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추적추적 참 우울하게도 내렸다. 나하고 똑같아. 우경은 빗방울이 흩날리는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박진한, 이 개도 안 물어갈 인간아!” '나쁜 인간, 정말 나쁜 인간! 아무리 목청을 높여도 시원하지가 않았다. 주먹을 쥐고 사정없이 휘둘러도 보고, 소리쳐도 보지만 소용없었다. '“이……이……짐승만도 못한 인간!”'우경은 가슴을 쥐어뜯는 고통 속에서 흐느끼면서도 차마 십 원짜리 욕까지 할 배짱은 없어 원망도 돌려 말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어쩌면 가장 문제는 나일지도 몰라. 그녀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너 그렇게 살지 마라. 내 눈에서 눈물 나게 한 사람, 지금껏 잘 되는 거 못 봤어. 너도 반드시 피눈물 흘리게 될 거야!”'그녀는 나뭇가지가 앙상한 사과밭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어어엉, 어엉.”'이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딱히 더 소리칠 저주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 머린, 분명 하자 있는 머리야. '세상엔 많고 많은 저주가 있는데, 이 나이 되도록 이렇게 멍청하게 구는 걸 보니 분명 하자가 있었다. 기계처럼 업그레이드도 되지 않는데, 이 머리로 앞으로 남은 긴긴 세월을 어떻게 살아갈까 암담했다. 정말 화가 났다. 이런 고민까지 하게 만든 박진한이 너무 미웠다. '“안 그래도 우울해 죽겠는데! 대체 나한테 왜 이래!”'보름 뒤면 서른 번째 생일이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축하가 아닌 위로의 말을 건네는 서른 번째 생일이 코앞이라 안 그래도 심란했는데. 만 나이로 우겨야만 20대인 서른 살 생일을 코앞에 두고 비 내리는 사과밭에서 울고 있으니 이 구구절절한 청승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럼에도 한참을 그렇게 펑펑 울고 나자, 조금은 속이 후련해졌다. 아직 가슴에 맺힌 것이 확실하게 뻥 뚫린 것 같진 않지만 더 울어봐야 목만 아플 따름이다. 게다가 내일 아침 퉁퉁 부은 눈을 가라앉히는 것도 큰일이라 우경은 이쯤에서 그만 울기로 결정했다. 게다가 택시비도 없는데 지하철 끊기기 전에 돌아가야지, 우경은 힘없이 생각했다. '이 와중에도 택시비를 걱정하는 걸 보면, 현실은 피 흘리는 상처보다 더 지독하고 괘씸한 것이다. 그런데 눈물 콧물 훌쩍이며 돌아서던 우경이 콩알만 한 주홍 불빛을 보고 화들짝 놀라 멈춰 섰다. '비 내리는 밤, 사과밭에 웬 불빛? 3미터 정도의 거리에서 그녀 쪽을 향하고 있는 담뱃불은 우경의 사고를 멈추게 만들기 충분했다.'“어……어…….” '맹추처럼 ‘어버, 어버.’ 거리는데 주홍 불빛이 튕 하고 사라졌다. 희끄무레 한 어둠 속에서 뿌연 연기가 보였다. 흠, 하는 소리와 함께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도 분명히 들렸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보자 그녀 쪽을 향해 선, 담배 피우던 사람은 곧 남자라는 뜻이었다. 즉 이 망신살 뻗치는 추태를 어떤 남자가 죄다 본 것이다. '으아! 누구지, 누구? '퉁퉁 부은 눈으로 어둠 속을 살펴도 그림자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어쩜 좋아. 내일 소문 죄다 퍼지는 거 아니야?”'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해도 답이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아, 모르겠다. 우경은 코를 훌쩍거리며 동그란 어깨를 으쓱거렸다. 볼 테면 보라지. 한 맺힌 여자가 곡하는 거 봐서 무슨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그걸 보길 본담? 모른 척 해주는 센스가 없는 당신은 참 어지간히 할 일이 없구나, 없어.'그녀는 코를 훌쩍거리며 빗속을 걸어 내려왔다. 지하철 막차가 그녀를 버리고 떠나기 전에…….''1. 미친 봄날''세진대학교 농과대학에서 애지중지 키우는 사과밭은 한우 축사와 함께 농대의 명물로 손꼽혔다. 시골 과수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거대한 사과밭을 따라 언덕길을 5분 정도 내려오자 질서정연한 거대한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명문대 세진대학교의 교정을 스윽 둘러본 우경은 교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넓은 교정이라 교문까지 걸어가는데 15분은 족히 넘게 걸렸다. 그녀는 주홍빛 불빛이 총총히 줄지어 선 길을 부지런히 걸었다. 톡, 토독, 톡. 빗방울이 우산에 부딪치는 소리는 경쾌한데 그녀는 우울했다. 여전히 박진한 때문이었다. '내게 문제가 있는 걸까? 왜 날 쉽게 본 거지? '문제를 가진 사람이 박진한인지, 그녀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여러 번의 짝사랑을 했지만 이렇게 모욕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어쩌면 나이가 주는 무게감일지도 몰랐다. 