 안 됩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우리 가문은 풍비박산이 날 것입니다.”

예설은 졸린 눈을 비볐다.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그새 깜박 잠이 든 모양이다.

“부인, 부탁이오. 경창군의 하나 남은 핏줄만은 꼭 지켜 주고 싶소.”

아버지의 간곡한 음성이 연이어 들려왔다.

“압니다. 대감께서 우리 가문을 지키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신지를요. 그러니 이 희생을 더욱 헛되이 해선 안 됩니다. 그 아이를 데려왔다가 발각이라도 난다면 차라리 지금 멸문을 당하느니만 못할 것이에요.”

“부인. 그 아이, 일이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우리 예설이의 배필이 되었을 거요. 사위도 자식이라지 않소.”

“대감, 차라리 절 죽이세요.”

어머니는 급기야 흐느끼기 시작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병풍 안에 몸을 숨긴 예설조차 그 무거운 공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부인, 이제 진설이는 놓아줍시다.”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경창군을 내 손으로 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소. 내게 딸린 식솔이 몇인데 후회를 하겠소? 하지만 그의 아들을 내친다면 그것만은 평생 후회할 것이오. 죽을 때까지 내 마음의 짐으로 남을 것이오.”

“대감.”

예설은 다시금 잠이 들었다. 눈을 떠 보니 아침이었다. 어머니가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슬픔과 안타까움이 섞인 처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2년 후.

북촌에 자리한 좌상 황조순의 아흔아홉 칸 자택은 노론의 영수이자 조정의 실세답게 고래 등같이 크고 화려했다. 노론 명문가의 장자로 태어난 그는 십 대 후반에 장원 급제를 하여 화려하게 정계에 진출했다. 2년 전, 경창군 모반 사건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삼십 대 후반의 나이에는 좌의정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는 적당히 권모술수에 능하고 적당히 치부할 줄도 알았다. 그러면서도 적당히 백성들의 고충을 보듬을 줄도 알았다. 고리타분한 신념과 기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고 가문을 초토화시키는 건, 그의 성향이 아니었다. 그의 신념은 오래토록 정권을 잡아 가문의 영달을 꾀하는 것이다. 그의 땅에 소작을 부쳐 먹는 백성들은 과한 수탈에 대한 걱정 없이 넉넉한 생활을 유지했다. 당장이야 손해를 보는 것처럼 느껴져도 백성들의 마음을 잡아야 오래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잘 아는 것이다.

그는 뛰어난 학식은 물론이거니와 무예 또한 출중했다. 그의 남다른 재능은 자식에게 그대로 대물림되었다. 큰 아들 민설은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이름 높았고, 둘째 윤설은 무예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막내 예설은 비록 여자이나 공교롭게도 그 두 가지 재능을 한꺼번에 물려받았다. 책은 한 번만 훑어봐도 줄줄 외우고 검술이나 권법도 한 번만 시연해 주면 그대로 따라 한다.

그는 예설을 볼 때마다 내심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여인에게는 불필요할 뿐더러 오히려 걸림돌이 될 재능이니 그러하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다. 북촌의 황 정승가는 새벽부터 부산스러웠다. 가솔들이 죄다 동원되어 집 안팎을 쓸고 닦고 잔치 음식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종중 어르신들을 비롯한 손님들도 속속 도착했다.

이날은 김해 외가로 피접을 갔던 셋째 아들 황진설이 돌아오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