서른이 코앞인 지금까지도 헛다리를 짚는 자신이 너무 어리석고 미숙해서 부끄러움마저 들었다.'콩나물시루와 다름없는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동안 마주한 계단이 까마득했다. 겨우 계단을 올라왔더니, 골목길은 또 왜 그렇게 긴지 모르겠다. 기운이 없어 몇 번이나 휘청거리면서 돌아온 집은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는데, 집 안 분위기는 마치 초저녁처럼 발랄했다. 이런 일이 드문데 어쩐 일인가 싶었다. 평소엔 무뚝뚝한 조미숙 여사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무척 상냥했다. '“우진아. 과일 좀 먹어라.”'조 여사의 말을 듣자 곧 이 유쾌 발랄한 분위기가 이해가 됐다. 사랑하는 큰아들이 오셨구나. 우경이 불퉁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다녀왔어요.”'“왔어? 우진아, 엄마가 참외 깎아 놨다. 너 이거 참 좋아하잖아.”'조 여사의 시선이 0.01초 우경에게 머물다 다시 우진에게로 향했다. 그 광경을 보자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나 왔다니까?”'“알았어. 네 오빠 오랜만에 왔잖아.”'우진이 어쩌고저쩌고. '흉부외과 레지던트 4년 차인 우진에겐 요즘 죽을 시간도 없음을 우경도 알고 있었다. 전문의 시험 준비하랴, 진료하랴. 집에서 얼굴을 보는 건 거의 두 달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퇴근해서 들어온 딸을 이렇게 천대하다니, 저렇게 아들이 좋을까? 게다가 오빠란 인간은 인사말 한 마디 없이 거만하게 그녀에게 손만 까딱거릴 뿐이었다. 거기까진 참았다. 이층 계단을 내려오던 연년생 동생, 우현이 하는 말이 마침내 그녀의 한계를 자극했다. '“어, 우경이 왔네?”'우경은 들고 있던 핸드백으로 우현의 복부를 쳤다. 안젤라 고모의 권유로 배운 팔씨름이 이럴 때 빛을 발한다. '“으악!”'예고 없이 강타를 맞은 우현이 비명을 지르며 푹 주저앉았다. 자고로 무엇이든 앞뒤 균형을 맞춰야 하는 법, 등짝도 갈겨주었다. 조 여사란 든든한 백이 말려 줄 틈도 없이 두 대나 맞은 우현은 배를 움켜쥔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야! 너 왜 이래!”'아직 더 맞아야겠다. 그녀는 백으로 우현의 머리를 한 번 더 쳤다. '“아이고, 사람 잡네!” '막내아들이 연거푸 수난을 당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조 여사는 난리가 났다.'“서우경, 너 지금 뭐하는 짓이야!”'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한 우현이 그녀를 노려보았다.'“너 진짜 왜 그래!”'이게 끝까지 누나라고 안 한다 이거지? 핸드백을 던져 버리고 주저앉은 우경이 우현의 멱살을 잡아 흔들며 소리쳤다.'“난 너 때문에 욕도 못하잖아! 욕하고 싶은데에!”'우현이 황당한 얼굴로 반문했다.'“그게 왜 나 때문이야?”'“몰라서 물어?”'수녀원에서 15년을 자라면 그렇게 된다. 아니, 나쁜 말은 나쁜 인격을 형성하는 지름길이라 절대 바르고 고운 말만 써야 한다고 세뇌당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당장이라도 죽일 듯 흥분한 우경의 모습에 위협을 느꼈나 보다. 우현이 조 여사를 향해 SOS를 청했다.'“엄마, 누나 좀 어떻게 해줘!”'이 자식, 불리할 때만 누나란다!'“우경이 너 오늘 왜 이래? 왜 그렇게 몸도 약한 애를 구박하고 난리야?”'몸이 약하다니. 키 185센티미터에 몸무게가 78킬로그램인 이 인간이 약하면 세상엔 다 죽을 사람밖에 없겠다.'“자자, 그만해. 니들 내일 출근 안 해?”'근엄한 척, 점잖은 척 우진이 우경과 우현을 떼어냈다. 다들 한통속! 식구들의 모습에 열불이 터져서 우경은 그만 이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이층 거실의 제집에 누워 있던 복동이 꼬리가 빠질 듯 흔들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평소라면 애완견 복동을 안고 예뻐라 해주겠지만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복동아 미안. 오늘은 누나가 좀 슬퍼.”'안아주지 못함을 사과한 우경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푹신한 시트에 얼굴을 묻자 참았던 눈물이 다시 나기 시작했다. 누구 때문에 이 나이 먹도록 이 모양인데! 저 망할 서우현만 없었어도 내가 이 지경까진 안 왔다고! '우경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곡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고오, 서러워서 어떡하나. 부모 복 없는 애는 형제 복도 없고, 서방 복도 없다는데! 조 여사는 계모가 틀림없으니 형제도 의붓 형제가 틀림없고, 그럼 서방도 분명 애를 먹일 거다. '“저기.”'어느 틈인지 따라 들어온 우현이 그녀의 들썩이는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너 울어?”'우경은 발차기를 날렸다. 우현의 넓적다리가 레이더에 포착되었다.'“나가!”'“야, 너 좀! 힘 좀 쓰지 마!”